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태화선학대사전 10책(ㅎ)

국역태화선학대사전(國譯泰華禪學大辭典) 10책(ㅎ) 423쪽

태화당 2019. 12. 29. 09:43

慧因寺位於浙江杭州西湖西南岸之赤山阜附近 後唐天成二年(927) 吳越武肅王錢鏐所創 時稱慧因禪院 北宋晉水淨源曾入住本寺 高麗僧義天亦至此從淨源學華嚴 神宗時(1067-1085) 敕改慧因敎院 義天歸國後 以靑紙金書晉譯華嚴經三百部供養淨源 致有高麗寺之稱 元至正(1341-1367)末年 因遇兵火 建築物十之八九燒毁 明朝正德(1506-1521)年間 徵稅過重 僧徒散離 堂宇荒廢 留寺之僧乃立志恢復 延請萬松慧林入寺 講說華嚴經 徒衆雲集 幾達數千 後又請得萬松之高足易庵如通 悟玄 無際明慧等三師入寺 時如通自地下掘出刻有宋代易庵名之御書碑 而悟三生之緣 乃重建天王殿 大雄殿 輪藏閣 禪堂等 明慧承襲臨濟宗二十七傳之衣鉢 淸乾隆二十二年(1757) 高宗南巡至此 賜名法雲寺 至淸末逐漸衰微 [慧因高麗寺志 支那文化史蹟四]

혜인사(慧因寺) 절강 항주 서호(西湖) 서남안(西南岸)의 적산부(赤山阜) 부근에 위치함. 후당 천성 2(927) 오월 무숙왕 전류(錢鏐)가 창건한 것이며 당시에 혜인선원(慧因禪院)이라 일컬었음. 북송 진수(晉水) 정원(淨源)이 일찍이 본사에 입주했고 고려승 의천(義天)이 또한 여기에 이르러 정원으로부터 화엄을 수학(受學)했음. 신종 시(1067-1085) 칙개(敕改)하여 혜인교원(慧因敎院)이라 했고 의천이 귀국한 후 청지금서(靑紙金書) 진역(晉譯) 화엄경 300부를 정원에게 공양했고 고려사란 명칭이 있게 되었음. 원 지정(1341-1367) 말년 병화(兵火)를 만남으로 인해 건축물의 108, 9가 소훼(燒毁)되었음. 명조(明朝) 정덕(1506-1521) 년간 징세(徵稅)가 과중하자 승도(僧徒)가 산이(散離)했고 당우(堂宇)가 황폐했는데 사원에 잔류한 승인이 이에 입지(立志)하여 회복했고 만송혜림(萬松慧林)을 연청(延請)해 입사(入寺)하여 화엄경을 강설하자 도중(雲集)이 운집했으며 거의 수천에 달했음. 후에 또 만송의 고족(高足) 이암여통(易庵如通)ㆍ오현(悟玄)ㆍ무제명혜(無際明慧) 3()를 청득(請得)하여 입사했음. 때에 여통이 지하로부터 송대(宋代) 이암명(易庵名)이 새겨져 있는 어서비(御書碑)를 굴출(掘出)하여 3생의 연()을 깨달았으며 이에 천왕전ㆍ대웅전ㆍ윤장각(輪藏閣)ㆍ선당(禪堂) 등을 중건했음. 명혜는 임제종 27()의 의발을 승습(承襲)했음. 청 건륭 22(1757) 고종이 남순(南巡)하다가 여기에 이르러 사명(賜名)하여 법운사라 했고 청말에 이르러 축점(逐漸; 점차) 쇠미해졌음 [혜인고려사지. 지나문화사적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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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刃銛淸代臨濟宗僧弘銛 字慧刃 詳見弘銛

혜인섬(慧刃銛) 청대 임제종승 홍섬의 자가 혜인이니 상세한 것은 홍섬(弘銛)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