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사교의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 10

태화당 2020. 10. 11. 14:11

; 의적(義寂; 919-987)이니 송대 천태종 제15. 절강 영가(永嘉) 사람이며 속성은 호()며 자는 상조(常照)니 세칭이 정광대사(淨光大師)ㆍ나계의적(螺溪義寂)ㆍ나계존자. 12세에 온주(溫州) 개원사(開元寺)에서 출가했고 19세에 구족계를 받았음. 후에 천태산에 들어가 청송(淸竦)을 좇아 지관을 연학(硏學)했음. 청송이 입적한 후 곧 나계도량(螺溪道場)을 흥건(興建)하여 거기에 거주했음. 또 당말 이래 전란이 빈잉(頻仍; 여러 차례 연속함)하여 천태 전적(典籍)이 쓸은 듯이 남음이 없었는데 스님이 이에 오월왕 전숙(錢俶)에게 권하여 고려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태종 서전(書典)을 멱구(覓求)하고 초사(抄寫)하게 했으며 학인에게 주었으니 천태종이 이로 말미암아 중흥의 계기를 획득했음. 옹희(雍熙) 410월에 입적했고 세수는 69. 찬술(撰述)에 지관의례(止觀義例)와 법화십초(法華十鈔) 등이 있음. 문하에 의통(義通)ㆍ체관(諦觀)ㆍ징육(澄育)ㆍ종욱(宗昱) 등의 명사가 배출되었음 [釋門正統四 佛祖統紀八 螺溪振祖集 百丈清規證義記七之下].

法師; 능히 불법에 정통하고 사람의 스승이 되는 자를 일컬음. 또 법을 행하는 스님을 일컬음. 법화의소9(法華義疏九). 사람으로서 능히 위로는 대법을 크게 하고 아래로는 사람의 스승이 되는지라 고로 이르되 법사(法師)니 세간의 약사가 약으로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지라 이름해 약사라 함과 같다. 열반경소삼덕지귀1(涅槃經疏三德指歸一). 경론에 정통한 이를 가로되 법사(法師). 벽암록 제1칙 종전초(種電鈔). 기원7(紀原七)에 이르되 후진(後秦) 구마라집(鳩摩羅什)을 처음으로 법사로 호칭했다. 그 후에 중국에서 명승(名僧)을 또한 그렇게 호칭했다.

智者; 지자대사니 개황(開皇) 11년 진왕(晉王) ()이 총강회(總江淮)에 임명되었고 1123일 양주(楊州) 총관금성(總管金城)에서 대사를 청해 승회(僧會)를 베풀고 보살계를 받았으며 스님을 받들어 호해 가로되 지자라 했음. 지의(智顗; 538-597) 천태종을 개종(開宗)한 조사(祖師; 一說三祖니 곧 慧文慧思初祖二祖로 삼음). 수대(隋代) 형주(荊州) 화용(華容; 호남 潛江 서남) 사람이며 속성은 진()이며 자가 덕안(德安)이며 세칭이 천태지자(天台智者)ㆍ지자대사(智者大師)ㆍ천태대사(天台大師). 나이 18에 출가했으며 처음에 대소산(大蘇山) 혜사(慧思)를 알현(謁見)했는데 곧 보현도량(普賢道場)을 보이며 4안락행(四安樂行)을 설했음. 대사가 법화경을 외우다가 약왕품(藥王品)에 가로되 이것이 참 정진(精進)이며 이 이름이 여래에게 참으로 법공양함이다 함에 이르러 곧 법화삼매(法華三昧)를 깨쳐 선다라니(旋陀羅尼)를 획득했으며 영산일회(靈山一會)가 엄연(儼然)하여 흩어지지 않았음을 보았음. 그리고 혜사에게 고별하고 유화(遊化)하려 하자 혜사가 가로되 너는 진()나라에 인연이 있으니 간다면 반드시 이익이 있을 것이다. 대건(太建) 7(575) 건강(建康) 와관사(瓦棺寺)에 다다라 선법(禪法)을 창홍(創弘)했는데 복야(僕射) 서릉(徐陵)과 상서(尙書) 모희(毛喜) 등이 존귀하게 여기며 앙망(仰望)했고 아울러 선지(禪旨)를 받았음. 일찍이 꿈에 높은 산에 올라 한 승인을 보았는데 손으로 그를 불렀음. 이 해 9월에 천태산에 이르자 정광(定光)이 나와 영접하며 가로되 지난날 상초(相招)함을 기억하느냐. 대사가 경이(驚異)하며 예배하고 이에 암자를 창건하고 행도(行道)했음. () 선제(宣帝)가 스님을 불러 환도(還都)하여 광택사(光宅寺)에 거주케 했는데 수() 문제(文帝) 개황(開皇) 9(589) ()나라가 멸망하자 대사는 이에 여산(廬山)에서 쉬었음. 개황 11년 진왕(晉王) (; 훗날의 隋煬帝)이 강회(江淮)의 총관(總管)에 임명되자 1123일 양주(楊州) 총관금성(總管金城)에서 대사를 초청해 승회(僧會)를 베풀고 보살계를 받았으며 스님을 받들어 호()해 가로되 지자(智者)라 했음. 오랜만에 여산(廬山)에 돌아갔다가 진왕(晉王)이 다시 요청해 산을 나와 소비(蕭妃)를 위해 구환(救患)했으며 7일 동안의 재()를 건립하고 광명참(光明懺)을 행했으며 질환(疾患)이 낫자 다시 여산으로 돌아가다가 형봉(衡峰)을 지나 형부(荊部)에 이르자 옥천사(玉泉寺)에 머물렀음. 개황 17(597) 1224일 천태산 석성사(石城寺)에서 귀적(歸寂)했으니 나이는 67이며 승랍은 40. 대사는 큰 절 36곳을 건조했고 명령해 15()을 사경(寫經)케 했으며 경소(經疏) 100여 권을 지었고 금동토목(金銅土木) 등의 상() 80만 구()를 조성했으며 15천 사람을 도승(度僧)했고 50여 주()에서 도속(道俗; 僧俗)이 보살계를 받은 자를 가히 다 기록하지 못함. 대사가 이르되 법화(法華)1()의 묘전(妙典)이 되며 방편의 권문(權門)을 열어 진실한 묘리(妙理)를 보였으며 중선(衆善)의 소행(小行)을 모아 광대한 1()으로 귀납(歸納)했다 하고는 드디어 현의(玄義)를 발출(拔出)하여 가로되 석명변체명종론(釋名辯體明宗論)이니 교상(敎相)5()을 판석(判釋)한 것임. 후세에 이를 종앙(宗仰)해 가로되 천태교(天台敎)라 했음 [釋氏稽古略二 唐高僧傳二十一 佛祖統紀六 傳燈錄二十七].

大師; 초과(初果) 이상 내지 제불보살은 가히 중생의 사범(師範)이 되는지라 고로 명칭이 대사임. 유가사지론82(瑜伽師地論八十二). 능히 성문제자(聲聞弟子)에게 일체 응작(應作)ㆍ불응작(不應作)의 일을 교계(敎誡)하는지라 고로 명칭이 대사(大師). 또 능히 무량한 중생을 화도(化導)하여 고()를 적멸하게 하는지라 고로 명칭이 대사다. 또 삿되고 더러운 외도가 세간에 출현함을 최멸(摧滅)하는지라 고로 명칭이 대사다. 조정사원6. 사명(師名) 승사(僧史; 대송승사략하)를 심구(尋究)하니 사호(師號)는 멀리 양무제에서 일어났으니 누약법사(婁約法師)라고 호했다. 다음엔 수양제가 지의선사(智顗禪師)라고 호했으며 아울러 지자(智者)라 했지만 대사(大師)2자가 없었다. 당중종이 만회(萬回)를 호해 법운공(法雲公)이라 했는데 공()이란 1자를 더했다. 현종 개원(713-740) 중에 혜일법사(慧日法師)가 있었다. 중종조(中宗朝)에 득도사(得度師) 의정(義淨)이 서역에 노닐다 돌아와서 진용(眞容; 佛眞容을 가리킴)과 범협(梵夾)을 진상하자 자민(慈敏)이란 호를 주었으나 또한 대사란 글자를 행하지 않았다. 목종조(穆宗朝)에 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 유총(劉總)이 주걸(奏乞; 주청해 걸구함)하여 출가하자 자의(紫衣)를 주고 대각사(大覺師)라 호했으니 단지 사() 1자였다. 의종조(懿宗朝)에 이르러 함통(咸通) 11(870) 1114일 연경절(延慶節)에 내전에서 담론함으로 인하여 좌가(左街)의 운호(雲顥)에게 삼혜대사(三慧大師)를 주고 우가의 승철에게 정광대사(淨光大師)를 주었다. 사호(師號)는 의종조에 비롯했다.

安史; 안사지란(安史之亂)이니 이는 중국 당대 현종(玄宗) 말년에서 대종(代宗) 초년에 이르기까지(7551216日 至763217) 당조(唐朝) 장령(將領; 將帥)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당조를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후에 발동(發動)한 전쟁임 [百度百科].

會昌焚毀; 회창사태(會昌沙汰)당 무종(武宗) 회창(會昌; 841-846)년 중에 인기(引起)한 바의 폐불사건을 가리킴. 종용록 제28. 당 무종은 선교(仙敎)를 좋아하여 승니 265백 인을 사태(沙汰)하였다. 회창 5(845) 8월 하순 칙령으로 귀속(歸俗)하게 했다. ()가 방사(方士)의 단약(丹藥)을 복용하고는 성격이 조급(躁急)을 더했고 희로(喜怒)가 불상(不常)이었다. 63월 초에 이르자 겨우 반 년에 이르렀으니 단독(丹毒)으로 죽었다. 선종(宣宗)이 즉위하자 불사(佛寺)는 다시 3배의 많음을 더했다.

'천태사교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 12  (0) 2020.10.11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 11  (0) 2020.10.11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 9  (0) 2020.10.11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 8  (0) 2020.10.11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 7  (0) 2020.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