此用有二種 云何爲二 一者依分別事識 凡夫二乘心所見者 名爲應身 以不知轉識現故 見從外來 取色分齊 不能盡知故 二者依於業識 謂諸菩薩從初發意乃至菩薩究竟地心所見者 名爲報身 身有無量色 色有無量相 相有無量好 所住依果亦有無量種種莊嚴 隨所示現 卽無有邊 不可窮盡 離分齊相 隨其所應 常能住持 不毁不失 如是功德 皆因諸波羅密等無漏行熏 及不思議熏之所成就 具足無量樂相 故說爲報身 又爲凡夫所見者 是其麤色 隨於六道各見不同 種種異類 非受樂相 故說爲應身 復次初發意菩薩等所見者 以深信眞如法故 少分而見 知彼色相莊嚴等事 無來無去 離於分齊 唯依心現 不離眞如 然此菩薩猶自分別 以未入法身位故 若得淨心 所見微妙 其用轉勝 乃至菩薩地盡 見之究竟 若離業識 則無見相 以諸佛法身 無有彼此色相迭相見故 問曰 若諸佛法身離於色相者 云何能現色相 答曰 卽此法身是色體故 能現於色 所謂從本已來 色心不二 以色性卽智故 色體無形 說名智身 以智性卽色故 說名法身徧一切處 所現之色無有分齊 隨心能示十方世界 無量菩薩 無量報身 無量莊嚴 各各差別 皆無分齊 而不相妨 此非心識分別能知 以眞如自在用義故
이 용(用)에 2종이 있나니 무엇이 둘이 되는가, 1자는 분별사식(分別事識; 意識)에 의함이니 범부와 2승(乘)의 마음으로 보는 바를 이름하여 응신(應身)이니 전식(轉識; 七轉識)이 나타남임을 알지 못하는 연고로써 밖으로 좇아 옴으로 보아 색의 분제(分齊)를 취하나니 능히 다(盡) 알지 못하는 연고다. 2자는 업식(業識)에 의함이니 이르자면 제보살(諸菩薩)이 초발의(初發意)로 좇아 이에 보살구경지(菩薩究竟地)에 이르기까지 마음으로 보는 바를 이름하여 보신(報身)이니 신(身)에 무량한 색이 있고 색에 무량한 상(相)이 있고 상에 무량한 호(好)가 있고 머무는 바의 의과(依果)에도 또한 무량한 갖가지 장엄이 있어 곳(所)을 따라 시현(示現)하매 곧 가가 있지 않고 가히 궁진(窮盡)치 못하므로 분제상(分齊相)을 여의었으며 그 소응(所應)을 따르더라도 늘(常) 능히 주지(住持)하여 무너지지도 않고 잃지도 않나니(不毁不失) 이와 같은 공덕이 모두 모든 바라밀 등 무루행업(無漏行熏) 및 부사의훈(不思議熏)으로 인해 성취하는 바라서 무량한 낙상(樂相)을 구족한지라 고로 설하기를 보신(報身)이라 한다. 또 범부의 보는 바가 되는 것은 이는 그 추색(麤色)이라서 6도(道)를 따라 각기 봄(見)이 부동(不同)하므로 갖가지 이류(異類)며 수락상(受樂相)이 아닌지라 고로 설하기를 응신(應身)이라 한다. 다시 다음에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 등이 보는 바는 진여법을 깊이 믿는 연고로써 소분(少分) 보아 저 색상장엄(色相莊嚴) 등의 일이 무래무거(無來無去)하고 분제(分齊)를 여의었으며 오직 마음에 의해 나타나므로 진여를 여의지 않음을 안다. 그러나 이 보살은 오히려 스스로 분별하므로 법신위(法身位)에 들지 못한 연고로써 만약 정심(淨心)을 얻는다면 소견(所見)이 미묘하고 그 용(用)이 더욱(轉) 수승(殊勝; 勝)하며 내지 보살지(菩薩地)가 다하면 견(見)의 구경(究竟)이다. 만약 업식(業識)을 여의면 곧 견상(見相)도 없나니 제불의 법신은 피차(彼此)의 색상(色相)으로 번갈아(迭) 상견함이 있지 않기 때문의 연고다. 물어 가로되 만약 제불의 법신이 색상(色相)을 여의었다면 어떻게 색상을 능히 나타내는가. 답해 가로되 곧 이 법신이 이 색의 체(體)인 연고로 능히 색을 나타낸다. 이른 바 종본이래(從本已來)로 색(色)과 심(心)이 둘이 아니니 색성(色性)이 곧 지(智)인 연고로써 색의 체(體)가 무형(無形)임을 설명(說名)해 지신(智身)이라 하며 지성(智性)이 곧 색인 연고로써 설명(說名)해 법신이 일체처에 두루함(徧)이라 한다. 소현지색(所現之色)은 분제(分齊)가 있지 않아 마음 따라 십방세계(十方世界)와 무량한 보살과 무량한 보신(報身)과 무량한 장엄이 각각 차별이면서 모두 분제(分齊)가 없어 상방(相妨)하지 않음을 보인다. 이것은 심식(心識)의 분별로는 능히 알지 못하나니 진여의 자재한 용(用)의 뜻을 쓰는(以) 연고다.
第二別釋 於中有三 總標 別解 往復除疑 別解中亦有二 一者直顯別用 二者重牒分別 初中亦二 先明應身 後顯報身 初中言依分別事識者 凡夫二乘未知唯識 計有外塵 卽是分別事識之義 今見佛身 亦計心外 順意識義 故說依分別事識見 此人不知依自轉識能現色相 故言不知轉識現故見從外來 然其所見有分齊色 卽無有邊離分齊相 彼人唯取有分齊義 未解分齊則無有邊 故言取色分齊不能盡知故也 報身中言依於業識者 十解以上菩薩 能解唯心 無外塵義 順業識義以見佛身 故言依於業識見也 然此菩薩知其分齊卽無分齊 故言隨所示現卽無有邊乃至不毁不失也 此無障礙不思議事 皆由六度深行之熏 及與眞如不思議熏之所成就 依是義故名爲報身 故言乃至具足無量樂相故說爲報也 然此二身 經論異說 同性經說 穢土成佛 名爲化身 淨土成道 名爲報身 金鼓經說 三十二相八十種好等相 名爲應身 隨六道相所現之身 名爲化身 依攝論說 地前所見 名變化身 地上所見 名受用身 今此論中 凡夫二乘所見六道差別之相 名爲應身 十解已上菩薩所見離分齊色 名爲報身 所以如是有不同者 法門無量 非唯一途 故隨所施設 皆有道理 故攝論中爲說在前散心所見有分齊相 故屬化身 今此論中明此菩薩三昧所見離分齊相 故屬報身 由是道理 故不相違也 又凡夫所見以下 第二重牒分別 先明應身 文相可知 復次以下 顯報身相 於中有二 先明地前所見 後顯地上所見 初中言以深信眞如法故少分而見者 如十解中 依人空門 見眞如理 是相似解 故名少分也 若得淨心以下 顯地上所見 若離業識則無見相者 要依業識 乃有轉相及與現相 故離業識 卽無見相也 問曰以下 往復除疑 文相可見
제2 별석(別釋)이다. 이 중에 셋이 있나니 총표(總標)와 별해(別解)와 왕복하며 제의(除疑)함이다. 별해 중에 또한 둘이 있으니 1자는 별용(別用)을 직현(直顯)함이며 2자는 중첩(重牒)하여 분별함이다. 초중에 또한 둘이니 선(先)은 응신(應身)을 밝힘이며 후(後)는 보신(報身)을 밝힘(顯)이다. 초중(初中)에 말한 분별사식(分別事識)에 의함이란 것은 범부와 2승(乘)은 유식(唯識)을 알지 못해 외진(外塵)이 있다고 계탁(計度)하나니 곧 이 분별사식(分別事識)의 뜻이다. 여금에 불신(佛身)을 봄에도 심외(心外)인 줄로 계탁하여 의식(意識)의 뜻에 순응(順)하는지라 고로 설하기를 분별사식에 의하여 본다 하나니 이 사람은 자기의 전식(轉識)에 의해 능히 색상(色相)을 나타내는 줄 알지 못하는지라 고로 말하되 전식(轉識)이 나타남임을 알지 못하는 연고로 밖으로 좇아 옴으로 본다 했다. 그러나 그 소견(所見)에 분제색(分齊色)이 있으나 곧 가가 있지 않아 분제상(分齊相)을 여의었건만 그 사람이 오직 분제가 있음의 뜻을 취하여 분제가 곧 가가 있지 않음을 이해하지 못하는지라 고로 말하되 색의 분제(分齊)를 취하나니 능히 다(盡) 알지 못하는 연고라 했다. 보신(報身) 중에 말한 업식(業識)에 의한다는 것은 10해(解) 이상의 보살이 유심(唯心)이라서 외진(外塵)이 없는 뜻을 능히 알아서(能解) 업식의 뜻에 순응하여 불신(佛身)을 보기 때문에(以) 고로 말하되 업식에 의해 본다 했다. 그러나 이 보살은 그(其) 분제가 곧 분제가 없는 줄 아는지라 고로 말하되 곳(所)을 따라 시현(示現)하매 곧 가가 있지 않고 내지 무너지지도 않고 잃지도 않는다(不毁不失) 했다. 이 무장애(無障礙)의 부사의한 일은 모두 6도(度)의 심행지훈(深行之熏) 및 더불어 진여의 부사의훈(不思議熏)으로 말미암아 성취한 바이니 이 뜻에 의하는지라 이름하여 보신(報身)이며 고로 말하되 내지 무량한 낙상(樂相)을 구족한지라 고로 설하기를 보(報; 報身)라 한다. 그러나 이 2신(身)을 경론에 이설(異說)이니 동성경(同性經)엔 설하되 예토(穢土)의 성불을 이름하여 화신(化身)이며 정토(淨土)의 성도(成道)를 이름하여 보신(報身)이다. 금고경(金鼓經)엔 설하되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 등의 상(相)을 이름하여 응신(應身)이라 하고 6도(道)의 상(相)을 따라 나타내는 바의 몸을 이름하여 화신(化身)이라 하며 섭론(攝論)의 설에 의하면 지전(地前; 10지 以前)이 보는 바는 이름이 변화신(變化身)이며 지상(地上; 10지 以上)이 보는 바는 이름이 수용신(受用身)이라 했거니와 여금의 이 논중에선 범부와 2승(乘)이 보는 바의 6도(道)의 차별지상(差別之相)을 이름하여 응신(應身)이라 하고 10해(解) 이상(已上)의 보살이 보는 바 분제(分齊)를 여읜 색을 이름하여 보신(報身)이라 했다. 소이(所以)가 이와 같이 부동(不同)함이 있는 것은 법문(法門)이 무량하여 유일(唯一)한 도(途)가 아닌지라 고로 시설(施設)하는 바를 따라 모두 도리가 있다. 고로 섭론 중엔 설하기를(爲說) 재전(在前; 地前에 있음)의 산심(散心)으로 보는 바에 분제상(分齊相)이 있는지라 고로 화신에 속한다 했거니와 여금의 이 논중에선 이 보살이 삼매로 보는 바는 분제상(分齊相)을 여읜지라 고로 보신(報身)에 속함을 밝혔으니 이 도리로 말미암아 고로 상위(相違)하지 않는다. 또 범부의 보는 바 이하는 제2 중첩(重牒)하여 분별함이다. 선(先)은 응신을 밝혔으니 문상(文相)을 가히 알 것이다. 다시 다음에(復次) 이하는 보신상(報身相)을 밝혔다(顯). 이 중에 둘이 있으니 선(先)은 지전(地前)의 소견(所見)을 밝혔고 후(後)는 지상(地上)의 소견을 밝혔다(顯). 초중에 말한 진여법을 깊이 믿는 연고로써 소분(少分) 본다는 것은 예컨대(如) 10해(解) 중엔 인공문(人空門)에 의해 진여리(眞如理)를 보나니 이는 상사해(相似解)인지라 고로 이름이 소분(少分)이다. 만약 정심(淨心)을 얻는다면 이하는 지상(地上)의 소견(所見)을 밝힘이니(顯) 만약 업식(業識)을 여의면 곧 견상(見相)도 없다는 것은 요컨대 업식에 의해야 이에 전상(轉相) 및 더불어 현상(現相)이 있는지라 고로 업식을 여의면 곧 견상(見相)이 없다. 물어 가로되(問曰) 이하는 왕복하며 제의(除疑)함이니 문상(文相)을 가히 볼 것이다.
顯示正義之內大分有二 第一正釋所立法義竟在於前
정의(正義)를 현시(顯示)한 내에 대분(大分)하여 둘이 있으며 제1 소립(所立)한 법(法)과 의(義)을 정석(正釋)함은 마침이 앞에 있다(竟在於前).
●의과(依果); 또 가로되 의보(依報)임. 무릇 유정(有情)의 과보에 2종이 있으며 총위(總謂)하자면 유정의 심신(心身)을 가로되 정보(正報)ㆍ정과(正果)며 신외(身外)의 사물(곧 山川ㆍ居家ㆍ衣服ㆍ飲食 등)을 일컬어 가로되 의보(依報)ㆍ의과(依果)니 이것은 곧 정보ㆍ정과의 의처(依處)이기 때문임 [佛學大辭典].
●6도(度); 육바라밀(六波羅蜜; 梵 śaḍ-pāramitā)임. 바라밀은 구역에 도(度)라 했음. 위 권1의 각주 6바라밀(六波羅蜜)을 보라.
●삼십이상(三十二相); 전륜성왕 및 불타의 응화신(應化身)이 구족한 바 32종의 수승한 용모와 미묘한 형상(形相)임. 또 삼십이대인상ㆍ삼십이대장부상ㆍ삼십이대사상(三十二大士相)ㆍ대인삼십이상으로 지으며 약칭이 대인상ㆍ사팔상(四八相)ㆍ대사상(大士相)ㆍ대장부상 등임. 팔십종호(八十種好)와 합칭하면 상호(相好)임. 32상의 명칭과 순서는 여러 경론에서 각기 이설(異說)이 있음.
●팔십종호(八十種好); 부처와 보살의 몸이 구족한 바의 80종의 아름다운 형상(好相). 또 팔십수형호(八十隨形好)ㆍ팔십수호(八十隨好)ㆍ팔십미묘종호(八十微妙種好)ㆍ팔십종소상(八十種小相)ㆍ중호팔십장(衆好八十章)이라고 일컬음. 부처와 보살의 몸이 구족한 바의 수승(殊勝)한 용모의 형상(形相) 가운데 현저(顯著)하여 쉽게 보이는 것은 32종이 있어 일컬어 삼십이상(三十二相)이라 하고 미세하고 은밀하여 보기 어려운 것이 80종이 있어 일컬어 팔십종호(八十種好)라 함. 양자(兩者)를 또한 합칭(合稱)하여 상호(相好)라 함. 전륜성왕도 또한 능히 32상을 구족하지만 80종호는 오직 부처와 보살이라야 비로소 능히 구족함. 80종호의 명칭과 순서는 여러 경론에서 각각 이설(異說)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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