龍濟
師名紹修 嗣地藏 卽羅漢琛침也
스님의 이름은 紹修(羅漢桂琛의 法嗣)며 地藏을 이었으니 곧 羅漢桂琛(玄沙師備의 法嗣)임.
雪峯
師諱義存 泉州安南曾氏子 生不茹葷 幼聞鐘梵 見華幡 必動容 年十七 從蒲田玉澗寺玄律師落髮 具戒於幽州 久游叢林 發明於德山 至鼇山頓證 唐咸通中 結茅於福州之雪峯 後成大伽藍 爲第一世 懿宗賜紫僧伽梨 號眞覺大師 學者甚盛 道行于四十餘載 至梁開平二年 五月二日 無疾而終 壽八十七
스님의 휘는 義存(822-908)이며 천주 안남 曾氏의 아들이다. 태어나자 薰菜를 먹지 않았고 어릴 적에 종소리나 梵唄를 듣거나 華幡(華麗한 幡)을 보면 반드시 얼굴을 움직였다. 나이 十七에 포전의 옥간사 玄律師를 좇아 落髮하고 유주에서 具戒했다. 오래 총림에 노닐다가 德山(宣鑑)에게서 발명했고 鼇오山에 이르러 頓證했다. 唐 咸通中860-873 福州의 설봉에 茅庵을 엮었는데 후에 대가람을 이루었고 第一世가 된다. 懿宗이 紫僧伽梨를 주면서 호를 眞覺大師라 했다. 학자가 매우 성했다. 四十餘 해 동안 도를 행하다가 梁 開平二年908 五月 二日에 이르러 질병 없이 마쳤다. 나이는 八十七이다.
明招
師名德謙 旣於羅山得旨 出游 婺女之智者 命居第一座 尋常點淨 師輒첩不受 主事僧曰 首座觸淨也不識 師下牀 拈起淨器曰 者箇是淨是觸 主事無語 卽撲박破 晚居明招山四十餘載 一日 問侍者 世尊示滅展雙足 放百寶光明 吾今行矣 且道 放多少光 侍者曰 昔日鶴林 今朝和上 師以手拂眉曰 莫孤負麽 復說偈 奄엄化
스님의 이름은 德謙이다. 이미 羅山(道閑이니 巖頭全奯의 法嗣)에게서 지취를 얻었으며 나가 유행했다. 婺女의 智者가 命令해 第一座에 거처케 했다. 尋常의 點淨(비구가 三衣 坐具 尼師壇 등을 얻어서 受用할 때 낡은 옷의 한쪽 천을 새옷에다 붙이고는 거기에다가 먹으로 點을 찍는 것. 이 점찍는 법에 의해 수용하면 制規에 어긋나지 않으므로 點淨이라 함)을 스님이 番番이 受用하지 않았다. 主事僧이 가로되 수좌는 觸淨(觸은 더러울 촉. 南海寄歸內法傳卷第一에 이르되 무릇 물은 淨觸을 나누어야 하며 甁은 二枚가 있어야 한다. 淨한 것은 다 瓦瓷를 쓰고 觸한 것은 임의대로 銅鐵을 兼한다. 淨은 非時를 향해 飮用하고 觸은 곧 便변利에 쓰이는 것이다)도 알지 못하는가. 스님이 선상에서 내려와 淨器를 잡아 일으키고 가로되 이것은 이 淨인가 이 觸인가. 主事가 말이 없자 곧 撲破(撲은 칠 박)했다. 만년에 明招山에 거주한 지가 四十餘 해였다. 어느 날 시자에게 묻되 세존이 示滅하면서 雙足을 펴시어 온갖 보배 광명을 놓았거니와 내가 이제 떠나려고 한다. 그래 말하라 多少의 빛을 놓는가. 시자가 가로되 지난날은 鶴林이었고 오늘 아침은 화상입니다. 스님이 손으로써 눈썹을 떨치고 가로되 孤負함이 아닌가. 다시 偈를 설하고 奄化(奄은 문득 엄)했다.
雙峯
師名敬欽 生緣益州 受業於峩嵋山 造雲門法席 密承印可 尋居雙峯 爲第一世 至太平興國二年五月 指日而逝
스님의 이름은 敬欽(諸書에 많이 竟欽으로 표기하며 雲門의 法嗣임)이며 生緣(故鄕)은 益州이다. 아미산에서 受業했고 운문의 법석에 나아가(造는 나아갈 조) 비밀히 印可를 承受했다. 이윽고 雙峯에 거주했으며 第一世가 된다. 太平興國二年977 五月에 이르러 해를 가리키며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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