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二一】讓禪師因*馬祖多習坐禪 一日將塼於庵前磨 祖問 磨塼作什麽 師曰 磨作鏡 祖曰 磨塼豈得作鏡 師曰 磨塼旣不成鏡 坐禪豈得成佛 祖曰 如何卽是 師曰 *比牛*駕車 車若不行 打牛卽是 打車卽是
保寧勇頌 死馬醫來無用處 車牛腦後更加鞭 皮穿肉綻還知不 任重應須*角力全
法眞一頌 坐禪求佛轉成賖 車若不行休打車 語默施爲常在定 但令癡坐卽偏邪
松源頌 平生心膽向人傾 過犯彌天已不輕 帶累馬師*胡亂後 至今錯認定盤星
悅齋居士頌 打車打牛何者是 摸着*耳埵失却鼻 更通一線與君看 文殊菩薩名慶喜
知非子頌 終日坐禪 須彌不動 *霜磬引廻 一場懵懂 明眼人見 好箇*漆桶 打牛打車*駈雙輪 馬駒踏殺天下人
眞淨文上堂云 祖師西來 敎外別傳 所謂如牛駕車 車若不行 打車卽是 打牛卽是 大衆 人各有一頭水牯牛 駕箇車子 卽是毛色有異 心相不同 有赤者白者靑者黃者黑者 如今莫待下痛鞭 各自拽箇車子 歸堂喫茶去
大慧杲普說擧此話云 而今禪和家 理會道 牛喩心車喩法 但只明心法自明矣 但只打牛車自行矣 且喜沒交涉 若伊麽 馬祖驢年也不能得悟去
●第一二一則; 五燈會元三南嶽懷讓 開元(713-740)中有沙門道一(卽馬祖也) 在衡嶽山常習坐禪 師知是法器 往問曰 大德坐禪圖甚麽 一曰 圖作佛 師乃取一甎 於彼庵前石上磨 一曰 磨作甚麽 師曰 磨作鏡 一曰 磨甎豈得成鏡邪 師曰 磨甎旣不成鏡 坐禪豈得作佛 一曰 如何卽是 師曰 如牛駕車 車若不行 打車卽是 打牛卽是
●馬祖; 馬祖道一 見下第一五六則
●比; 諸禪錄皆作如
●比牛駕車; 宗鏡錄五云 如西天尼乾子 五熱炙身 生大邪見 佛弟子謂之言曰 善男子 如世人駕牛車於路 欲速有所至 打牛卽是 打車卽是 尼乾聞之 勃然作色 佛弟子曰 善男子 牛喩於心 車喩於身 何得苦身而不修心 不用炙身 應當炙心
●駕車; 駕 駕駛 如駕車 駕船 駕飛機 正字通 駕 馳也
●角力; 角 競 競爭 比試
●胡亂; 胡 任意亂來 胡亂卽亂雜之義 如不依位次而坐則稱胡亂坐 妄加唱說言道 謂胡說 胡道 或胡說亂道
●耳埵; 埵 物體下垂的樣子 耳下垂貌 耳埵 耳垂也
●霜磬; 霜 嚴厲 如霜氣 霜典 霜威
●漆桶; 黑漆桶也 譬無明之堅厚也 對愚暗不悟者的詈稱 ▲碧巖錄第一則 與他打破漆桶 同種電鈔 棱伽云 人曠劫無明 結習膠固 恰如貯漆之桶 黑洞洞地不明也
●駈; 同驅
【一二一】 회양선사가, 마조(*馬祖)가 다분히 좌선을 익힘으로 인해 어느 날 벽돌을 가지고 암자 앞에서 갈았다. 마조가 묻되 벽돌을 갈아(磨塼) 무엇하시렵니까. 스님이 가로되 갈아서 거울을 만든다. 마조가 가로되 벽돌을 갈아서 어찌 거울을 만듦을 얻겠습니까. 스님이 가로되 벽돌을 갈아 이미 거울을 이룸을 얻지 못하거늘 좌선하여 어찌 성불함을 얻겠는가. 마조가 가로되 어떻게 해야 곧 옳습니까. 스님이 가로되 비유하자면 소가 수레를 부리는데(*比牛*駕車) 수레가 만약 가지 않으면 소를 때림이 곧 옳으냐, 수레를 때림이 곧 옳으냐.
보녕용(保寧勇)이 송하되 사마(死馬)는 병을 고쳐도 쓸 곳이 없나니/ 거우(車牛)의 뇌후(腦後)에 다시 채찍을 가하라/ 가죽이 뚫어지고 살갗이 터져야 도리어 알겠는가/ 무거운 짐을 맡기려면 꼭 각력(*角力)이 완전해야 한다.
법진일(法眞一)이 송하되 좌선하여 부처를 구하면 더욱 멂을 이루나니/ 수레가 만약 가지 않는다면 수레를 때림을 그쳐라/ 어묵(語默)하고 시위(施爲)하면서 늘 정(定)에 있거늘/ 단지 치좌(癡坐)케 하면 곧 편사(偏邪)다.
송원(松源)이 송하되 평생의 심담(心膽)을 남을 향해 기울였건만/ 과실을 범함이 하늘에 두루해 이미 가볍지 않다/ 마사(馬師; 마조)에게 누를 끼쳐 호란(*胡亂)한 후에/ 지금토록 정반성(定盤星)을 착인(錯認)했더라.
열재거사(悅齋居士)가 송하되 수레를 때리고 소를 때리매 어느 것이 옳으냐/ 귓불(*耳埵)을 더듬다가(摸着) 콧구멍을 잃어버렸다/ 다시 일선(一線)을 통해 그대에게 주어 보게 하나니/ 문수보살의 이름이 경희(慶喜)니라.
지비자(知非子)가 송하되 종일 좌선하면서/ 수미(須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상경(*霜磬)이 당겨 돌이키매/ 한바탕의 몽동(懵懂)이다/ 명안인(明眼人)이 보면/ 호개(好箇)의 칠통(*漆桶)이다/ 소를 때리고 수레를 때리면서 쌍륜(雙輪)을 몰아가나니(*駈)/ 마구(馬駒; 망아지)가 천하인을 밟아 죽인다.
진정문(眞淨文)이 상당하여 이르되 조사가 서래하여 교외에 별전했으니 이른 바 소가 수레를 부림과 같다. 수레가 만약 가지 않을진대 수레를 때림이 곧 옳으냐, 소를 때림이 곧 옳으냐. 대중이여, 사람이 각자 한 마리(頭; 量詞)의 수고우(水牯牛; 물소)가 있어 저(箇) 거자(車子; 수레. 子는 조사)를 부리는데 곧 이 모색(毛色)이 다름이 있고 심상(心相)이 한가지가 아니라서 적자(赤者), 백자(白者), 청자(靑者), 황자(黃者), 흑자(黑者)가 있다. 여금에 통렬한 채찍 내림을 기다리지 말고 각자 저(箇) 수레를 끌고서 귀당(歸堂)하여 차를 마셔라.
대혜고(大慧杲)가 보설(普說)에 차화를 들고 이르되 이금(而今; 여금)의 선화가(禪和家)가 이회(理會)하여 말하되 소는 마음에 비유하고 수레는 법에 비유하나니 단지 마음을 밝히면 법이 저절로 밝아진다. 단지 소를 때리면 수레도 저절로 간다 하거니와 다만 교섭 없음을 기뻐한다. 만약 이러하다면 마조가 여년(驢年)일지라도 능히 득오(得悟)하지 못했으리라.
●第一二一則; 오등회원3 남악회양. 개원(713-740) 중 사문 도일(道一; 즉 마조임)이 있어 형악산(衡嶽山)에 있으면서 늘 좌선을 익혔다. 스님이 이 법기임을 알고 가서 물어 가로되 대덕(大德)은 좌선하여 무엇을 도모하는가. 도일이 가로되 작불(作佛)을 도모합니다. 스님이 이에 하나의 벽돌을 취하여 그 암자 앞의 돌 위에 갈았다. 도일이 가로되 갈아서 무엇하시려고요. 스님이 가로되 갈아서 거울을 만든다. 도일이 가로되 벽돌을 갈아서 어찌 거울을 이룸을 얻겠습니까. 스님이 가로되 벽돌을 갈아서 이미 거울을 이루지 못한다면 좌선해서 어찌 작불(作佛)을 얻겠는가. 도일이 가로되 어찌해야 곧 옳습니까. 스님이 가로되 소로 수레를 모는데 수레가 만약 가지 않을 것 같으면 수레를 때림이 곧 옳으냐, 소를 때려야 곧 옳으냐.
●馬祖; 마조도일(馬祖道一)이니 아래 제156칙을 보라.
●比; 여러 선록에 다 여(如)로 지었음.
●比牛駕車; 종경록5에 이르되 예컨대(如) 서천의 니건자(尼乾子)가 오열(五熱)로 몸을 구우면서(炙身) 큰 사견(邪見)을 내자 불제자가 그에게 일러 말해 가로되 선남자여, 예컨대 세인(世人)이 길에서 우거(牛車)를 부리는데 속히 소지(所至)가 있으려고 한다면 소를 때림이 곧 옳으냐, 수레를 때림이 곧 옳으냐. 니건이 이를 듣자 발연(勃然; 발끈하다)하며 작색(作色)하자 불제자가 가로되 선남자여, 소는 마음에 비유하고 수레는 몸뚱이에 비유한다. 어찌 몸을 괴롭게 하고 수심(修心)하지 않음을 얻는가. 자신(炙身)을 쓰지 말고 응당 자심(炙心)해야 한다.
●駕車; 가(駕)는 부리어 달림(駕駛)이니 예컨대(如) 수레를 부림ㆍ배를 부림ㆍ비행기(飛機)를 부림. 정자통 가(駕) 달림이다(馳).
●角力; 각(角)은 경(競), 경쟁(競爭), 비시(比試).
●胡亂; 호(胡)는 임의(任意)로 어지럽게 옴(亂來)이니 호란은 곧 난잡(亂雜)의 뜻. 예컨대(如) 위차(位次)에 의하지 않고 앉음을 곧 호란좌(胡亂坐)라 일컫고 망령되이 창설(唱說)을 가하여 말함을 일러 호설(胡說), 호도(胡道)라 하고 혹은 호설난도(胡說亂道)라 함.
●耳埵; 타(埵)는 물체가 아래로 드리운 양자니 귀가 아래로 드리운 모양임. 이타(耳埵)는 이수(耳垂; 귓불)임.
●霜磬; 상(霜)은 엄려(嚴厲)니 상기(霜氣)ㆍ상전(霜典)ㆍ상위(霜威)와 같음.
●漆桶; 흑칠통이니 무명(無明)의 견후(堅厚)에 비유함. 우매하여 깨닫지 못하는 자에 대한 이칭(詈稱; 욕하는 말). ▲벽암록 제1칙. 그에게 칠통을 타파해 주었다. 동 종전초 릉가(棱伽)가 이르되 사람이 광겁(曠劫)의 무명으로 결습(結習)이 아교처럼 견고함이 칠을 저장하는 통과 흡여(恰如)하여 흑통통지(黑洞洞地; 黑暗)라 밝지 못하다.
●駈; 구(驅)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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