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桑花
?葉如桑 花房如桐 長寸餘 似重臺蓮 其色淺紅 故得佛桑之名 見酉陽難俎조▶書에 ?字가 없음. 마땅히 幹으로 지어야 함.
줄기와 잎은 뽕나무와 같고 花房(꽃방)은 오동나무와 같으며 길이는 寸餘며 重臺蓮과 비슷하며 그 色은 옅은 홍색이다. 고로 佛桑이란 이름을 얻는다. 酉陽難俎조를 보라.
疏山
師諱光仁 參洞山 有時譽예 晚住臨川疏山 遷化之日 作偈曰 我路碧空外 白雲無處閑 世有無根樹 黃葉風送還 師嘗著四大等頌 略華嚴長者論 傳於世 洞山會中稱矮師叔者是矣
스님의 휘는 光仁(또한 匡仁으로 짓기도 함. 洞山良价의 法嗣)이며 洞山(良价)을 參하였으며 당시의 榮譽예가 있었다. 만년에 臨川의 疏山에 거주했는데 遷化(교화를 다른 데로 옮김. 곧 죽음)하던 날에 偈를 지어 가로되 나의 길은 푸른 허공 밖이라/ 흰 구름이 한가히 處함이 없도다/ 세상에 뿌리 없는 나무가 있어/ 누런 잎을 바람이 送還하네. 스님이 일찍이 四大 등의 頌과 略華嚴長者論을 지어 세상에 전해졌으며 洞山會中에서 일컬어 矮師叔이라 하는 자가 이것이다.
馬大師
師諱道一 生漢州什仿 姓馬氏 生而奇偉 牛行虎視 引舌過鼻 足有輪相 出家於羅漢寺 受具於渝투유州 唐玄宗開元中 結侶游衡湘 讓和上一見而獨異之 然亦應般若多羅之讖참 所謂金雞解銜함一粒米 供養十方羅漢僧是也 又六祖謂南嶽曰 向後佛法從汝邊去 生一馬駒子 踏殺天下人 師道行江西 時人稱之爲馬祖 師自建陽之佛迹嶺 遷臨川及灨감공上 其游化不常 至代宗大歷中 至洪都開元 連帥路嗣恭 敬受宗旨 禪學輻湊 說法無量 至德宗貞元四年 登建昌石門山 謂侍者曰 吾沒後 當託質茲地 卒年八十 後門人得舍利 歸葬於泐륵潭山 敕諡大寂禪師 王莽改郡守曰連師 見西漢書 灨 水名 音紺▶師는 마땅히 帥로 지어야 함.
스님의 휘는 道一(709-788)이며 漢州의 什仿에서 태어났으며 성은 馬氏이다. 태어나자 奇偉(奇異하고 偉大함)하여 소의 행보와 범의 봄(視)이었고 혀를 늘이면 코를 지났으며 발에 輪相이 있었다. 羅漢寺에 출가하고 渝州(渝는 고을 이름 투. 원음이 유)에서 受具(具足戒를 받음)했다. 唐 玄宗 開元中713-741에 벗들과 結約하고 衡湘(衡山과 湘水)에 노닐었다. 懷讓和上(大鑑慧能의 法嗣)이 한 번 보고 유독 그를 기이히 여겼다. 그러하여 또한 般若多羅(二十七祖)의 讖참(豫言)에 상응하였으니 이른 바 金雞가 一粒의 米를 머금을 줄 알아 十方의 羅漢僧에게 공양한다 함이 이것이다. 또 六祖가 南嶽(懷讓)에게 일러 가로되 향후에 불법이 너의 가(邊)를 좇아가리니 한 馬駒子(망아지)를 낳아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이리라. 스님이 道를 江西에서 행했으며 時人이 그를 일컬어 馬祖라 하였다. 스님이 建陽의 佛迹嶺으로부터 臨川과 및 灨감공上으로 옮겼으며 그 游化(노닐면서 교화함)가 恒常하지 않았다. 代宗 大歷中766-779에 이르러 洪都의 開元寺에 이르자 連帥인 路嗣恭이 宗旨를 敬受했고 禪學者가 輻복湊주했으며 설법이 무량했다. 德宗 貞元四年788에 이르러 建昌의 石門山에 올라 시자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沒한 후 마땅히 이 땅에 몸(質은 形體 질. 몸 질)을 기탁하리라. 卒한 나이는 八十이며 후에 門人이 사리를 얻어 泐륵潭山에 歸葬했으며 大寂禪師로 敕諡(왕의 명령으로 諡號함)했다. 王莽이 郡守를 고쳐 連帥라 했으니 西漢書(漢書卷九十九下)를 보라. 灨(물 이름 감. 공)은 물 이름이니 음이 감임.
麻谷
師名寶徹 住麻谷山
스님의 이름은 寶徹(馬祖의 法嗣)이며 麻谷山에 거주했음.
三角
名總印 住三角山
이름이 總印(馬祖의 法嗣)이며 三角山에 거주했음.
凸▶볼록할 철.
徒結切 高也
徒結切이니 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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