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사교의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 9

태화당 2020. 10. 11. 14:10

緣起; 일체의 제법(유위법)은 모두 갖가지 조건(곧 인연)이 화합함으로 인해 성립하나니 이 도리를 일컬어 연기라 함. 아함경의 여러 곳에서 밝힌 바의 12지연기(十二支緣起)와 같은 것임. 이르자면 무명은 행()의 연()이 되며 행은 식()의 연이 되며 내지 생()은 노사(老死)의 연이 됨.

僧統; 승관(僧官)의 이름. 승사략중(僧史略中)에 가로되 요진(姚秦) 초에 승관(僧官)을 세웠으니 일컬어 정()이라 했다. ()에서 이를 고쳐 일컬어 통()이라 했으니 사문통(沙門統)ㆍ승통(僧統)ㆍ사문도통(沙門都統)3()이 있었다. 황시년(皇始年; 396397) 중 법과(法果)가 처음으로 사문통에 임명되었다. 문성제(文成帝)가 불법을 재흥(再興)한 후 계빈사문(罽賓沙門) 5인에게 승통을 급여했다. 효문제세(孝文帝世; 효문제 시대) 초 담요(曇曜)를 사문도통(沙門都統)에 임명했다. 그 후 수세초(隋世初)에 이르러 대통(大統)의 명칭을 일으켰으니 담연(曇延)을 이에 임명했다.

贊寧; (919-1001) 송대 학승(學僧). 절강(浙江) 덕청(德淸) 사람이며 성은 고(). 항주(杭州) 상부사(祥符寺)에서 출가했고 구족계를 받은 후 3()을 박섭(博涉)했고 더욱 남산율(南山律)에 정통했음. 다시 곁으로 유도(儒道) 2가의 전적에도 통달했고 문사(文辭)가 자못 좋았고 성예(聲譽)가 날로 높았음. 오월(吳越) 전홍숙(錢弘俶)이 그의 덕을 흠모하여 양절(兩浙) 승통(僧統)에 임명했고 다시 명의종문대사(明義宗文大師)란 호를 주었음. 그 후 송태종도 또한 예우에 더함이 있었음. 태평흥국 3(978) 통혜대사(通慧大師)란 호를 주었고 아울러 선후로 한림사관편수(翰林史館編修)ㆍ좌가강경수좌(左街講經首座)ㆍ서경교사(西京敎事)ㆍ우가승록(右街僧錄) 등의 직에 임명했음. 함평 4년 입적했고 세수는 83. 생평에 저작이 자못 풍부했으니 예컨대() 송고승전ㆍ취령성현록(鷲嶺聖賢錄)ㆍ대송승사략ㆍ내전집ㆍ사초음의지귀(事鈔音義指歸)ㆍ외학집 등 [佛祖統紀四十四 釋氏稽古略四 律苑僧寶傳八].

錢忠懿王; 오대십국(五代十國) 시기 오월(吳越)의 최후의 1() 국왕이 전홍숙(錢弘俶)이며 시호가 충의왕(忠懿王). 전홍숙(錢弘俶; 929-988 재위 948-978) 오대 항주(杭州) 임안(臨安) 사람이니 자는 문덕(文德)이며 오월국 문목왕(文穆王) 전원관(錢元瓘)의 제9. 또 호칭이 전숙(錢俶)이니 천성이 성후(誠厚)했고 마음이 불법을 향(; )했음. 나이 20에 왕위를 계승했고 재위는 30. 즉위한 후 천태덕소(天台德韶)를 국사로 봉했고 아울러 도잠(道潛)을 좇아 보살계를 받았음. 후주(後周) 현덕(顯德) 2(955) 아육왕 조탑(造塔) 일사(一事)를 흠모하여 84천 소보탑(小寶塔)을 주성(鑄成)했고 가운데 보협인심주(寶篋印心咒)를 납입하여 널리 반시(頒施)를 행했으니 세칭이 전홍숙탑(錢弘俶塔). 송 건륭(建隆) 원년(960) 항주 영은사(靈隱寺)를 부흥하고 지각연수(智覺延壽)를 초청해 중흥 제1세로 삼았음. 또 나계의적(螺溪義寂)을 영청(迎請)하여 법화경을 강설하게 하고 정광대사(淨光大師)란 호를 주었음. 당말의 상란(喪亂)으로부터 교적(敎籍)이 많이 해외로 유출되었으므로 다시 사자를 파견해 일본과 고려에 다다라 천태의 논소(論疏)를 구취(求取)하게 해 천태의 교관(敎觀)을 울연(鬱然)하게 일어나게 했음. 또 항주에 보문사를 건립했고 전당(錢塘)에 도솔원 등을 세웠음. 태평흥국 3(978) 나라를 들어 귀송(歸宋)하자 회해국왕(淮海國王)으로 봉했고 8년 고쳐 남한국왕(南漢國王)이라 했음. 단공(端拱) 원년(988) 고쳐 등왕(鄧王)으로 봉했음. 이 해 8월에 훙()했으니 향년은 60. 후에 추봉(追封)하여 진국왕(秦國王)이라 했고 시호는 충의왕(忠懿王)錢忠懿王[宋高僧傳七 禪林僧寶傳七 宋史列傳第四八].

內典; 불교의 경론서적을 가리킴. 이와 반()하여 불교 이외의 전적을 외전이라 일컬음. 대지도론에 외전을 학습함은 마치 칼로 진흙을 자름과 같아서 성취하는 바가 없고 칼만 스스로 손상한다는 말이 있음.

永嘉集;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이니 1. 또 명칭이 영가선집(永嘉禪集)ㆍ영가선종집(永嘉禪宗集)ㆍ영가집(永嘉集). 당대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이 지었고() 경주자사(慶州刺史) 위정(魏靜)이 집()했으며 지금 가흥장(嘉興藏) 4책ㆍ용장(龍藏) 127책ㆍ대정장(大正藏) 48책에 수록되었음. 내용은 천태지관(天台止觀)의 차조(遮照)의 뜻으로써 선종의 선()을 해석하여 선정(禪定)의 용의(用意) 및 수행의 역정(歷程)을 게시(揭示)하였음. 모두 10()으로 분류했음. 1 모도지의(慕道志儀), 2 계교사의(戒憍奢意), 3 정수삼업(淨修三業), 4 사마타송(奢摩他頌), 5 비바사나송(毘婆舍那頌), 6 우필차송(優畢叉頌), 7 삼승점차(三乘漸次), 8 이사불이(理事不二), 9 권우인서(勸友人書), 10 발원문(發願文). 권수에 위정의 서가 첨부되어 있음. 3()은 서분(序分)이 되고 다음 5문은 정종분(正宗分)이 되고 후 2문은 유통분(流通分)이 됨. 본서는 태선(台禪; 천태와 선종) 융합의 초작(初作)이 되는지라 고로 자못 촉목(矚目)을 받음. 관련(關聯)이 있는 주석서에 송승(宋僧) 행정(行靖)의 영가집주(永嘉集註) 2, 명승(明僧) 전등(傳燈)의 영가선종집주(永嘉禪宗集註) 2권 등이 있음.

同除四住此處爲齊 若伏無明三藏則劣; 영가선종집주상(永嘉禪宗集註上)에 이르되 글이 법화원의(法華元義; 法華玄義과 통함)에 나온다. 거기에서() 4()를 판석(判釋; )하면서 모두 과두지불(果頭之佛; 果佛)이 있거니와 만약 단복(斷伏)과 수증(修證)을 논하자면 계위(階位)가 천연(天淵; 天上深淵이니 차별이 극히 큼에 비유함)이다. 이른 바 변방(邊方)이 미정(未靜)이면 차직(借職; 겨우 虛銜만 있고 實授의 관직이 아님)이 곧 높더라도 논작정훈(論爵定勳)하매 그 지위는 실로 낮다. 고로 3()의 과불(果佛)과 원교(圓敎) 7신위(信位)의 사람을 괄약(括約; )하여 그 우열(優劣)을 정()하는지라 고로 가로되 한가지로 4()를 제()함엔 차처(此處)가 제등(齊等; )하지만 이에() 무명(無明)을 복단(伏斷; )함엔 3()이 곧 열등(劣等; )하다. 3장의 사람은 근본무명이 있음을 알지도 못하거늘 하물며 능히 복단하겠는가, 고로 이 6()이 청정한 사람이 열등이 된다. 삼장(三藏) 경ㆍ율ㆍ론 3(). 삼장법수5. 3() [出翻譯名義] 3장이란 것은 이르자면 경ㆍ율ㆍ론이니 각각 일체의 문리(文理)를 함장(含藏)했으므로 고로 다 이름이 장(). 1. 수다라장(修多羅藏) 범어로 수다라(修多羅; sūtra)는 화언(華言)으로 계경(契經)이니 계()는 합(). 이르자면 위로는 제불의 이치에 계합하고 아래론 중생의 근기에 계합하나니 고로 이름이 계경임. 2. 비나야장(毘奈耶藏) 범어로 비나야(毘奈耶; vinaya) 는 화언으로 율()이며 또 이르되 선치(善治). 이르자면 능히 중생의 악을 다스림이 세간의 법률과 같나니 곧 능히 무겁거나 가벼운 죄를 단결(斷決)하므로 고로 이름이 율임. 3.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 범어로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는 또한 이름이 아비담(阿毘曇)이니 화언으로 논(). 논이란 것은 논의(論議). 유가론에 이르되 모든 법의 성상(性相)을 문답하고 결택(決擇)하므로 고로 이름이 논이다.

; 저본에 로 지어졌음. 타본에 의해 고쳤음.

; 덕소(德韶; 891-972) 오대 오월 법안종승. 처주(處州) 용천(龍泉; 절강 용천) 사람인데 일설엔 진운(縉雲; 절강 진운) 사람. 속성은 진(). 15세에 출가했고 18세에 구족계를 받았음. 일찍이 명사(明師) 53인을 두루 참방했으며 후에 임천(臨川)의 법안문익(法眼文益)의 법사(法嗣)가 됨. 다시 천태산에 들어가 지의(智顗)의 유적(遺蹟)을 참방하고 백사사(白沙寺)에 지주(止住)했는데 뒤에 오월왕 전홍숙(錢弘俶)이 영접해 항주(杭州)에 이르게 하고 존경하여 국사로 삼음을 받았음. 때에 천태산의 나계의적(螺溪義寂)이 천태의 교적(敎籍)이 산일(散佚; 흩어져 없어짐)함을 개탄하였는데 고려에 천태의 교적이 존재하여 있다 함을 듣고 스님과 함께 의논했으며 스님이 이에 전홍숙에게 걸구(乞求)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가지고 오게 했음. 후에 천태 반야사로 옮겼고 아울러 도량 수십 곳을 흥건(興建)했음. 송태조 개보(開寶) 5년에 입적했으니 나이는 82 [宋高僧傳十三 禪林僧寶傳七 聯燈會要二十七].

國師; 조정사원7(祖庭事苑七). 국사(國師) 서역의 법은 그 사람을 추중(推重; 추대하여 존중)하되 외내가 같은 바며 사정(邪正)을 다 가졌으면 거국(擧國; 전국)이 귀의하므로 이에 이 호가 현창(顯彰; 환히 나타남)했다. 성교(聲敎)가 동점(東漸; 東進)하여 오직 북제(北齊)의 고승 법상(法常)을 제주(齊主; 文宣帝)가 높여 국사로 삼았으니 국사의 호는 상공(常公)으로부터 비롯했다. ()ㆍ수()의 시대엔 천태지의(天台智顗)가 진() 선제(宣帝)와 수 양제의 보살계사가 되므로 고로 때에 국사로 호했고 당 측천조(則天朝)에 신수(神秀)를 경사에 불러 들였으며 및 중종(中宗)ㆍ예종()ㆍ현종(玄宗), 무릇 4()에 다 국사로 호했으며 뒤에 혜충(慧忠)이 있어 숙종(肅宗)과 대종(代宗), 2()에 금중에 들어가 설법했으며 또한 국사로 호했다. 원화(元和) 중에 칙령해 지현(知玄)을 임명()해 오달국사(悟達國師)로 호했다. 만약 편패(偏覇; 偏國覇者)의 나라라면 곧 촉후주(蜀後主)가 우가승록(右街僧錄) 광업(光業)에게 주어 우성국사(祐聖國師)로 삼았으며 오월에선 덕소(德韶)를 일컬어 국사라 했다 [大宋僧史略卷中].

天台; 지금의 절강(浙江) 천태현(天台縣). 천태는 불종도원(佛宗道源; 불교와 도교의 宗源)이며 산수가 신수(神秀)하여 명칭이 드러났고 국청사는 불교 천태종의 조정(祖庭)이 됨 [百度百科].

國淸寺; 절강 천태현 북쪽 천태산 불롱봉(佛隴峰) 남쪽 기슭에 위치함. 곧 천태종의 발원지. 처음 정광선사(定光禪師)가 이 봉우리에 거주하면서 일찍이 제자에게 일러 가로되 오래지 않은 장래에 수승한 선지식이 있어 도중을 거느리고 이 산에 모여 거주할 것이다. 그 후 과연 지의(智顗)가 도강(渡江)하여 여기에 이름이 있었음. 아울러 불롱의 남쪽에 절을 건립하려고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시적했음. 수 개황(開皇) 18(596) 진왕(晉王) 양광(楊廣; 즉 양제)이 이에 지의를 위해 천승재(千僧齋)를 베풀고 공사를 일으켜 전우(殿宇)를 건립했으며 처음의 명칭은 천태산사였음. 후에 지의가 처음 이 산에 들어왔을 때 정광이 일찍이 꿈에 고하기를 3(北周北齊)이 통합되어 하나가 되면 큰 세력이 있는 사람이 능히 이 절을 지을 것이다. 절이 만약 완성되면 나라가 곧 깨끗해지리니 마땅히 일컬어 국청사로 하라 했음으로 인해 수 대업(大業) 원년(605) 드디어 국청사란 편액을 주었음. 오래지 않아 관정(灌頂)이 여기에 거주했고 차후에 천태종의 근본도량이 되었음. 남송 건염 2(1128) 칙령으로 중수했고 건염(建炎) 4년 조서를 내려 교를 바꾸어 선으로 삼았으며 차후로 국청사는 선사(禪寺)가 되었음. 절의 좌우에 5봉이 환옹(環擁)하여 있으며 두 개울이 돌아 흐르다가 앞에서 합침. 다리가 있으니 이름이 풍간교(豐干橋)며 전하기를 당대 풍간이 한산(寒山)ㆍ습득(拾得)과 장난치며 놀던 땅이라 함. 또 풍간선사와 이 절의 인연을 좇아 가히 아나니 비록 송대 이후에 비로소 선사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일찍 당초(唐初)에 이미 점점 선화(禪化)했음. 후에 수 차례 증건(增建)을 겪었으며 사역(寺域)을 호칭하기를 고래로 천하 사절(四絶)의 하나라 함 [國淸百錄序 隋天台智者大師別傳 天台山全志 古今圖書集成山川典第一二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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