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別記]頓分別者 是能見相 自心及現等 是境界相 瑜伽論中亦同此說 如是等文 是約後二相說 此二雖有二分 不離業相 是唯量門 業相雖無能所 含有二分 是唯二門 此三皆是異熟識攝 但爲業煩惱所惑義邊 不別業相動轉差別轉相等異 是故總說爲異熟識 爲無明風所動義邊 從細至麤動轉差別 是故細分立三種相 又此三但爲無明所動 故在第八 後六乃爲境界所動 故在七識 卽由是義 故說七識一向生滅 不同棃耶俱含二義也
[별기] 문득 분별(頓分別)이란 것은 이 능견상(能見相)이며 자심(自心) 및 현(現) 등은 이 경계상(境界相)이니 유가론 중에도 또한 이 설과 한가지다. 이와 같은 등의 글은 이는 후(後)의 2상(능견상과 경계상)을 괄약하여 설했다. 이 둘이 비록 둘로 분리되어 있으나 업상을 여의지 않음은 이는 유량문(唯量門)이며 업상이 비록 능소가 없으나 둘로 분리됨을 함유함은 이는 유이문(唯二門)이다. 이 셋은 모두 이 이숙식(異熟識)에 거두어지지만 단지 업번뇌에 혹(惑)하는 바가 되는 의변(義邊)에선 업상의 동전(動轉)하는 차별과 전상(轉相) 등의 다름을 구별하지 않는지라 이런 고로 총설(總說)하여 이숙식(異熟識)이라 하거니와 무명풍에 움직이는 바가 되는 의변(義邊)에선 세(細)로 좇아 추(麤)에 이르기까지 동전(動轉)이 차별인지라 이런 고로 세분하여 3종의 상을 세운다. 또 이 셋은 단지 무명에 동하는 바가 되는지라 고로 제8에 있고 후(後)의 여섯은 곧(乃) 경계에 동하는 바가 되는지라 고로 7식(七種識)에 있다. 곧 이 뜻을 말미암는지라 고로 설하되 7식은 일향(一向) 생멸하므로 리야(棃耶)의 두 뜻(생멸과 불생멸)을 함유함과는 같지 않다.
此論下文明現識云 所謂能現一切境界 猶如明鏡現於色像 現識亦爾 以一切時任運而起常在前故 如是等文 約於現相以顯本識 如是現相旣在本識 何況其本轉相業相 反在六七識中說乎
이 논의 하문(下文; 권3)에 현식(現識; 阿賴耶識)을 밝혀 이르되 이른 바 능히 일체경계를 나타냄이란 마치 명경이 색상(色像)을 나타냄과 같나니 현식도 또한 그러하여 일체시에 임운(任運)하여 일어나 늘 앞에 있기 때문의 연고다. 이와 같은 등의 글은 현상(現相)을 괄약하여 본식(本識)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현상이 이미 본식에 있거늘 어찌 하물며 그 근본인 전상(轉相)과 업상(業相)이 도리어 육칠식(六七識) 중에 있다고 설하겠는가.
'기신론소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신론소기회본(起信論疏記會本) 45 (0) | 2020.09.19 |
---|---|
기신론소기회본(起信論疏記會本) 44 (0) | 2020.09.19 |
기신론소기회본(起信論疏記會本) 42 (0) | 2020.09.19 |
기신론소기회본(起信論疏記會本) 41 (0) | 2020.09.19 |
기신론소기회본(起信論疏記會本) 40 (0) | 2020.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