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태화선학대사전 10책(ㅎ)

국역태화선학대사전(國譯泰華禪學大辭典) 10책(ㅎ) 381쪽

태화당 2019. 12. 29. 09:15

慧劍喩指佛敎智慧 取其可斬斷一切煩惱及外道邪說之義 永嘉證道歌 大丈夫秉慧劍 般若鋒兮金剛焰 非但空摧外道心 早曾落却天魔膽

혜검(慧劍) 불교의 지혜를 비유로 가리킴. 그것이 가히 일체의 번뇌 및 외도사설(外道邪說)을 참단(斬斷)함의 뜻을 취했음. 영가증도가. 대장부가 혜검(慧劍)을 잡으니/ 반야의 칼날이며 금강의 화염이다/ 단지 외도의 마음을 비워 꺾음만이 아니라/ 벌써 일찍이 천마(天魔)의 쓸개를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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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堅五代後晉曹洞宗僧 嗣靈泉歸仁(良价下二世) 居郢州(湖北)大陽山 [五燈會元十四]

혜견(慧堅) 오대 후진 조동종승. 영천귀인(양개하 2)을 이었고 영주(호북) 대양산에 거주했음 [오등회원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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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鏡智慧能照物 如明鏡 無異廣錄三十一 揭露衣珠 重披慧鏡

혜경(慧鏡) 지혜로 능히 물건을 비춤이 명경과 같음. 무이광록31. 의주(衣珠)를 높이 들어 드러내고 혜경(慧鏡)을 거듭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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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經(1548-1618) 明代曹洞宗僧 撫州崇仁(江西崇仁)人 俗姓裴 字無明 夙有出家之志 至廩山從蘊空常忠(151 4-1588)修法三年 得省後 隱遁於峩峰三年 一日 因移石 石堅不可擧 極力推之 乃豁然大悟 偈呈常忠 甚得器識 然以體軀衰弱 耕作誦讀 二十七歲始出家受具足戒 爾後二十四年未出峩峰 明萬曆二十六年(1598) 應鄕邑之請住持寶方寺 自事作務 經數年殿宇一新 後南遊參訪雲棲袾宏 又禮謁嵩山少林寺初祖達磨之塔 往京師拜謁達觀 入五臺山參禮瑞峰 回寶方寺後 以博山元來爲首座開堂說法 大弘曹洞宗風 萬曆三十六年 應請移至新城壽昌寺 仍不廢勞務 常以偈頌法語應答參禪者 四十六年正月示寂 世壽七十一 法嗣有博山元來 晦臺元鏡 見如元謐 永覺元賢等 其中元賢編有無明慧經禪師語錄四卷 竝撰行業記 憨山德淸撰有塔銘 [禪餘外集二十四 釋鑑稽古略續集三 補續高僧傳十六 禪林僧寶傳十四]

혜경(慧經) (1548-1618) 명대(明代) 조동종승. 무주 숭인(崇仁; 강서 숭인)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배()며 자()는 무명(無明). 본디 출가의 뜻이 있어 늠산(廩山)에 이르러 온공상충(蘊空常忠; 1514-1588)을 좇아 수법(修法)하기 3년 만에 성찰(省察)함을 얻은 후 아봉(峩峰)에 은둔(隱遁)하기 3년이었음. 어느 날 돌을 옮기는데 돌이 견고해 가히 들지 못하는지라 힘을 다해 그것을 밀다가 곧 휑하게 대오했음. ()를 상충(常忠)에게 보이자 매우 법기(法器)로 인식됨을 얻었음. 그러나 체구(體軀)가 쇠약(衰弱)했기 때문에 경작(耕作)하며 송독(誦讀)했음. 27살에 비로소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그 후 24년 동안 아봉(峩峰)을 벗어나지 않았음. () 만력(萬曆) 26(1598) 향읍(鄕邑)의 요청에 응해 보방사(寶方寺)에 주지(住持)했는데 자사(自事)로 작무(作務)하였고 몇 년을 경과하면서 전우(殿宇)를 일신(一新)했음. 후에 남유(南遊)하면서 운서주굉(雲棲袾宏)을 참방(參訪)하고 또한 숭산(嵩山) 소림사의 초조달마(初祖達磨)의 탑을 예알(禮謁)하고 경사(京師)로 가서 달관(達觀)을 배알(拜謁)하고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서봉(瑞峰)을 참례(參禮)하고 보방사(寶方寺)로 돌아온 후 박산원래(博山元來)를 수좌(首座)로 삼아 개당설법(開堂說法)하고 조동종풍(曹洞宗風)을 대홍(大弘)했음. 만력 36년 요청에 응해 신성(新城)의 수창사(壽昌寺)로 이지(移至)했는데 그대로 노무(勞務)를 폐()하지 않고 늘 게송과 법어로써 참선자(參禪者)에게 응답했음. 46년 정월에 시적(示寂)했으니 세수(世壽)71. 법사(法嗣)에 박산원래(博山元來)ㆍ회대원경(晦臺元鏡)ㆍ견여원밀(見如元謐)ㆍ영각원현(永覺元賢) 등이 있음. 그 중에 원현(元賢)이 편()한 무명혜경선사어록(無明慧經禪師語錄) 4권과 아울러 찬()한 행업기(行業記)가 있으며 감산덕청(憨山德淸)이 찬()한 탑명(塔銘)이 있음 [선여외집24. 석감계고략속집3. 보속고승전16. 선림승보전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