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자역주 조정사원

석자역주(釋字譯註) 조정사원(祖庭事苑) 卷第七 八方珠玉集 16 조주(趙州)

태화당 2019. 9. 8. 09:39

趙州

師諱從諗 姓郝氏 曹州郝鄉人 作沙彌時 造南泉之室 穎拔不群 南泉待之異於流輩 一日問 如何是道 泉曰 平常心是道 師曰 還可趣向否 曰 擬向卽乖 師曰 不擬 那知是道 曰 道不屬知不知 知是妄覺 不知是無記 若眞達不擬之道 猶如大虛廓然 豈可强是非邪 師旣領旨 却往嵩嶽 請戒而歸 晚游河朔 被檀越之請 唱道於趙州之觀音 一日 眞定帥王公鎔訪師 師坐而問曰 會麽 王曰 不會 師曰 自小持齋身已老 見人無力下禪牀 公益加敬仰 至唐昭宗乾寧年 仲冬二日 右脇示寂 諡眞際大師는 마땅히 로 지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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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휘는 從諗(778-897)이며 성은 曹州 郝鄉 사람이다. 사미가 되었을 때 南泉로 나아갔는데 穎拔(송곳 끝이 빼어남)하여 不群(어떤 무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뛰어남)이라 남천이 그를 접대함이 流輩(는 무리 류. 곧 같은 또래)와 달랐다. 어느 날 묻되 무엇이 이 입니까. 이 가로되 平常心이 이 도이니라. 스님이 가로되 도리어 가히 趣向(趨蹌할 취. 뜻 취. 곧 목적을 정하여 그에 향하는 것)합니까. 가로되 취향하려 한다면 곧 어긋나느니라. 스님이 가로되 헤아리지() 않으면 어떻게 이 를 알겠습니까. 가로되 도는 앎과 알지 못함에 속하지 않나니 앎은 이 妄覺(허망한 생각. 망령된 생각)이며 알지 못함은 이 無記(華嚴經疏卷第二十四에 이르되 非善非惡이라 능히 非愛果報招感하지 않음을 이름하여 無記이다. 허망하게 推度하여 非理로 물어 힐난하므로 가히 記錄치 않으므로 고로 이름이 無記善惡으로 상대하지 않는 연고이다)이다. 만약 진실로 헤아리지 않음의 를 통달했다면 마치 큰 허공의 廓然(은 휑할 확. 곧 휑함)함과 같거늘 어찌 가히 애써 시비하리오. 스님이 이미 지취를 領悟(은 깨달을 령)하고는 도리어 숭악으로 가서 請戒(함이니 곧 受戒)하고 돌아왔다. 만년에 河朔에 노닐다가 단월의 청을 입어 趙州의 관음원에서 唱道했다. 어느 날 眞定帥王公鎔(五代 때의 偏覇釋氏稽古略卷三에 이르되 王鎔鎭州眞定府統率하며 趙王이라고 일컬었다)이 스님을 방문했다. 스님이 앉아서 물어 가로되 알겠습니까. 이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 스님이 가로되 어릴 적부터 를 가져 몸이 이미 늙은지라 사람을 보고도 禪牀에서 내려올 힘이 없습니다. 이 더욱 敬仰을 더했다. 唐 昭宗 乾寧末年897 仲冬(十一月) 二日에 이르러 右脇하여 示寂했다. 시호가 眞際大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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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王

卽鎭帥王鎔也 鎔祖王庭湊 本回鶻種族 穆宗時據河朔 稱留後 至鎔封趙王 唐室中興 至明宗朝 爲大將王德明所殺 至於赤族 所謂見趙州之趙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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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帥(鎭州의 통솔자)王鎔이다. 의 조상인 王庭湊는 본디 回鶻(回紇이니 나라 때 위구르를 이르던 이름) 종족이다. 穆宗(재위 821-824) 河朔을 근거로 留後라 일컬었으며 왕용에 이르러 趙王에 책봉되었다. 唐室(後唐을 가리킴)이 중흥하여 明宗朝(926-933)에 이르러 대장 王德明에게 살해되는 바가 되었으며 赤族(의 뜻. 一族이 모두 살해됨)에 이르렀다. 이른 바 조주를 뵌 趙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