●法眼
諱文益 生餘杭 姓魯氏 七歲從全偉禪師受業 得法於羅漢琛침 出遊至臨川 州牧請住崇壽 江南國主聞師道譽 迎入住報恩 賜淨慧禪師 後遷住淸凉 至周顯德五年示滅 諡號大法眼禪師 後因門人行言署玄覺導師 請 重諡大智藏大導師
휘가 文益(885-958)이며 여항에서 탄생했으며 성이 魯氏다. 七歲에 全偉禪師를 좇아 受業했으며 羅漢桂琛에게서 법을 얻었다. 出遊하여 臨川에 이르자 州牧이 청하여 崇壽院에 거주했다. 江南國主가 스님의 道譽(도의 名聲)를 듣고 영입하여 報恩院에 거주했고 賜號하여 淨慧禪師라 했다. 뒤에 淸凉院으로 옮겨 거주하다가 周 顯德五年958에 이르러 시멸했으며 시호가 大法眼禪師다. 뒤에 문인인 行言이 玄覺導師에 임명(署)됨으로 인하여 청하여 大智藏大導師로 重諡(二重으로 시호함)했다.
能仁
梵云釋迦 此言能仁 毗柰나耶雜事云 昔古有王 名曰甘蔗자 生四子 一名炬口 二名驢耳 三名象背 四名足玔천 四子有過 悉皆擯斥 時四童子往詣它方 至雪山側 於一河邊 各葺즙草庵 以自停息 夫婦婚媾 各生男女 時甘蔗王憶戀諸子 問大臣曰 我子何在 左右具陳上事 王曰 我子能爲如是事 答曰 彼能 因此種族號爲釋氏 玔 尺絹切
범어로 이르되 釋迦는 여기 말로는 能仁임. 비나야잡사(卷第三十四)에 이르되 오랜 옛적에 왕이 있었으니 이름해 가로되 甘蔗자다. 四子를 낳았는데 一은 이름이 炬口며 二는 이름이 驢耳며 三은 이름이 象背며 四는 이름이 足玔천이었다. 네 아들이 과실이 있어 모두 다 擯斥(擯은 물리칠 빈. 斥은 물리칠 척. 곧 쫓아냄)했다. 때에 네 동자가 다른 지방으로 往詣하여 설산 곁에 이르렀고 한 河川 가에 각자 草庵을 이어서(葺은 지붕 이을 즙) 각자 停息(머물며 휴식함)했다. 夫婦가 婚媾(媾는 거듭 婚姻할 구. 곧 혼인)하여 각자 男女(아들과 딸)를 낳았다. 때에 甘蔗王이 모든 아들을 憶戀(기억하고 그리워함)하여 大臣에게 물어 가로되 나의 아들들이 어디에 있는가. 左右가 위의 일을 갖추어 진술하자 왕이 가로되 나의 아들이 능히 이와 같은 일을 짓는가. 답해 가로되 그들은 能합니다. 이로 인하여 종족의 호가 釋氏가 되었다. 玔은 尺絹切임.
十二分
見雲門錄上
운문록상(위 卷第一)을 보라.
先漕▶漕는 배로 실어 나를 조.
當作先曹 謂先曹山也 然它錄未聞以曹山爲先曹
마땅히 先曹로 지어야 함. 이르자면 先曹山(曹山本寂)임. 그러나 它錄에 曹山으로써 先曹를 삼는 것을 듣지 못했음.
中興
王室中否而再興 謂之中興 如周之宣王 漢之光武 唐之中宗 吾道東漸 遭三武之難而後復 或宗匠德業降重 綱領斯道 使敎法中興者 法眼其人矣 三武者 謂魏武十九年 周武七年 唐武一年
왕실이 중간에 없어졌다가(否는 없을 부. 막힐 비) 다시 일어남이니 이를 일러 中興이라 함. 예컨대(如) 周의 宣王(재위 서기전 827-서기전 782)과 漢(後漢)의 光武帝(재위 25-57)와 唐의 中宗(재위 684-709. 중간에 則天의 周가 있었음)임. 우리의 道(佛道)가 東漸(세력을 점차 동쪽으로 옮김)하여 三武의 難을 만났다가 뒤에 회복했나니 혹은 宗匠의 德業이 거듭 내리어 이 도를 綱領(요약해서 列擧함)하여 敎法을 중흥 시킨 자는 法眼이 그 사람임. 三武란 것은 魏武(北魏太武帝 재위 423-452)十九年441(釋氏稽古略卷二 魏 太平眞君六年445 불교를 毀殘했다) 周武(北周武帝 재위 560-578)七年566(宗統編年卷之九 周建德三年574 像法을 毁했다) 唐武(唐武宗 在位 841-846)一年841(釋氏稽古略卷三 武宗乙丑五年845 五月 詔勅으로 天下佛寺를 併省하고 僧人을 選汰했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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