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신론소기

기신론소기회본(起信論疏記會本) 73

태화당 2020. 9. 20. 08:20

眞如熏習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自體相熏習 二者用熏習 自體相熏習者 從無始世來 具無漏法 備有不思議業 作境界之性 依此二義恒常熏習 以有力故 能令衆生厭生死苦 樂求涅槃 自信己身有眞如法 發心修行 問曰 若如是義者 一切衆生悉有眞如 等皆熏習 云何有信無信 無量前後差別 皆應一時自知有眞如法 勤修方便 等入涅槃 答曰 眞如本一 而有無量無邊無明 從本已來 自性差別 厚薄不同故 過恒沙等上煩惱 依無明起差別 我見愛染煩惱 依無明起差別 如是一切煩惱 依於無明所起 前後無量差別 唯如來能知故 又諸佛法有因有緣 因緣具足 乃得成辦 如木中火性 是火正因 若無人知 不假方便 能自燒木 無有是處 衆生亦爾 雖有正因熏習之力 若不遇諸佛菩薩善知識等以之爲緣 能自斷煩惱入涅槃者 則無是處 若雖有外緣之力 而內淨法未有熏習力者 亦不能究竟厭生死苦樂求涅槃 若因緣具足者 所謂自有熏習之力 又爲諸佛菩薩等慈悲願護故 能起厭苦之心 信有涅槃 修習善根 以修善根成熟故 則値諸佛菩薩示敎利喜 乃能進趣向涅槃道

 

진여훈습(眞如熏習)의 뜻에 2종이 있나니 무엇이 둘이 되는가, 1자는 자체상훈습(自體相熏習)이며 2자는 용훈습(用熏習)이다. 자체상훈습이란 것은 무시세래(無始世來)로 좇아 무루법(無漏法)을 갖추었으며() 부사의업(不思議業)을 갖추어() 있어서 경계지성(境界之性)을 짓나니 이 두 뜻이 항상 훈습함에 의해 역()이 있는 연고로써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고를 싫어하고 열반을 요구(樂求; 좋아하며 구함)하되 자기의 몸에 진여법이 있음을 스스로 믿어서 발심하여 수행케 한다. 물어 가로되 만약 이와 같은 뜻이라면 일체중생이 모두() 진여가 있어 가지런히() 모두 훈습해야 하거늘 어찌하여 믿음이 있기도 하고 믿음이 없기도 하여 전후(前後)의 차별이 무량한가. 모두 응당 일시에 진여법이 있음을 스스로 알아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 가지런히() 열반에 들어야 하리라. 답해 가로되 진여는 본디 하나이지만 무량무변한 무명이 있어 종본이래(從本已來)로 자성이 차별이며 후박(厚薄)이 같지 못한 연고니 항사(恒沙) 등상(等上; 은 방면을 표시)을 초과()하는 번뇌가 무명에 의해 차별을 일으키며 아견(我見)애염(愛染)의 번뇌가 무명에 의해 차별을 일으키거니와 이와 같은 일체번뇌가 무명에 의해 일어난 바라서 전후의 무량한 차별은 오직 여래라야 능히 아는 연고다. 또 모든 불법은 인()이 있고 연()이 있어 인연을 구족해야 이에 성판(成辦)을 얻나니 예컨대() 나무 중의 화성(火性)은 이 화()의 정인(正因)이지만 만약 아는 사람이 없고(無人知) 방편을 빌리지 않아도 능히 스스로 나무를 태운다 하면 옳은 곳이 있지 않다. 중생도 또한 그러하여 비록 정인(正因)의 훈습지력(熏習之力)이 있더라도 만약 여러 불ㆍ보살ㆍ선지식 등을 만나 이로써(以之) ()을 삼지 않고도 능히 번뇌를 스스로 끊고 열반에 든다고 하면 곧 옳은 곳이 없다. 만약 비록 외연지력(外緣之力)이 있더라도 안의 정법(淨法)에 훈습력이 있지 아니한 자는 또한 능히 구경에 생사고를 싫어하여 열반을 요구(樂求)하지 못한다. 만약 인()과 연()을 구족한 자라면 이른 바 스스로 훈습지력(熏習之力)이 있으며 또 제불보살(諸佛菩薩) 등의 자비(慈悲)로 원호(願護)함이 되는 연고로 능히 염고지심(厭苦之心)을 일으켜 열반이 있음을 믿고 선근을 수습(修習)하리니 선근을 닦아 성숙하는 연고로써 곧 제불보살의 시교이희(示敎利喜)를 만나서() 이에 능히 진취(進趣)하여 열반도(涅槃道)로 향하리라.

 

眞如熏習中有三 一者擧數總標 二者依數列名 三者辨相 辨相中有二 一者別明 二者合釋 初別明中 先明自體熏習 於中有二 一者直明 二者遣疑 初中言具無漏法備有不思議業者 是在本覺不空門也 作境界之性者 是就如實空門境說也 依此本有境智之力 冥熏妄心 令起厭樂等也 問曰以下 往復除疑 問意可知 答中有二 初約煩惱厚薄明其不等 後擧遇緣參差顯其不等 初中言過恒沙等上煩惱者 迷諸法門事中無知 此是所知障所攝也 我見愛染煩惱者 此是煩惱障所攝也 答意可知 又諸佛以下 明緣參差 有法喩合 文相可見也

 

진여훈습(眞如熏習) 중에 셋이 있으니 1자는 수()를 들어 총표(總標)함이며 2자는 수()에 의해 열명(列名)함이며 3자는 변상(辨相)함이다. 변상 중에 둘이 있으니 1자는 별명(別明)이며 2자는 합석(合釋)이다. () 별명 중 선()은 자체훈습(自體熏習)을 밝힘이니 이 중에 둘이 있다. 1자는 직명(直明)이며 2자는 견의(遣疑). 초중에 말한 무루법(無漏法)을 갖추었으며() 부사의업(不思議業)을 갖추어() 있다는 것은 이는 본각의 불공문(不空門)에 있음이며 경계지성(境界之性)을 짓는다는 것은 이는 여실공문(如實空門)의 경계로 나아가 설함이니 이 본디 있는 경지지력(境智之力)에 의해 망심(妄心)을 명훈(冥熏)하여 염요(厭樂) 등을 일으키게 한다. 물어 가로되 이하는 왕복하며 제의(除疑)함이니 문의(問意)는 가히 알 것이다. 답중에 둘이 있으니 초()는 번뇌의 후박(厚薄)을 괄약하여 그 부등(不等)함을 밝혔고 후()는 우연(遇緣)의 참치(參差)를 들어 그 부등(不等)함을 밝혔다(). 초중에 말한 항사(恒沙) 등상(等上)을 초과하는 번뇌란 것은 제법문사(諸法門事) 중에 지()가 없음임을 미()함이니 이것은 이 소지장(所知障)에 거두어지는 것이다(所攝). 아견(我見)의 애염(愛染)의 번뇌란 것은 이것은 이 번뇌장(煩惱障)에 거두어지는 것이다. 답의(答意)는 가히 알 것이다. 또 제불(諸佛) 이하는 연()의 참치(參差)를 밝힘이니 법()과 유()를 합()함이 있나니 문상(文相)은 가히 보리라.

 

항사(恒沙); 항하사(恒河沙; gaṅgā-nadā-vāluka)의 약칭. 곧 항하(恆河; gaṅgā. 갠지스)의 모래. 또 항변사(恆邊沙)ㆍ항수변류사(恆水邊流沙)ㆍ강하사(江河沙)ㆍ긍가사(兢伽沙)ㆍ항사(恆沙)ㆍ항하사수(恆河沙數) 등으로 지음. 항하의 모래알은 지극히 작아서 그 양을 계산할 방법이 없는지라 여러 경중에서 무릇 계산할 방법이 없는 수를 형용하면서 다분히 항하사 1()로써 비유를 삼음. 지도론7. 물어 가로되 예컨대() 염부제(閻浮提) 중에 갖가지 대하(大河)도 또한 항하를 초과하는 것이 있거늘 무슨 연고로 항하사 등이라고 늘 말하는가. 답해 가로되 항하는 모래가 많지만 여타의 하()는 그렇지 못하다. 다시 다음에 이 항하는 이 불타가 탄생한 곳이며 유행(遊行)하는 곳이며 제자가 현재 보는지라 고로 비유를 삼았다. 다시 다음에 여러 사람의 경서(經書)에 모두 항하를 복덕과 길상으로 삼았으며 만약 가운데 들어가 씻는 자면 모든 죄와 구악(垢惡)이 모두 다 제진(除盡)한다. 사람들이 이 하()를 경사(敬事; 공경해 섬김)하며 모두 다 식지(識知)하므로 고로 항하사로 비유를 삼았다. 다시 다음에 여하(餘河)의 명자(名字)는 누차 전환(轉換)되었지만 이 항하는 세세(世世)에 전환되지 않은지라 이런 연고로써 항하사로써 비유를 삼고 여하(餘河)를 취하지 않았다.

애염(愛染); 탐애하고 염착(染著)하는 정이니 번뇌의 이름임. 지도론1. 자법(自法)이 애염(愛染)인 고로 타인의 법을 훼자(毁訾; 헐뜯다)한다. 왕유(王維) . 애염(愛染)은 날로 얇아지고 선적(禪寂)은 날로 견고하다(愛染日以薄 禪寂日以固).

자비(慈悲); 중생을 자애(慈愛)하면서 아울러 쾌락을 급여(給與)함을(與樂) 일컬어 자()라 하고 그 고통에 동감(同感)하여 중생을 연민하고 아울러 그 고통을 발제(拔除)함을(拔苦) 일컬어 비()라 함. 2자의 합칭이 자비가 됨. 불타의 비()는 곧 이 중생의 고()를 자기의 고로 삼는 동심동감(同心同感)의 상태인지라 고로 명칭이 동체대비(同體大悲). 또 그 비심(悲心)이 광대무진한지라 고로 명칭이 무개대비(無蓋大悲; 보다 更廣更大更上할 게 있지 않는 것).

시교이희(示敎利喜); 가르침을 보이어 이롭고 기쁘게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