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태화선학대사전 10책(ㅎ)

국역태화선학대사전(國譯泰華禪學大辭典) 10책(ㅎ) 418쪽

태화당 2019. 12. 29. 09:40

慧遠】 ①(334-416) 東晉僧 樓煩(山西寧武)賈氏 神明英越 機鑑遐深 幼好學 博綜六經 尤善莊老 年二十一 受業於道安 常欲總攝綱維 以大法爲己任 精思諷持 以夜續晝 太元三年(378) 於廬山立東林精舍 與慧永 宗炳 劉遺民等 緇素百二十三人結白蓮社 勤修淨業 六時念佛 求生西方 有十八高賢之目 而遠冠之 居三十餘年 雖帝詔亦不出山 送客以虎溪爲界 嘗作法性論 唱涅槃常住之說 出沙門不敬王者論 張沙門之綱維 有匡山集 [梁高僧傳六 禪林寶訓音義 六學僧傳十一] 禪林寶訓二 鍾山僧遠鸞輿及門而床坐不迎 虎谿慧遠天子臨潯陽而詔不出山 (1103-1176) 宋代楊岐派僧 字瞎堂 眉山(今屬四川)彭氏 年十三 從藥師院宗辯爲僧 遊方多年 首詣大慈 次參靈巖徽 略有省悟 會圓悟克勤復領昭覺 往叩得悟 出世初住皋亭崇光 乾道六年(1170) 受詔選杭州靈隱 孝宗屢召入內殿 咨問法要 賜號佛海大師 有瞎堂慧遠禪師語錄 [五燈會元十九 普燈錄十五] 宋代雲門宗僧 雙泉郁法嗣 住鼎州德山 [五燈會元十五]

혜원(慧遠) (334-416) 동진승(東晉僧). 누번(樓煩; 산서 寧武) 가씨. 신명(神明; 神靈)하고 영월(英越)했으며 기감(機鑑; 鑒識)이 하심(遐深)했음. 어릴 적에 학문을 좋아했고 6()을 박종(博綜; 博通)했으며 장로(莊老)를 더욱 잘했음. 나이 21에 도안(道安)에게서 수업(受業)했고 늘 강유(綱維)를 총섭(總攝)하고자 했고 대법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고 정사(精思)하며 풍지(諷持; 諷誦修持)했고 밤으로써 낮을 이었음. 태원 3(378) 여산(廬山)에 동림정사(東林精舍)를 세워 혜영ㆍ종병ㆍ유유민 등 치소(緇素) 123인과 더불어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고 정업(淨業)을 근수(勤修)했음. 육시(六時)에 염불하며 서방에 왕생하기를 구했으니 18고현(高賢)의 명목이 있어 멀리 관개(冠蓋)했음. 30여 년 거주하면서 비록 황제가 부르더라도 또한 산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송객(送客)은 호계(虎溪)로써 경계를 삼았음. 일찍이 법성론을 지었고 열반상주(涅槃常住)의 설을 제창했음.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를 내었고() 사문의 강유(綱維)를 펼쳤음. 광산집(匡山集)이 있음 [양고승전6. 선림보훈음의. 육학승전11]. 선림보훈2. 종산(鍾山)의 승원(僧遠)은 난여(鸞輿)가 문에 이르렀으나 상에 앉아 영접하지 않았고 호계(虎谿)의 혜원(慧遠)은 천자가 심양(潯陽)에 임해 불렀으나 산을 나서지 않았다. (1103-1176) 송대 양기파승. 자는 할당(瞎堂)이며 미산(지금 사천에 속함) 팽씨. 나이 13에 약사원 종변을 좇아 승인이 되었고 여러 해 유방했음. 처음 대자(大慈)에 나아갔고 다음에 영암휘를 참해 조금 성오(省悟)가 있었음. 마침 원오극근(圓悟克勤)이 다시 소각(昭覺)을 영도(領導)하자 가서 고문(叩問)하여 깨침을 얻었음. 출세하여 처음에 고정(皋亭) 숭광(崇光)에 주()했고 건도 6(1170) 항주 영은(靈隱)에 조선(詔選)됨을 받았음. 효종이 여러 차례 내전(內殿)으로 소입(召入)하여 법요를 자문(咨問)했고 사호(賜號)하여 불해대사(佛海大師)라 했음. 할당혜원선사어록이 있음 [오등회원19. 보등록15]. 송대 운문종승. 쌍천욱(雙泉郁)의 법사며 정주 덕산에 거주했음 [오등회원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