尉遲▶尉은 음이 울이며 울지는 複姓임.
嘗讀尉遲公傳 而且無金牙弧호矢之說 亦未詳於何而作此言 尉 音鬱 尉遲本虜複姓
일찌기 尉遲公傳(尉遲公은 唐太宗 때의 名將 尉遲敬德)을 읽었는데 또 金牙와 弧矢(弧는 활 호)의 설이 없었다. 또한 어디에서 이 말을 지었는지 미상이다. 尉은 음이 울이며 울지는 본래 虜(중국인이 중국 북방의 이민족을 일컫는 말. 주로 흉노를 指稱함. 또 외국인을 얕잡아 이르는 말)의 複姓이다.
宵內▶宵는 밤 소.
本作霄路
본래 霄路(霄는 하늘 소)로 지어졌음.
雀兒▶雀는 참새 작. 兒는 助字. 곧 참새.
本作鵲兒
본래 鵲兒(鵲은 까치 작)로 지어졌음.
魯般▶淮南子卷十一齊俗訓에 이르되 魯般과 墨子가 나무로 鳶연을 만들어 그것을 날렸는데 三日 동안 머물지(集止也) 않았다. 또 위 卷第二에 이르되 魯般은 옛적의 般輸子이다.
音班 般輸也
음이 반이니 般輸임.
玉漏
當作玉耬 謂耬루犂려也 耕人用耬 所以布子種 禪錄所謂看耬打耬 正謂是也 魏略曰 皇甫陰爲燩격煌太守 民不曉耕種 因敎民作耬犂 省생力過半 然耬乃陸種之具 南人多不識之 故詳出焉 音樓
마땅히 玉耬로 지어야 하나니 이르자면 耬犂(耬는 씨 뿌리는 기구 루. 犂는 밭 갈 려. 보습 려. 얼룩소 리)임. 耕人(農夫)이 耬를 쓰나니 子種(種子)을 펴는 데 쓰이는 것임. 선록에서 이르는 바 看耬打耬(耬를 보며 耬를 때림)가 바로 이를 말함임. 魏略(列傳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元本은 散失되어 전해지지 않으나 淸나라의 張鵬一이 위략의 逸文을 集成하여 編纂한 魏略輯本二十五卷이 있음)에 가로되 皇甫陰이 燩격煌太守가 되었다. 인민이 耕種(논밭을 갈고 씨를 뿌림)을 알지 못하므로 인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耬犂를 만들게 하였는데 힘을 더는 것이 過半이었다. 그러하여 耬는 곧 땅에 씨 뿌리는 기구이거늘 南人이 많이 이를 알지 못하므로 고로 상세히 내놓음. 음이 루임.
行家
上戶刪切▶刪은 剛으로 의심됨.
上은 戶剛切임.
洛浦
本作樂普 師諱元安 鳳翔麟遊談氏子 剃頭受具於鄉里 初參翠微臨濟 每蒙印可 晚卓庵於澧례陽之夾山 機緣相投 遂爲會公高弟 宴연坐洛浦山 未幾 遷朗州之蘇溪 道播파天下 如烏牙靑峯 皆其嗣子 唐昭宗光化二年臘月二日示寂
본래 樂普로 지어졌음. 스님의 휘는 元安(?-899)이며 봉상 인유 談氏의 아들이며 향리에서 머리 깎고 受具했다. 처음 翠微(無學이니 丹霞天然의 法嗣. 靑原下三世)와 臨濟(義玄이니 黃檗希運의 法嗣. 南嶽下四世)를 參見하여 매번 인가를 받았다(蒙). 늦게서야 澧례陽의 夾山에 卓庵(卓은 세울 탁)했는데 機緣이 서로 투합해 드디어 會公(夾山善會)의 高弟(高足弟子)가 되었다. 洛浦山에 宴坐(宴은 편안할 연)하다가 未幾(동안이 얼마 오래지 아니함)에 낭주의 소계로 옮겼으며 도가 천하에 퍼졌다(播). 烏牙(彦賓)와 靑峯(傳楚) 같은 이가 다 그의 嗣子다. 唐 昭宗 光化二年899 납월 二日에 示寂했다.
鴻門
見懷禪師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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懷禪師後錄(위 卷第五)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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