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자역주 조정사원

석자역주(釋字譯註) 조정사원(祖庭事苑) 卷第七 八方珠玉集 32 서당(西堂)

태화당 2019. 9. 8. 09:55

西堂

師諱智藏 虔化廖氏子 沖幼從師 晚從大寂問道 爲馬祖高弟 寂付衲迦沙 令學者親近 至唐德宗貞元間 開堂於虔州 至憲宗元和九年 四月八日示化 年八十歲

) --> 

스님의 휘는 智藏(735-814. 馬祖法嗣)이며 건화 의 아들이다. 어릴 적(은 어릴 충)에 스승을 좇았고 늦게서야 大寂(馬祖諡號)을 좇아 도를 물었으며 마조의 高弟가 된다. 衲衣迦沙를 부촉하며 학자로 하여금 친근하게 했다. 唐 德宗 貞元間785-805에서 개당했다. 憲宗 元和九年814 四月 八日에 이르러 示化했으며 나이는 八十歲이다.

) --> 

仰山

師諱慧寂 韶州湞昌縣葉氏子 初生頗有異蹟 爲童穉 依番禺安和寺不語通出家 年十四 父母欲奪其志 遂斷二指以爲誓 因從剃落 通累加接引 而師無所啓發 年十八 通卒 因往謁乳源 洎筠州處微 吉州性空 鵶山躭源 皆不契 至大和三年 參大潙祐 擧性空如人在井之緣 潙山召曰 寂子 師應 山云 出了也 師因而有省 山指令請戒於襄陽之大悲 師曰 慧寂平生不妄語 山云 你但依沙門法 師從之 時年三十三矣 復還潙山作直歲 尋領衆居郴州之王莽山 旣而移錫來袁居仰山 衆盈數百 一日 有梵僧負貝葉造師 師問 近離甚處 曰 早別西天 師曰 太遲生 曰 游山翫水 師曰 神通不無你 佛法未夢見 曰 來此禮文殊 却遇小釋迦 語訖隱去 師住仰山 神異具它傳 大中十三年 韋宙中丞 爲師創洪州觀音院居之 咸通中 歸韶州之東平 至中和三年二月十三日 集衆說偈 以兩手抱屈膝 儼然而終 歸葬於仰山 師行道於世 蒙寵賜者三 懿宗賜號知宗 僖宗賜澄虛 昭宗諡智通 湞 音貞 番禺 音藩禺 郴 丑林切

) --> 

스님의 휘는 慧寂(807-883)이며 소주 정창현 의 아들이다. 처음 태어나자 자못 異蹟(은 자취 적)이 있었다. 어린아이(는 어릴 치)가 되었을 적에 番禺(은 땅 이름 옹)安和寺 不語通(和安通이니 百丈懷海法嗣)을 의지해 출가했다. 나이 十四에 부모가 그 意志를 빼앗으려 하자 드디어 두 손가락을 잘라 맹서로 삼았으므로 인하여 剃落(머리카락을 깎아 떨어뜨림)을 좇았다. 불어통이 여러 차례 接引을 가했지만 스님이 啓發하는 바가 없었다. 나이 十八하자 인하여 乳源往謁했고 筠州處微(西堂智藏法嗣. 南嶽下三世)吉州性空(丹霞天然法嗣. 靑原下三世)鵶山躭源(慧忠國師法嗣. 大鑑慧能下二世)에 이르렀지만 다 계합하지 못했다. 大和三年829 大潙靈祐를 참례하여 性空의 어떤 사람이 우물에 있다는 인연을 들었다()(傳燈錄卷第九 石霜山性空禪師 중이 묻되 무엇이 이 西來意입니까. 스님이 가로되 어떤 사람이 千尺의 우물 중에 있는데 한 치의 새끼도 빌리지 않고 이 사람을 나오게 한다면 곧 너에게 서래의를 답하리라). 위산이 불러 가로되 寂子(앙산의 이름이 慧寂이며 는 남자의 通稱). 스님이 應?(?와 같음. 대답할 야. 곧 응답)했다. 이 가로되 나왔구나. 스님이 인하여 살핌이 있었다. 襄陽大悲院請戒하기를 지령하자 스님이 가로되 慧寂은 평생 妄語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르되 너는 단지 沙門法에 의지하라. 스님이 이를 좇았는데 때의 나이가 三十三이었다. 다시 위산으로 돌아와 直歲(禪苑淸規第三卷에 이르되 直歲은 무릇 사원 중의 作務에 관계하여 아울러 所爲主宰한다)가 되었다. 이윽고 대중을 거느리고 王莽에 거주했다. 이미 그러고선 錫杖을 옮겨 袁州로 와서 仰山에 거주했는데 대중이 數百을 채웠다. 어느 날 어떤 梵僧貝葉(貝多羅葉이니 곧 貝葉經)을 지고 스님에게 나아갔다. 스님이 묻되 최근에 어느 곳을 떠났느냐. 가로되 아침에 西天을 떠났습니다. 스님이 가로되 너무 느리구나(太遲生助字). 가로되 游山하며 물 구경을 했습니다. 스님이 가로되 신통은 네가 없지 않지만 불법은 꿈에도 보지 못하였다. 가로되 여기에 와서 文殊를 참례하려다가 도리어 小釋迦를 만났다. 말을 마치자 隱沒했다. 스님이 仰山에 거주하면서의 神異는 다른 傳記에 갖추었다. 大中十三年859 韋宙中丞(中丞官名)이 스님을 위해 홍주 관음원을 창건하고 이에 거주케 했다. 咸通中860-873韶州東平院에 돌아와 中和三年883 二月 十三日에 이르러 대중을 소집해 說偈하고 兩手로써 무릎을 안아 옴츠리고 儼然히 마쳤고 앙산에 歸葬(돌아가서 葬事를 지냄)했다. 스님이 세상에 도를 행하면서 寵賜를 입은 것이 세 번이다. 懿宗(재위 859-873)知宗이란 호를 주었고 僖宗(재위 873-888)澄虛를 주었고 昭宗(재위 888-904)은 시호하여 智通이라 했다. 은 음이 정이며 番禺은 음이 藩禺이며 丑林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