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자역주 조정사원

석자역주(釋字譯註) 조정사원(祖庭事苑) 卷第七 八方珠玉集 18 불상화(佛桑花)

태화당 2019. 9. 8. 09:42

佛桑花

?葉如桑 花房如桐 長寸餘 似重臺蓮 其色淺紅 故得佛桑之名 見酉陽難俎?字가 없음. 마땅히 으로 지어야 함.

 

줄기와 잎은 뽕나무와 같고 花房(꽃방)은 오동나무와 같으며 길이는 寸餘重臺蓮과 비슷하며 그 은 옅은 홍색이다. 고로 佛桑이란 이름을 얻는다. 酉陽難俎를 보라.

 

疏山

師諱光仁 參洞山 有時譽 晚住臨川疏山 遷化之日 作偈曰 我路碧空外 白雲無處閑 世有無根樹 黃葉風送還 師嘗著四大等頌 略華嚴長者論 傳於世 洞山會中稱矮師叔者是矣


스님의 휘는 光仁(또한 匡仁으로 짓기도 함. 洞山良价法嗣)이며 洞山(良价)하였으며 당시의 榮譽가 있었다. 만년에 臨川疏山에 거주했는데 遷化(교화를 다른 데로 옮김. 곧 죽음)하던 날에 를 지어 가로되 나의 길은 푸른 허공 밖이라/ 흰 구름이 한가히 함이 없도다/ 세상에 뿌리 없는 나무가 있어/ 누런 잎을 바람이 送還하네. 스님이 일찍이 四大 등의 略華嚴長者論을 지어 세상에 전해졌으며 洞山會中에서 일컬어 矮師叔이라 하는 자가 이것이다.

 

馬大師

師諱道一 生漢州什仿 姓馬氏 生而奇偉 牛行虎視 引舌過鼻 足有輪相 出家於羅漢寺 受具於渝州 唐玄宗開元中 結侶游衡湘 讓和上一見而獨異之 然亦應般若多羅之讖 所謂金雞解銜一粒米 供養十方羅漢僧是也 又六祖謂南嶽曰 向後佛法從汝邊去 生一馬駒子 踏殺天下人 師道行江西 時人稱之爲馬祖 師自建陽之佛迹嶺 遷臨川及灨上 其游化不常 至代宗大歷中 至洪都開元 連帥路嗣恭 敬受宗旨 禪學輻湊 說法無量 至德宗貞元四年 登建昌石門山 謂侍者曰 吾沒後 當託質茲地 卒年八十 後門人得舍利 歸葬於泐潭山 敕諡大寂禪師 王莽改郡守曰連 見西漢書 灨 水名 音紺는 마땅히 로 지어야 함.

 

스님의 휘는 道一(709-788)이며 漢州什仿에서 태어났으며 성은 馬氏이다. 태어나자 奇偉(奇異하고 偉大)하여 소의 행보와 범의 봄()이었고 혀를 늘이면 코를 지났으며 발에 輪相이 있었다. 羅漢寺에 출가하고 渝州(는 고을 이름 투. 원음이 유)에서 受具(具足戒를 받음)했다. 唐 玄宗 開元中713-741에 벗들과 結約하고 衡湘(衡山湘水)에 노닐었다. 懷讓和上(大鑑慧能法嗣)이 한 번 보고 유독 그를 기이히 여겼다. 그러하여 또한 般若多羅(二十七祖)(豫言)에 상응하였으니 이른 바 金雞一粒를 머금을 줄 알아 十方羅漢僧에게 공양한다 함이 이것이다. 六祖南嶽(懷讓)에게 일러 가로되 향후에 불법이 너의 가()를 좇아가리니 한 馬駒子(망아지)를 낳아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이리라. 스님이 江西에서 행했으며 時人이 그를 일컬어 馬祖라 하였다. 스님이 建陽佛迹嶺으로부터 臨川과 및 으로 옮겼으며 그 游化(노닐면서 교화함)恒常하지 않았다. 代宗 大歷中766-779에 이르러 洪都開元寺에 이르자 連帥路嗣恭宗旨敬受했고 禪學者했으며 설법이 무량했다. 德宗 貞元四年788에 이르러 建昌石門山에 올라 시자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한 후 마땅히 이 땅에 몸(形體 . 몸 질)을 기탁하리라. 한 나이는 八十이며 후에 門人이 사리를 얻어 潭山歸葬했으며 大寂禪師敕諡(왕의 명령으로 諡號)했다. 王莽郡守를 고쳐 連帥라 했으니 西漢書(漢書卷九十九下)를 보라. (물 이름 감. )은 물 이름이니 음이 감임.

 

麻谷

師名寶徹 住麻谷山

 

스님의 이름은 寶徹(馬祖法嗣)이며 麻谷山에 거주했음.

 

三角

名總印 住三角山

 

이름이 總印(馬祖法嗣)이며 三角山에 거주했음.

 

볼록할 철.

徒結切 高也

 

徒結切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