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以下第二廣辨 於中有二 先明別修 後顯雙運 別修之內 先止 後觀 先明止中 卽有四段 一明修止方法 二顯修止勝能 三辨魔事 四示利益
△이하는 제2 광변(廣辨)이다. 이 중에 둘이 있으니 선(先)은 별수(別修)를 밝힘이며 후(後)는 쌍운(雙運)을 밝힘이다(顯). 별수(別修)의 안에 선(先)은 지(止)며 후(後)는 관(觀)이다. 선(先) 지(止)를 밝힌 중에 곧 4단(段)이 있으니 1은 지(止)를 닦는 방법을 밝혔고 2는 지(止)를 닦는 승능(勝能)을 밝혔고(顯) 3은 마사(魔事)를 분변(分辨; 辨)했고 4는 이익을 보였다.
若修止者 住於靜處 端坐正意 不依氣息 不依形色 不依於空 不依地水火風 乃至不依見聞覺知 一切諸想 隨念皆除 亦遣除想 以一切法本來無相 念念不生 念念不滅 亦不得隨心外念境界 後以心除心 心若馳散 卽當攝來住於正念 是正念者 當知唯心 無外境界 卽復此心亦無自相 念念不可得 若從坐起 去來進止 有所施作 於一切時 常念方便 隨順觀察 久習淳熟 其心得住 以心住故 漸漸猛利 隨順得入眞如三昧 深伏煩惱 信心增長 速成不退 唯除疑惑 不信 誹謗 重罪業障 我慢 懈怠 如是等人所不能入
만약 지(止)를 닦는 자라면 정처(靜處)에 머물면서 단정(端正)히 앉아(端坐) 뜻을 바르게 하고(正意) 기식(氣息)에 의하지 않으며 형색(形色)에 의하지 않으며 공(空)에 의하지 않으며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에 의하지 않으며 내지 견(見)ㆍ문(聞)ㆍ각(覺)ㆍ지(知)에 의하지 않아서 일체의 제상(諸想)을 상념(想念; 念) 따라 모두 제(除)하되 또한 제상(除想; 제한다는 상념)도 보낸다(遣). 일체법이 본래 무상(無相)이기 때문에 염념(念念)이 불생(不生)하고 염념이 불멸(不滅)이다. 또한 마음을 따라 밖으로 경계를 상념(念)함도 얻지 말지니(不) 후에 마음으로써 마음을 제(除)한다. 마음이 만약 치산(馳散)하면 곧 마땅히 섭래(攝來)하여 정념(正念)에 머물게 할지니 이 정념이란 것은 마땅히 알라 오직 마음 뿐이며(唯心) 바깥 경계가 없거니와 곧 다시 이 마음도 또한 자상(自相)이 없어서 염념(念念)이 가히 얻지 못한다. 만약 좌(坐)로 좇아 일어나서 거래(去來)하거나 진지(進止)하거나 시작(施作)하는 바 있는 일체시(一切時)에 방편을 상념(常念)하면서 수순(隨順)하고 관찰하되 오래 익혀 순숙(淳熟)하면 그 마음이 득주(得住)하리니 마음이 주(住)하는 연고로써 점점 맹리(猛利)하여 수순(隨順)하여 진여삼매(眞如三昧)에 득입(得入)하여 번뇌를 심복(深伏)하고 신심(信心)이 증장(增長)하여 불퇴(不退)를 속성(速成)하리라. 오직(唯) 의혹(疑惑)ㆍ불신(不信)ㆍ비방(誹謗)ㆍ중죄업장(重罪業障)ㆍ아만(我慢)ㆍ해태(懈怠)한 이는 제(除)하나니 이와 같은 등의 사람은 능입(能入)하지 못하는 바이다.
初方法中 先明能入人 後簡不能者 初中言住靜處者 是明緣具 具而言之 必具五緣 一者間居靜處 謂住山林 若住聚落 必有喧動故 二者持戒淸淨 謂離業障 若不淨者 必須懺悔故 三者衣食具足 四者得善知識 五者息諸緣務 今略擧初 故言靜處 言端坐者 是明調身 言正意者 是顯調心 云何調身 委悉而言 前安坐處 每令安穩 久久無妨 次當正脚 若半跏坐 以左脚置右髀上 牽來近身 令左脚指與右䏶齊 若欲全跏 卽改上右脚必置左髀上 次左脚置右䏶上 次解寬衣帶 不坐時落 次當安手 以左手掌置右手上 累手相對 頓置左脚上 牽來近身 當心而安 次當正身 前當搖動其身 幷諸支節 依七八反 如自按摩法 勿令手足差異 正身端直 令肩骨相對 勿曲勿聳 次正頭頸 令鼻與臍相對 不偏不邪 不仰不卑 平面正住 今總略說 故言端坐也 云何調心者 末世行人 正願者少 邪求者多 謂求名利 現寂靜儀 虛度歲月 無由得定 離此邪求 故言正意 直欲定心與理相應 自度度他至無上道 如是名爲正意也 不依以下 正明修止次第 顯示九種住心 初言不依氣息 乃至不依見聞覺知者 是明第一內住之心 言氣息者 數息觀境 言形色者 骨瑣等相 空地水等 皆是事定所緣境界 見聞覺知 是擧散心所取六塵 於此諸塵推求破壞 知唯自心 不復託緣 故言不依 不依外塵 卽是內住也 次言一切諸相隨念皆除者 是明第二等住之心 前雖別破氣息等相 而是初修 其心麤動 故破此塵 轉念餘境 次卽於此一切諸相 以相續方便澄淨方便 挫令微細 隨念皆除 皆除馳想 卽是等住也 次言亦遣除想者 是明第三安住之心 前雖皆除外馳之想 而猶內存能除之想 內想不滅 外想還生 是故於內不得安住 今復遣此能除之想 由不存內 則能忘外 忘外而靜 卽是安住也 次言以一切法本來無相 念念不生念念不滅者 是明第四近住之心 由先修習念住力故 明知內外一切諸法 本來無有能想可想 推其念念不生不滅 數數作意而不遠離 不遠離住 卽是近住也 次言亦不得隨心外念境界者 是明第五調順之心 諸外塵相念心散亂 依前修習安住近住 深知外塵有諸過患 卽取彼相爲過患想 由是想力折挫其心令不外散 故名調順也 次言後以心除心者 是明第六寂靜之心 諸分別想令心發動 依前調順 彌覺其患 卽取此相爲過患想 由此想力轉除動心 動心不起 卽是寂靜也 次言心若馳散 乃至念念不可得者 是明第七最極寂靜之心 於中有二 初言心若馳散卽當攝來 乃至唯心無外境界者 是明失念暫馳散外塵 而由念力能不忍受也 次言卽復此心亦無自相念念不可得者 是明失念還存內心 而由修力尋卽反吐也 能於內外不受反吐 是故名爲最極寂靜 次言若從坐起去來 乃至淳熟其心得住者 是明第八專住一趣 謂有加行有功用心 故言常念方便隨順觀察也 無間無缺定心相續 故言久習淳熟其心得住 卽是專住一趣相也 次言以心住故漸漸猛利 隨順得入眞如三昧者 是明第九等持之心 由前淳熟修習力故 得無加行無功用心 遠離沈浮 任運而住 故名等持 等持之心住眞如相 故言得入眞如三昧 深伏煩惱信心增長速成不退者 略顯眞如三昧力用 由此進趣得入種性不退位故 上來所說名能入者 唯除以下 簡不能者 修止方法竟在於前
초(初) 방법 중 선(先)은 능입인(能入人)을 밝혔고 후(後)는 불능자(不能者)를 간별(簡別; 簡)했다. 초중(初中)에 말한 정처(靜處)에 머문다는 것은 이는 연구(緣具; 緣을 갖춤)를 밝혔으니 갖추어 그것(之)을 말하자면 반드시 5연(緣)을 갖추어야 한다. 1자는 정처(靜處)에 한거(間居; 間은 閒의 本字)함이니 이르자면 산림에 거주함이다. 만약 취락(聚落)에 거주한다면 반드시 훤동(喧動)이 있는 연고다. 2자는 지계(持戒)가 청정함이니 이르자면 업장(業障)을 여읨이다. 만약 부정(不淨)한 자라면 참회가 필수(必須)인 연고다. 3자는 의식(衣食)이 구족함이다. 4자는 선지식을 얻음이다. 5자는 모든 연무(緣務)를 쉼이다(息). 여금에 간략히 초(初)만 든지라 고로 말하되 정처(靜處)라 했다. 말한 단좌(端坐)란 것은 이는 조신(調身)을 밝혔고 말한 정의(正意)란 것은 이는 조심(調心)을 밝혔다(顯). 어떻게 조신(調身)하는가, 위실(委悉; 詳盡)히 말하자면 앞의 안좌처(安坐處)에 매양(每樣; 每) 안온(安穩)하여 오래 오래 방애(妨礙; 妨)가 없게 하고 다음엔(次) 마땅히 다리(脚; 다리 각. 발 각)를 바르게 하되 만약 반가좌(半跏坐)면 좌각(左脚)으로써 우비(右髀;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놓고 끌어와서(牽來) 몸에 가깝게 하고 좌각지(左脚指; 왼쪽 발가락)로 하여금 우폐(右䏶; 오른쪽 넓적다리)와 더불어 가지런하게(齊) 한다. 만약 전가(全跏; 全跏坐)하려고 한다면 곧 개상(改上)하여 우각(右脚)을 반드시 좌비(左髀) 위에 놓고 다음엔 좌각(左脚)을 우폐(右䏶) 위에 놓는다. 다음엔 의대(衣帶)를 풀어 느슨하게(解寬) 하되 부좌시(不坐時)엔 떨어지게 하라. 다음엔 마땅히 안수(安手; 손을 안치함)하되 좌수장(左手掌; 왼손바닥)을 우수(右手) 위에 놓고 손을 포개어(累手) 상대(相對)하여 좌각(左脚) 위에 돈치(頓置; 放置니 頓은 放置)하고 끌어와서(牽來) 몸에 가까이 하여 당심(當心; 가슴에 당함)하여 둔다(安). 다음엔 마땅히 몸을 바로하되 앞으로 당해(前當) 그 몸과 아울러 모든 지절(支節; 四肢)을 요동(搖動)하기를 칠팔 번 되풀이 함에 의해(依七八反) 스스로 안마(按摩)하는 법과 같이 하되 수족(手足)으로 하여금 차이(差異; 어긋나서 달라짐)하지 않게(勿) 하고 정신단직(正身端直)하여 견골(肩骨)로 하여금 상대(相對)케 하되 굽지도 않고 솟지도 않게(勿曲勿聳) 하라. 다음에 두경(頭頸; 머리와 목)을 바로하되 코와 더불어 배꼽으로 하여금 상대하여 불편불사(不偏不邪)하며 불앙불비(不仰不卑)케 하여 평면(平面)으로 정주(正住)한다. 여금에 총합(總合; 總)하여 약설(略說)한지라 고로 말하되 단좌(端坐)라 했다. 어떻게 조심(調心)하는가, 말세(末世)엔 행인(行人; 수행인)이 정원자(正願者)는 적고 사구자(邪求者)는 많나니 이르자면 명리(名利)를 구하여 적정(寂靜)한 위의(威儀; 儀)를 나타내며 세월을 헛되이 보내기만 하여(虛度歲月) 득정(得定)할 까닭(由)이 없거니와 이 사구(邪求)를 여의는지라 고로 말하되 정의(正意)라 했다. 바로(直) 정심(定心)이 이치와 더불어 상응하여 자도도타(自度度他)하여 무상도(無上道)에 이르고자 함이니 이와 같음을 이름하여 정의(正意)다. 의하지 않는다(不依) 이하는 지(止)를 닦는 차제(次第)를 정명(正明)함이니 9종의 주심(住心)을 현시(顯示)했다. 초(初)에 말한 기식(氣息)에 의하지 않음 내지 견(見)ㆍ문(聞)ㆍ각(覺)ㆍ지(知)에 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는 제1 내주지심(內住之心)을 밝힘이다. 말한 기식(氣息)이란 것은 수식관(數息觀)의 경계다. 말한 형색(形色)이란 것은 골쇄(骨瑣; 뼈사슬) 등의 상(相)이며 공(空)ㆍ지(地)ㆍ수(水) 등은 모두 이 사정(事定)이 소연(所緣)하는 경계며 견(見)ㆍ문(聞)ㆍ각(覺)ㆍ지(知) 이것은 산심(散心)이 소취(所取)하는 6진(塵)을 들었으니(擧) 이 제진(諸塵)을 추구(推求)하고 파괴하매 오직 자심(自心) 뿐임을 알고 다시 탁연(託緣)하지 않는지라 고로 말하되 의하지 않는다(不依) 했으니 외진(外塵)에 의하지 않음이 곧 이 내주(內住)다. 차(次)에 말한 일체의 제상(諸相; 논에 諸想으로 지어졌음)을 상념(想念) 따라 모두 제(除)한다는 것은 이는 제2 등주지심(等住之心)을 밝혔음이니 전에 비록 기식(氣息) 등의 상(相)을 특별히 깨뜨렸으나(別破) 이는 초수(初修)라서 그 마음이 추동(麤動)하는지라 고로 이 진(塵)을 깨뜨려 더욱(轉) 여경(餘境)을 상념(念)하고 다음엔 이 일체제상(一切諸相)을 상속방편과 징정방편(澄淨方便)으로써 꺾어(挫) 미세하게 하고 상념 따라 모두 제(除)하나니 치상(馳想)을 다 제함이 곧 이 등주(等住)다. 다음에 말한 또한 제상(除想; 제한다는 상념)도 보낸다(遣)는 것은 이는 제3 안주지심(安住之心)을 밝혔음이니 전에 비록 외치지상(外馳之想)을 모두 제했으나 오히려 안에 능제지상(能除之想)이 존재(存)하므로 내상(內想)이 불멸하면 외상(外想)이 도리어 생하는지라 이런 고로 안에 안주함을 얻지 못하거니와 여금에 다시 이 능제지상(能除之想)도 보내어 안에 존재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곧 능히 밖도 잊나니 밖을 잊어 고요함이 곧 이 안주(安住)다. 차(次)에 말한 일체법이 본래 무상(無相)이기 때문에 염념(念念)이 불생(不生)하고 염념이 불멸(不滅)한다는 것은 이는 제4 근주지심(近住之心)을 밝혔음이니 먼저 염주(念住)를 수습한 힘을 말미암은 연고로 내외의 일체제법이 본래 능상가상(能想可想)이 있지 않음을 환히 아는지라(明知) 그 염념(念念)이 불생불멸임을 추구(推究; 推)하여 자주자주(數數) 작의(作意)하여 원리(遠離)하지 않나니 원리하지 않고 주(住)함이 곧 이 근주(近住)다. 다음에 말한 또한 마음을 따라 밖으로 경계를 상념함도 얻지 말지니 란 것은 이는 제5 조순지심(調順之心)을 밝혔으니 모든 외진(外塵)의 상(相)에 염심(念心)이 산란(散亂)하면 전에 수습(修習)한 안주(安住)와 근주(近住)에 의해 외진(外塵)에 모든 과환(過患)이 있음을 심지(深知)하여 곧 저 상(相)을 취해 과환(過患)의 상(想)으로 삼나니 이 상력(想力)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을 절좌(折挫)하여 밖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는지라 고로 이름이 조순(調順)이다. 차(次)에 말한 후에 마음으로써 마음을 제(除)한다는 것은 이는 제6 적정지심(寂靜之心)을 밝혔으니 모든 분별상(分別想)이 마음으로 하여금 발동(發動)케 하다가 전의 조순(調順)에 의해 더욱(彌) 그 과환(過患; 患)을 깨닫고 곧 이 상(相)을 취해 과환상(過患想)으로 삼으며 이 상력(想力)으로 말미암아 더욱(轉) 동심(動心)을 제하나니 동심이 일어나지 않음이 곧 이 적정(寂靜)이다. 차(次)에 말한 마음이 만약 치산(馳散)하면 내지 염념(念念)이 가히 얻지 못한다 한 것은 이는 제7 최극적정(最極寂靜)의 마음을 밝혔다. 이 중에 둘이 있으니 처음에 말한 마음이 만약 치산(馳散)하면 곧 마땅히 섭래(攝來)하여 내지 오직 마음 뿐이며(唯心) 바깥 경계가 없다는 것은 이는 실념(失念)하여 잠시(暫) 외진(外塵)에 치산(馳散)하다가 염력(念力)으로 말미암아 능히 인수(忍受)하지 않음을 밝혔다. 차(次)에 말한 곧 다시 이 마음도 또한 자상(自相)이 없어서 염념(念念)이 가히 얻지 못한다 한 것은 이는 실념(失念)하여 도리어 내심(內心)을 두다가(存) 수력(修力)으로 말미암아 이윽고(尋) 곧 반토(反吐)함을 밝혔음이니 능히 내외를 불수(不受)하고 반토(反吐)하는지라 이런 고로 이름하여 최극적정(最極寂靜)이다. 차(次)에 말한 만약 좌(坐)로 좇아 일어나서 거래(去來)하거나 내지 순숙(淳熟)하면 그 마음이 득주(得住)한다는 것은 이는 제8 일취(一趣)에 전주(專住)함을 밝혔음이니 이르자면 가행(加行)도 있고 공용(功用)도 있는 마음인지라 고로 말하되 늘 방편을 상념하면서 수순(隨順)하고 관찰한다 했으며 무간무결(無間無缺)한 정심(定心)이 상속하는지라 고로 말하되 오래 익혀 순숙(淳熟)하면 그 마음이 득주(得住)한다 했으니 즉시(卽是) 일취(一趣)에 전주(專住)하는 상(相)이다. 차(次)에 말한 마음이 주(住)하는 연고로써 점점 맹리(猛利)하여 수순(隨順)하여 진여삼매(眞如三昧)에 득입한다는 것은 이는 제9 등지지심(等持之心)을 밝혔으니 앞의 순숙(淳熟)한 수습력(修習力)을 말미암은 연고로 가행(加行)도 없고 공용(功用)도 없는 마음을 얻어서 침부(沈浮)를 원리(遠離)하고 임운(任運)하여 주(住)하는지라 고로 이름이 등지(等持)며 등지지심(等持之心)이 진여상(眞如相)에 주(住)하는지라 고로 말하되 진여삼매(眞如三昧)에 득입(得入)한다 했다. 번뇌를 심복(深伏)하고 신심(信心)이 증장(增長)하여 불퇴(不退)를 속성(速成)한다는 것은 진여삼매의 역용(力用)을 약현(略顯)함이니 이 진취(進趣)로 말미암아 종성(種性)의 불퇴위(不退位)에 득입(得入)하는 연고다. 상래(上來)에 설한 바는 이름이 능입자(能入者)며 유제(唯除) 이하는 불능자(不能者)를 간별(簡別)함이다. 지(止)를 닦는 방법은 마침이 앞에 있다(竟在於前).
●想; 저본에 惱로 지어졌음. 기신론소하(起信論疏下)에 의해 고쳤음.
●취락(聚落); 인민이 모여 거주하므로 고로 이르되 취락(聚落)임. 광아(廣雅) 락(落) 거(居)다.
●연무(緣務); 이르자면 자기와 유연(有緣)한 세간의 속무(俗務).
●반가좌(半跏坐); 또 명칭이 반가부좌(半跏趺坐), 반좌(半跏)임.
●말세(末世); 요말(澆末; 풍속이 천박한 세상)의 세대임. 석가가 입멸한 후 5백 년이 정법시(正法時)가 되고 다음 1천 년이 상법시(像法時)가 되고 후 만 년이 말법시(末法時)가 됨. 말세란 것은 곧 말법시임.
●수식관(數息觀); 5정심관(停心觀)의 하나. 범어 안반(安般)ㆍ안나반나(安那般那)ㆍ아나파나(阿那波那; 梵 āna-apāna)를 번역해 가로되 수식관이니 출식(出息)과 입식(入息)을 세며 마음을 진정(鎭定)하는 관법의 이름임.
●종성(種性); 종(種)은 종자니 발생의 뜻이 있고 성(性)은 성분이니 불개(不改)의 뜻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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