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자역주 조정사원

석자역주(釋字譯註) 조정사원(祖庭事苑) 卷第七 八方珠玉集 5 단하(丹霞)

태화당 2019. 9. 8. 09:23

丹霞

師諱天然 幼習儒 會禪客於長安道上 話選佛之緣 有所警發 因往謁馬大師 旣見 以手托起幞頭 大師顧示良久 且曰 石頭汝師也 宜造焉 因抵南嶽 見遷 復以手托幞頭 遷曰 著槽廠去 參扣三載 一日 應剗草之機 遂剃落 再謁馬祖 祖賜名天然 唐元和初 出遊京洛 與香山伏牛和上爲莫逆之友 過慧林寺 適天寒 燒木佛附炎 人或譏之 師恬不介意 三年 師橫臥於天津橋 會留守鄭公出 呵之不起 吏問何人 師徐曰 無事僧 留守異之 因加敬慕 洛下翕然歸信 晚思林泉 結茅於南陽之丹霞山 玄學雲臻 遂廣締構 長慶末年 備湯沐 整衣戴笠策杖 授屨垂一足 未及地而化 壽八十諡智通

 

스님의 휘는 天然(739-824)이며 어릴 적에 儒學을 익혔다. 장안의 길 위에서 선객을 만나 選佛의 인연을 얘기하매 警發(警覺하여 깨우침)하는 바가 있었다. 하여 馬大師往謁했는데 이미 보자 손으로써 를 밀어 일으켰다. 大師가 돌아보고 良久하고는 또 가로되 石頭(希遷)가 너의 스승이니 宜當 나아가거라. 인하여 南嶽에 다다라 希遷을 뵙고는 또 손으로써 복두를 밀었다. 이 가로되 槽廠(는 구유 조. 은 헛간 창. 곧 마굿간. 헛간. 後院)에 붙거라. 參扣(參問)한 지 三載에 어느 날 풀을 깎는 機緣에 응해 드디어 剃落(머리를 깎아서 떨어뜨림)했다. 馬祖再謁하자 天然이란 이름을 주었다. 唐 元和初806에 외출하여 京洛(서울)에 노닐었는데 香山伏牛和上(伏牛自在馬祖法嗣)莫逆之友(아주 허물이 없는 벗)가 되었다. 慧林寺를 지나가다가 마침 날씨가 추운지라(天寒) 木佛을 태워 불을 가까이했다. 사람이 혹은 그를 꾸짖었지만 스님은 편안히 介意치 않았다. 三年808 스님이 天津橋에 가로 누웠는데 留守鄭公의 외출을 만났다. 그를 꾸짖어도 일어나지 않자 관리가 묻되 어떤 사람입니까. 스님이 천천히 가로되 無事僧이니라. 留守가 이를 奇異하게 여겼고 인하여 敬慕를 더했으며 洛下(서울 지역)翕然(할 흡. 모일 흡. 합할 흡. 곧 대중의 意思가 한 곳으로 몰리는 정도가 대단한 모양)歸信(귀의해 믿음)했다. 晩年林泉을 생각하고 南陽丹霞山茅庵을 엮었는데 玄學(玄妙한 학문을 배우는 학자)雲臻(은 이를 진. 곧 구름처럼 모여 듦)하자 드디어 광대하게 締構(는 맺을 체. 곧 엮어 집을 지음)했다. 長慶末年824 湯沐(은 끓인 물. 은 씻을 목. 곧 목욕함)을 갖추고 옷을 가지런히 하고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신을 신고(와 통함. ) 한 발을 내리더니 땅에 미치지 않아서 化去했다. 나이는 八十六이며 시호는 智通이다.

 

一泓은 물 깊을 홍. 맑을 홍.

烏宏切 水深也

 

烏宏切이니 물이 깊음임.

 

두레박 호. 용두레 호.

荒故切 水器으로 의심됨.

 

荒故切이니 물 긷는 器具.

 

老耄는 늙은이 모.

音帽 惛忘也 春秋傳曰 謂老將知 耄又及之

 

음이 모니 惛忘(은 흐릴 혼. 곧 흐릿하게 잊음). 春秋傳(春秋左氏傳 昭公)에 가로되 이르자면 늙어서야() 장차 알고 늙어서야() 또 이에 미친다.

 

嵩山安

師名慧安 荊州枝江人 姓衛氏 生於隋開皇二年 終於唐景龍三年 凡一百二十八歲 世所謂老安國師者是矣 文帝開皇十七年 括天下私度僧尼 師因遁于山林 至唐太宗正觀中 謁忍祖 發明心地 高宗麟德年 止終南山之石壁 帝召之 力辭 入嵩少居焉 自爾學者依之 後應武后之詔 待以師禮 至中宗 延入宮禁者三載 旣而辭歸 俄萬回公過 師握手與語 侍者莫之能解 後八日 閉戶偃臥示寂

 

스님의 이름은 慧安(582-709)이며 형주 지강 사람이며 성은 衛氏. 隋 開皇二年582에 태어나서 唐 景龍三年709에 마쳤으므로 무릇 一百二十八歲이다. 세상에서 이른 바 老安國師란 자가 이것이다. 文帝 開皇十七年597 천하의 私度僧尼(의 허가 없이 승려가 된 비구와 비구니)總括하게 하자 스님이 인하여 山林에 은둔했다. 唐太宗 正觀中627-649에 이르러 弘忍祖師(五祖)禮謁心地를 발명했다. 高宗 麟德年664-665에 종남산의 石壁居止했다. 가 그를 불렀으나 강력히 사양하고 嵩少(嵩山少室山竝稱. 혹은 嵩山別稱)에 들어가 거주했으며 이로부터 학자가 그에게 依附했다. 뒤에 武后(則天武后)의 부름()에 응했는데 스승의 待遇했다. 中宗에 이르러 宮禁(궁궐)에 맞아들인 지 三載였는데 그러고선 고별하고 돌아왔다. 갑자기 萬回公이 이르러() 스님이 악수하고 더불어 얘기하는데 시자가 능히 이해하지 못했다. 八日 후에 閉戶하고 누워서 示寂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