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別記]眞如門是諸法通相 通相外無別諸法 諸法皆爲通相所攝 如微塵是瓦器通相 通相外無別瓦器 瓦器皆爲微塵所攝 眞如門亦如是 生滅門者 卽此眞如是善不善因 與緣和合變作諸法 雖實變作諸法 而恒不壞眞性 故於此門亦攝眞如 如微塵性聚成瓦器 而常不失微塵性相 故瓦器門卽攝微塵 生滅門亦如是 設使二門雖無別體 二門相乖不相通者 相應眞如門中攝理而不攝事 生滅門中攝事而不攝理 而今二門互相融通 際限無分 是故皆各通攝一切理事諸法 故言二門不相離故 問 若此二門各攝理事 何故眞如門中但示摩訶衍體 生滅門中通示自體相用 答 攝義示義異 何者 眞如門是泯相以顯理 泯相不除 故得攝相 泯相不存 故非示相 生滅門者攬理以成事 攬理不壞 得攝理 攬理不泯 故亦示體 依此義故 且說不同 通而論之 二義亦齊 是故眞如門中亦應示於事相 略故不說耳 問 二門不同 其義已見 未知二門所攝理事 亦有隨門差別義不 答 隨門分別 亦有不同 何者 眞如門中所攝事法 是分別性 以說諸法不生不滅本來寂靜 但依妄念而有差別故 心生滅門所說事法 是依他性 以說諸法因緣和合有生滅故 然此二性雖復非一 而亦不異 何以故 因緣所生生滅諸法 不離妄念而有差別 故分別性不異依他 亦在生滅門也 又因緣之生 自他及共皆不可得 故依他性不異分別 亦在眞如門也 如是二性雖復不異 而亦非一 何以故 分別性法本來非有亦非不無 依他性法雖復非有而亦不無 是故二性亦不雜亂 如攝論說 三性相望 不異非不異 應如是說 若能解此三性不一不異義者 百家之諍無所不和也 二門所攝理不同者 眞如門中所說理者 雖曰眞如 亦不可得 而亦非無 有佛無佛 性相常住 無有變異 不可破壞 於此門中 假立眞如實際等名 如大品等諸般若經所說 生滅門內所攝理者 雖復理體離生滅相 而亦不守常住之性 隨無明緣流轉生死 雖實爲所染 而自性淸淨 於此門中 假立佛性本覺等名 如涅槃華嚴經等所說 今論所述楞伽經等 通以二門爲其宗體 然此二義亦無有異 以雖離生滅 而常住性亦不可得 雖曰隨緣 而恒不動 離生滅性故 以是義故 眞如門中 但說不壞假名而說實相 不動實際建立諸法 生滅門中 乃說自性淸淨心因無明風動 不染而染 染而不染 問 眞如門中說唯空義 生滅門內說不空義 爲不如是耶 答 一往相配 不無是義 故上立義分眞如相中 但說能示摩訶衍體 生滅門中亦說顯示大乘相用 就實而言 則不如是 故下論文二門皆說不空義 問 若生滅門內二義俱有者 其不空義可有隨緣作生滅義 空義是無 何有隨緣而作有義 答 二義是一 不可說異 而約空義亦得作有 何者 若空定是空 應不能作有 而是空亦空 故得作有 然此空空亦有二義 一者 有法性空 是空亦空 有之與空 皆不可得 如是空空 有眞如門 如大品經云 一切法空 此空亦空 是名空空 二者 猶如有無有性 故得爲空 是名曰空 如是空無空性 故得作有 是名空空 如是空空 在生滅門 如涅槃經云 是有是無 是名空空 是是是非 是名空空 如是空空 十住菩薩尙得少分如毫釐許 何況餘人 二門差別 應如是知 上來釋上總立法竟
[별기] 진여문은 이 제법의 통상(通相; 共同의 상)이니 통상 외에 별다른 제법이 없어 제법이 모두 통상에 거두어지는 바가 된다. 예컨대(如) 미진(微塵)은 이 와기(瓦器)의 통상이니 통상 밖에 별다른 와기가 없어 와기가 모두 미진에 거두어지는 바가 된다. 진여문도 또한 이와 같다. 생멸문이란 것은 곧 이 진여가 이 선(善)과 불선(不善)의 인(因)이니 연(緣)과 더불어 화합하여 변해 제법을 짓는다. 비록 실로 변해 제법을 짓지만 항상 진성(眞性)을 파괴하지 않는지라 고로 이 문(門)에서도 또한 진여를 거둔다. 예컨대(如) 미진의 자성(自性; 性)이 모여 와기를 이루더라도 늘(常) 미진의 성상(性相)을 잃지 않는지라 고로 와기문(瓦器門)이 곧 미진을 거둔다. 생멸문도 또한 이와 같아서 설사(設使) 2문이 비록 별체(別體)가 없지만 2문이 상괴(相乖)하여 상통(相通)하지 못하는 것은 상응하는 진여문 중에서 섭리(攝理)하고 섭사(攝事)하지 못하거나 생멸문 중에서 섭사(攝事)하고 섭리(攝理)하지 못해서이지만 이금(而今; 여금)에 2문이 호상(互相) 융통하므로 제한(際限)을 나누지 못하는지라(無) 이런 고로 모두 각기 일체의 이사(理事)의 제법을 통섭(通攝; 모두 거둠. 通은 皆)하므로 고로 말하되 2문이 서로 여의지 않는 연고라 했다. 묻되 만약 이 2문이 각기 이사(理事)를 거둔다면 무슨 연고로 진여문 중에선 단지 마하연의 체(體)를 보이고 생멸문 중에선 자체(自體)ㆍ상(相)ㆍ용(用)을 통시(通示; 모두 보임)했는가. 답하되 섭의(攝義)와 시의(示義)가 다르다. 왜냐 하면(何者) 진여문은 이 상을 민(泯; 잠기다. 소멸하다)하여 이(理)를 나타내나니 민(泯)해도 상(相)은 제거하지 않으므로 고로 상을 거둠을 얻고 민(泯)하면 상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고로 상을 보이지 않는다. 생멸문(生滅門)이란 것은 이(理)를 잡아(攬) 사(事)를 이루나니 람(攬)하여도 이(理)는 파괴되지 않으므로 이(理)를 거둠을 얻고 람(攬)하면 이(理)가 민(泯)하지 않는지라 고로 또한 체(體)를 보인다. 이 뜻에 의하는 고로 또(且) 설이 같지 못하나니 통(通)하여 이를 논하자면 2의(義)가 또한 제등(齊等; 齊)하다. 이런 고로 진여문 중에서도 또한 응당 사상(事相)을 보여야 하지만 생략한 연고로 설하지 않았을 뿐이다. 묻되 2문(門)이 부동(不同)한 그 뜻은 이미 보았거니와 알지 못하나니 2문이 거두는 바의 이사(理事)는 또한 문(門)을 따라 차별의 뜻이 있는가. 답하되 문(門)을 따라 분별하자면 또한 부동(不同)함이 있다. 왜냐 하면(何者) 진여문 중에서 거두는 바의 사법(事法)은 이 분별성(分別性)이니 제법이 불생불멸이며 본래 적정(寂靜)이지만 단지 망념에 의해 차별이 있다고 설하기 때문의 연고다. 심생멸문(心生滅門)에서 설하는 바의 사법(事法)은 이 의타성(依他性)이니 제법이 인연으로 화합하여 생멸이 있다고 설하기 때문의 연고다. 그러하여 이 2성(性)이 비록 다시 하나가 아니지만 또한 다르지도 않나니 무슨 연고인가(何以故), 인연으로 난 바의 생멸의 제법은 망념을 여의지 않고 차별이 있는지라 고로 분별성(分別性)이 의타(依他)와 다르지 않아서 또한 생멸문에 있다. 또 인연의 생(生)은 자타(自他) 및 공(共)을 모두 불가득인지라 고로 의타성(依他性)이 분별과 다르지 않아서 또한 진여문에 있다. 이와 같이 2성(性)이 비록 다시 다르지 않지만 또한 하나도 아니니 무슨 연고냐, 분별성의 법은 본래 비유(非有)지만 또한 불무(不無)도 아니며 의타성의 법은 비록 다시 비유(非有)지만 또한 불무(不無)니 이런 고로 2성(性)도 또한 잡란(雜亂)하지 않다. 예컨대(如) 섭론(攝論)에 설하되 3성(性)이 상망(相望)하여 이(異)가 아니면서 불이(不異)도 아니니 응당 이와 같이 설한다(三性相望 不異非不異 應如是說). 만약 능히 이 3성(性)의 불일불이(不一不異)의 뜻을 이해하는 자라면 백가지쟁(百家之諍)을 융화(融和; 和)하지 못할 바가 없다. 2문(門)이 거두는 바의 이(理)가 부동(不同)이란 것은 진여문 중에서 설하는 바의 이(理)란 것은 비록 가로되 진여지만 또한 불가득이며 또한 비무(非無)니 불타가 있거나 불타가 없거나(有佛無佛) 성상(性相)이 상주(常住)하여 변이(變異)가 있지 않으며(無) 가히 파괴하지 못하나니 이 문 가운데선 진여와 실제(實際) 등의 이름을 가립(假立)했다. 예컨대(如) 대품(大品) 등 여러 반야경에서 설한 바는 생멸문 내에서 거두는 바의 이(理)란 것은 비록 다시 이체(理體)가 생멸상(生滅相)을 여의었지만 또한 상주지성(常住之性)을 지키지 않고 무명연(無明緣)을 따라 생사에 유전(流轉)하므로 비록 실로 오염되는 바가 되지만 자성은 청정하니 이 문중(門中)에선 불성이나 본각 등의 이름을 가립(假立)했으며 열반과 화엄경 등에서 설한 바와 같다. 지금의 논에서 서술하는 바 릉가경(楞伽經) 등은 모두(通) 2문(門)으로써 그 종체(宗體)로 삼는다. 그러나 이 2의(義)도 또한 다름이 있지 않나니 비록 생멸을 여의었지만 상주성(常住性)을 또한 불가득이며 비록 가로되 수연(隨緣)이라 했지만 항상 움직이지 않고 생멸성(生滅性)을 여의었기 때문의 연고다. 이 뜻을 쓰는(以) 고로 진여문 중에선 단지 설하되 가명(假名)을 파괴하지 않고 실상(實相)을 설하며 실제(實際)를 움직이지 않고 제법을 건립한다. 생멸문 중에선 이에 설하기를 자성의 청정심이 무명풍(無明風)의 움직임으로 인해 오염되지 않으면서 오염되며 오염되더라도 오염이 아니다. 묻되 진여문 중에선 유공(唯空)의 뜻을 설하고 생멸문 안에선 불공(不空)의 뜻을 설했나니 이와 같지 않음이 되는가. 답하되 일왕(一往)하여 상배(相配)하면 이 뜻이 없지 않는지라 고로 위 입의분(立義分)의 진여상(眞如相) 중에서 단지 설하기를 마하연의 체(體)를 능히 보인다 했고 생멸문 중에서도 또한 설하기를 대승의 상(相)ㆍ용(用)을 현시(顯示)한다 했다. 진실로 나아가 말하자면 곧 이와 같지 않은지라 고로 아래 논문에 2문(門)에 모두 불공(不空)의 뜻을 설했다. 묻되 만약 생멸문 내에 2의(義)가 모두(俱) 있다면 그 불공(不空)의 뜻에 가히 수연(隨緣)하여 생멸의 뜻을 지음이 있어서 공(義)의 뜻은 이 없거늘 어찌하여 수연(隨緣하여 유(有)의 뜻을 지음이 있는가. 답하되 2의(義)가 이 하나라서 가히 다름을 설하지 못하나니 공(空)의 뜻을 괄약(括約; 約)하면 또한 유(有)를 지음을 얻는다. 왜냐 하면(何者) 만약 공(空)이 꼭(定) 이 공이라면 응당 능히 유(有)를 짓지 못하지만 이 공도 또한 공인지라 고로 유를 지음을 얻는다. 그러나 이 공이 공함도 또한 2의(義)가 있다. 1자는 법성공(法性空)이 있으니 이 공도 또한 공인지라 유와 공을 모두 불가득이다. 이와 같이 공도 공인지라 진여문이 있다. 예컨대 대품경(大品經)에 이르되 일체법이 공이며 이 공도 또한 공이니 이 이름이 공공(空空)이다 했다. 2자는 마치 무유성(無有性)이 있음과 같은지라 고로 공이 됨을 얻나니 이를 이름해 가로되 공이다. 이와 같이 공이 공성(空性)이 없는지라 고로 유를 지음을 얻나니 이 이름이 공공이다. 이와 같은 공공은 생멸문에 있다. 예컨대(如) 열반경에 이르되 이 유와 이 무니 이 이름이 공공이며 시(是)는 시며 시는 비(非)니 이 이름이 공공이다. 이와 같은 공공은 십주보살(十住菩薩)도 오히려 소분(少分)을 얻음이 호리(毫釐) 만큼(許)과 같거늘 어찌 하물며 나머지 사람이겠는가(是有是無 是名空空 是是是非 是名空空 如是空空 十住菩薩尙得少分如毫釐許 何況餘人). 2문(門)의 차별을 응당 이와 같이 알라. 상래(上來)에 위의 총립법(總立法; 법을 총립함) 해석하기를 마쳤다.
●섭론(攝論)에 설하되; 섭대승론중(攝大乘論中) 이 삼종성(三種性; 分別性ㆍ依他性ㆍ眞實性)은 어떠한가, 그와 이(異)가 되고 불이(不異)가 되며 이(異)가 아니면서 불이(不異)도 아니니 응당 이와 같이 설한다(此三種性云何 與他爲異爲不異 非異非不異 應如此說).
●3성(性); 분별성(分別性)ㆍ의타성(依他性)ㆍ진실성(眞實性) [攝大乘論中].
●릉가경(楞伽經); 4권. 전칭이 릉가아발다라보경(楞伽阿跋多羅寶經)이며 대정장(大正藏) 제16책에 수록되었음. 릉가는 산 이름이니 여기에선 이르되 불가왕(不可往. 가히 가지 못한다)임. 아(阿)는 이르되 무(無)며 발다라(跋多羅)는 이르되 상(上)이며 보(寶)는 귀중(貴重)의 뜻이며 경(經)은 관섭(貫攝)의 뜻이니 이 이름이 불가왕무상보경(不可往無上寶經)임. 법상종(法相宗)에서 의지(依持)하는 바의 6경(經)의 하나. 본경(本經)은 세계만유(世界萬有)가 다 마음으로부터 지어진 바며 우리 사람의 인식작용(認識作用)의 대상(對象)이 외계(外界)에 있지 않으며 내심(內心)에 있다고 선설(宣說)함. 이것은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과 유식(唯識)의 아뢰야식사상(阿賴耶識思想)이 결합된 인도 후기의 대승불교사상을 대표하는 경전임. 본경(本經)의 한역본(漢譯本)에 3종(種)이 있음. 1. 유송(劉宋)의 구나발다라역본(求那跋陀羅譯本)의 릉가아발다라보경(楞伽阿跋多羅寶經)이니 또 명칭이 사권릉가경(四卷楞伽經)ㆍ송역릉가경(宋譯楞伽經). 2. 북위(北魏)의 보리류지(菩提流支)가 번역한 입릉가경(入楞伽經)이니 또 명칭이 십권릉가경(十卷楞伽經)ㆍ위역릉가경(魏譯楞伽經). 3. 당(唐)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대승입릉가경(大乘入楞伽經)이니 또 명칭이 칠권릉가경(七卷楞伽經)ㆍ당역릉가경(唐譯楞伽經). 사권릉가경은 보리달마가 혜가(慧可)에게 부촉(付囑)한 바의 책이라서 특별히 선종에서 소중히 여김.
●대품경(大品經)에 이르되; 마하반야바라밀경5(摩訶般若波羅蜜經五; 鳩摩羅什譯) 무엇 등이 공공이 되는가, 일체법이 공했고 이 공도 또한 공이니 비상비멸(非常非滅)인 연고다. 무슨 연고냐, 성(性)이 스스로 그러하다. 이 이름이 공공이다(何等爲空空 一切法空 是空亦空 非常非滅故 何以故 性自爾 是名空空). ○대품경(大品經)은 대품반야(大品般若), 즉 대품반야경이니 27권(혹 30, 40권) 90품. 또 명칭이 이만오천송반야(二萬五千頌般若)니 곧 구마라집(鳩摩羅什)이 후진(後秦) 홍시(弘始) 4년에서 14년(402-412)에 이르기까지 번역한 것. 또 마하반야바라밀경ㆍ마하반야경ㆍ신대품경ㆍ대품경으로 지음. 대정장 제8책에 수록되었음. 본경의 동본이역(同本異譯)에 3종이 있음. 1은 광찬반야바라밀경(光讚般若波羅蜜經)이니 서진(西晉)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했고 10권 27품. 2는 방광반야바라밀경(放光般若波羅蜜經)이니 서진(西晉) 무라차(無羅叉)가 번역했고 20권(혹 30권) 90품. 3은 대반야경 제2회니 당대 현장이 번역했고 78권 85품 [出三藏記集二 歷代三寶紀八 開元釋敎錄四].
●열반경에 이르되; 열반경16 선남자여 이 유(有)와 이 무(無), 이 이름이 공공이며 시(是)의 시(是)와 비시(非是)의 시(是) 이 이름이 공공이다. 선남자여 십주보살도 오히려 이 중에선 소분(少分)을 통달함이 마치 미진과 같거늘 하물며 다시 나머지 사람이겠는가(善男子 是有是無 是名空空 是是非是是 是名空空 善男子 十住菩薩尙於是中 通達少分猶如微塵 況復餘人).
●십주보살(十住菩薩); 십주(十住)에 거처하는 보살. 십주는 또 십주지(十地住)로 지음. 보살의 수행의 과정을 52계위(階位)로 구분하는데 그 중 제11에서 제20 계위에 이르기까지는 주위(住位)에 속하며 일컬어 10주라 함. 초발심주(初發心住)ㆍ치지주(治地住)ㆍ수행주(修行住)ㆍ생귀주(生貴住)ㆍ방편구족주(方便具足住)ㆍ정심주(正心住)ㆍ불퇴주(不退住)ㆍ동진주(童眞住)ㆍ법왕자주(法王子住)ㆍ관정주(灌頂住)임 [舊華嚴經八 菩薩本業經十地品 大乘義章十四]
大乘起信論疏記會本卷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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