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태화선학대사전 10책(ㅎ)

국역태화선학대사전(國譯泰華禪學大辭典) 10책(ㅎ) 389쪽

태화당 2019. 12. 29. 09:21

慧南】 ①(1002-1069) 宋代僧 臨濟宗黃龍派之祖 信州玉山(江西上饒)人 俗姓章 少習儒業 博通經史 十一歲從定水院智鑾出家 十九歲受具足戒 遍參棲賢澄諟 雲峰文悅 石霜楚圓等諸宿 遂嗣石霜楚圓之法 師初住同安崇勝禪院開堂說法 四衆歸趨 未久移至歸宗寺 因堂宇突遭火災 全寺盡毁 遂蒙冤坐獄 吏者百端求隙 而師怡然引咎 久而後赦 乃退居黃檗 於溪上築積翠庵 四方接踵而至 受請至黃龍山崇恩院 大振宗風 遍及湖南 湖北 江西 閩粤等地 此一系統乃蔚成黃龍派 日本臨濟宗之祖榮西卽源出此一流派 師每以公案廣度四衆 室中嘗設佛手驢脚生緣三轉語 以勘驗學人 三十餘年鮮有契其旨者 世稱黃龍三關 師住黃龍時 法席鼎盛 於宋熙寧二年入寂 壽六十八 世稱黃龍慧南 徽宗大觀四年(1110) 追諡普覺禪師 與同門方會之楊岐派對峙 與臨濟 潙仰 曹洞 雲門 法眼等五家 竝稱爲五家七宗 遺有黃龍南禪師語錄 語要 書尺集等各一卷行世 門下之晦堂祖心 寶峰克文 泐潭洪英等 皆馳名禪林 [續傳燈錄七 禪宗正脈十七 釋氏稽古略四] 宋代臨濟宗僧 依廣慧元璉受法 住臨江慧力院 世稱慧力慧南 [五燈會元十二 續燈錄四]

혜남(慧南) (1002-1069) 송대승. 임제종 황룡파(黃龍派)의 개조(開祖). 신주(信州) 옥산(玉山; 강서 상요)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장(). 어릴 적에 유업(儒業)을 익혔으며 경사(經史)를 박통(博通)했음. 11세에 정수원(定水院) 지란(智鑾)을 좇아 출가했으며 19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음. 서현징식(棲賢澄諟)ㆍ운봉문열(雲峰文悅)ㆍ석상초원(石霜楚圓) 등 여러 존숙을 두루 참알(參謁)하다가 드디어 석상초원의 법을 이었음. 스님이 처음엔 동안(同安) 숭승선원(崇勝禪院)에 주()하며 개당설법(開堂說法)했는데 4()이 귀추(歸趨)했음. 오래지 않아 귀종사(歸宗寺)로 이지(移至)했는데 당우(堂宇)가 돌연(突然)히 화재를 만나 전사(全寺)가 모두 훼손(毁損)됨으로 인해 드디어 원통(寃痛)하게 옥사(獄事)에 연좌(連坐)됨을 입었음. 이자(吏者; 獄吏)가 백단(百端; 온갖 방법)으로 틈을 구했으나 스님이 이연(怡然)히 허물을 끌어당겼음. 오래 후에 사면(赦免)되어 이에 황벽(黃檗)으로 퇴거했으며 계곡 위에 적취암(積翠庵)을 축조(築造)했는데 사방에서 접종(接踵; 사람이 잇따르다)하여 이르렀음. 요청을 받아 황룡산(黃龍山) 숭은원(崇恩院)에 이르러 종풍을 크게 진작(振作)했으며 호남ㆍ호북ㆍ강서ㆍ민월(閩粤) 등의 땅에 두루 미쳤음. 이 일계통(一系統)이 곧 황룡파를 위성(蔚成)했으며 일본 임제종의 개조(開祖)인 영서(榮西)도 곧 이 한 유파(流派)에서 원출(源出)했음. 스님이 매번 공안으로 4()을 널리 제도했는데 실중(室中)에서 늘 불수(佛手)ㆍ여각(驢脚)ㆍ생연(生緣)3전어(三轉語. 은 양사)를 시설해 학인을 감험(勘驗)했음. 30여 년에 그 지취(旨趣)에 계합하는 자가 드물게 있는지라 세칭이 황룡삼관(黃龍三關). 스님이 황룡에 주()할 때 법석이 정성(鼎盛; 융성)하였으며 송() 희녕(熙寧) 2년에 입적(入寂)했으니 나이는 68. 세칭이 황룡혜남(黃龍慧南)이며 휘종(徽宗) 대관(大觀) 4(1110) 추시(追諡)하여 보각선사(普覺禪師)라 했음. 동문인 방회(方會)의 양기파(楊岐派)와 대치(對峙)하며 임제ㆍ위앙ㆍ조동ㆍ운문ㆍ법안 등 5()와 더불어 병칭(竝稱)하여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 함. 유작(遺作)에 황룡남선사어록(黃龍南禪師語錄)ㆍ어요(語要)ㆍ서척집(書尺集) 1권이 있어 행세(行世). 문하(門下)의 회당조심(晦堂祖心)ㆍ보봉극문(寶峰克文)ㆍ늑담홍영(泐潭洪英) 등은 다 선림에 치명(馳名)했음 [속전등록7. 선종정맥17. 석씨계고략4]. 송대 임제종승. 광혜원련(廣慧元璉)에게 의지해 법을 받았고 임간 혜력원에 주()했음. 세칭이 혜력혜남 [오등회원13. 속등록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