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염송집주(5권)

선문염송집 권4 제131칙(주석 한글)

태화당 2021. 10. 4. 07:22

第一三一則; 차화는 명각선사어록3 거화문(擧話文)에 나옴. 전등록7 염관제안(鹽官齊安). 중이 묻되 무엇이 이 본신로사나불(本身盧舍那佛)입니까. 스님이 이르되 나에게 저(那箇) 동병(銅缾)을 가져다 주어라. 중이 곧 정병(淨缾)을 취해 왔다. 스님이 이르되 도리어 본처(本處)로 보내어 안치하라. 그 중이 본처로 송병(送缾)한 다음 돌아와서 전어(前語)로 재징(再徵; 다시 責問)했다. 스님이 이르되 고불이 지나가신 지 오래되었다.

盧舍那; 비로사나(毘盧舍那)니 또 비로자나(毘盧遮那)로 지음. 불타의 진신의 존칭임. 위 제2칙 비로(毗盧)를 보라.

過淨缾; ()는 급여임. 통아(通雅) ()를 일컬어 과()라 한다. 진주(辰州) 사람들이 이르기를 물건을 타인에게 줌을 가로되 과()라 한다.

淨缾; 정병(淨甁)과 같음. ()은 병()과 같음. 범어 군지(軍遲; kuṇḍkā)는 또 군치가(捃稚迦)로 지으며 여기에선 이르되 병()이니 정촉(淨觸) 2병이 있음. 정병의 물은 깨끗한 손(淨手)을 씻고 촉병의 물은 더러운 손(觸手)을 씻음. 또 명칭이 조병(澡甁). 석씨요람상. 정병(淨甁) 범어 군지(軍遲)는 여기에선 이르되 병()이다. 늘 물을 저장하고 수신용(隨身用)이다. 남해기귀내법전1. 무릇 물은 정촉(淨觸)으로 나누고 병도 2()가 있다. 정자(淨者)는 모두 혹 와자(瓦瓷)를 쓰고 촉자(觸者)는 동철(銅鐵)을 겸함에 맡긴다. ()은 비시(非時)의 음용(飮用)을 타산(打算; )하고 촉()은 곧 변리(便利; 대소변)에 쓰는 것이다. ()은 곧 정수(淨手)라야 비로소 가지고 반드시 정처(淨處)에 안착(安著)함을 쓴다. ()은 곧 촉수(觸手)로 그대로 가지고 가히 촉처(觸處)에 안치한다. 오직 이 정병(淨甁) 및 신정기(新淨器)에 담긴 바의 물은 비시(非時)에 합당히 마신다.

古佛; 여기에선 로사나불을 가리킴.

涅槃山; 불전 중 늘 산을 열반에 비유하고 또 하()를 생사에 비유하는지라 생사하(生死河)ㆍ열반산(涅槃山)의 명칭이 있음.

鳥之行空下; 절노인천기직주천동각화상송고(絶老人天奇直註天童覺和尙頌古; 二卷 明 本瑞直註) (). 새가 허공을 다니고 고기가 물에 있으면서 강호(江湖)를 상망(相忘)하고 운천(雲天)에서 득지(得志)한다. 새가 허공에서 득지(得志)하지만 허공을 알지 못하고 고기가 물에서 득지하지만 물을 알지 못하고 사람이 날마다 불력(佛力)을 승수(承受)하지만 불()을 알지 못한다.

擬心; 유예(猶豫). 지의(遲疑; 의심하고 주저함). 사려(思慮).

迷津; 미망(迷妄)의 나루터니 곧 3()6()의 중생의 경계를 가리킴.

隍城; 조정사원4. 황성(隍城) 상은 호광절(湖光切; )이니 성지(城池). 유수(有水)를 가로되 지()며 무수(無水)를 가로되 황().

金剛眼; 위 제110칙 가라안(迦羅眼)을 보라.

也較潙山半月程; ()는 차(). 염송설화에 이르되 직요운운(直饒云云)이란 것은 위산(潙山)이 정병(淨甁)을 차서 넘어뜨림이니 곧 비록 국사의 낙처를 지득(知得)했지만 차서 넘어뜨림을 알지 못함이다. 위산어록(潙山語錄). 백장이 이날 밤에 스님을 불러 입실케 하고는 부촉해 이르되 나의 화연(化緣)은 여기에 있으니 위산의 승경(勝境)은 네가 마땅히 거처하면서 나의 종()을 잇고 널리 후학을 제도하라. 화림(華林)이 이를 듣고서 이르되 모갑이 욕되게 상수(上首)에 거처하거늘 전좌(典座)가 어찌 주지함을 얻습니까. 백장이 이르되 만약 능히 대중을 상대해 격식을 벗어난 한 말을 내린다면 마땅히 주지를 주리라. 곧 정병(淨甁)을 가리키며 물어 이르되 정병이라고 불러 짓지 않으면 너는 무엇이라고 불러 짓겠는가. 화림이 이르되 가히 목돌(木?)이라고 불러 짓지 못할 것입니다. 백장이 이에 스님에게 묻자 스님이 정병을 차서 거꾸러뜨리고 곧 나갔다.

不徹; 1. 정지하지 않음ㆍ마치지 않음에 상당함. 2. 불급(不及)에 상당함. 여기에선 1을 가리킴.

大忙生; 태망생(太忙生)과 같음. ()은 조사.

宗猷; 선법(禪法)이니 유()는 도().

心猿; 마음의 산동(散動)을 원후(猿猴; 원숭이)에 비유하는지라 고로 가로되 심원(心猿). 유교경(遺敎經; 佛垂般涅槃略說敎誡經 一卷 後秦 鳩摩羅什譯). 5()이란 것은 심()이 그 주인이다. 이런 고로 너희 등은 당호(當好; 응당 좋이) 제심(制心)하라. ()의 가외(可畏)는 독사ㆍ악수(惡獸)ㆍ원적(怨賊; 원수가 되는 賊徒)ㆍ대화(大火)보다 심하며 월일(越逸; 초월해 뛰어남)하여 족히 비유하지 못한다. 움직이면 더욱 경조(輕躁; 경솔하고 躁急)하고 단지 꿀만 보고 깊은 구덩은 보지 않나니 비유컨대 갈고리가 없는 미친 코끼리와 같다. 원숭이(猿猴)가 나무를 얻으면 등약(騰躍; 뛰어오름)하고 도척(跳躑; 아래 위로 도약함)하므로 가히 금제(禁制)하기 어려우니 응당 급히 그것을 꺾어 방일(放逸)함이 없게 하라. 이 심을 방종(放縱)하는 자는 사람의 선사(善事)를 상실하거니와 한 곳을 억제하면 판비하지 않는 일이 없다. 이런 고로 비구는 응당 부지런히 정진하며 그 마음을 절복(折伏)해야 한다. 열반경29. 중생의 심성은 마치 미후(獼猴; 원숭이)와 같나니 미후의 심성은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취한다. 중생의 심성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을 취착(取著)하면서 잠시도 멈출 때가 없다. 연등회요30. 승무명(僧亡名) 식심명(息心銘). 식마(識馬)는 쉽게 날뛰고 심원(心猿)은 억제하기 어렵다.

落草; 출초(出草)의 대칭이 됨. ()는 세간의 속인 무리에 비유함. 이르자면 신분과 지위를 낮추는 선림 중의 교화 방법임. 교화할 자는 범우(凡愚)의 중생 중에 있으므로 자기의 신분을 낮춰 범우의 오탁(汚濁)의 현실을 따라 화도(化導)를 행함을 낙초라고 일컬으며 또는 향하문(向下門)이라 일컬으며 또 가로되 입초(入草). 또 낮은 경지에 타락한 사람을 곧 낙초한(落草漢)이라고 일컬음. 곧 경멸하는 말임. 낙초담(落草談)은 곧 제2()에 떨어지는 얘기를 가리킴. 혹은 현세의 정황을 따라 고구(苦口)의 노파심으로 일반인을 교화하는 설을 가리킴.

得之於心; 조정사원1. 청라인연(靑蘿夤緣) 말이 충국사비(忠國師碑)에 나오나니 곧 초당사문(草堂沙門) 비석(飛錫)이 지었다. 그 사이의 몇 말을 총림에서 다() 많이들 거창(擧唱)한다. 예컨대() 청라(靑蘿)는 인연(夤緣; 攀附하여 위로 올라감)하여 바로 한송(寒松)의 꼭대기에 오르고 백운은 담저(淡泞; 는 맑을 저)히 태허(大虛; . 큰 허공) 중에 출몰한다. 만법이 본래 고요하건만 사람이 스스로 시끄럽게 한다. ()을 논하자면 짐적(朕迹)을 두지 않지만 점()을 말하자면 상()을 돌이켜 도에 합한다. 마음에서 이를 얻으면 이란(伊蘭)이 전단(栴檀)의 수목(樹木)이 되고 뜻()에서 이를 잃으면 감로가 곧 질려(蒺藜; 남가새)의 동산이다. 백운의 지조(志操)가 고상하고 청송의 절개가 준험(峻險)하며 오직 황제의 스승이면서 법인(法印)을 친전(親傳)하였다. 앎이 깊고 모습이 고아(古雅)하며 말씀은 험준하고 이치는 화순(和順)하니 정문(定門)이 있지 않다면 장차 어떻게 연돈(演頓)하겠는가. 이것이 다 초당비석(草堂飛錫)의 말이다. 요즘 총림에서 말하는 자가 왕왕 국사의 말이라고 가리켜 짓거니와 대개 간심(看尋)의 소솔(疏率)을 말미암음이거늘 또 어찌 능히 설두의 지취를 밝히겠는가.

伊蘭; <> eraṇḍa. 혜림음의25. 이란(伊蘭) 구족하면 응당 이르되 이나발라(伊那拔羅)니 여기에선 이르되 극취목(極臭木)이다.

蒺蔾; 또 질려(蒺藜)로 지음. 이아(爾雅) (; 가시나무)는 질려(蒺藜; 남가새). 곽박주(郭璞注) 땅에 퍼져 등굴로 자란다. 가는 잎이며 씨에 삼각이 있어 사람을 찌른다. 육도(六韜) 4편 호도(虎韜). 좁은 길과 작은 길에 철질려(鐵蒺藜)를 설치했는데 가시의 높이는 4()이며 너비는 8()이다. 1,200(; 양사)였으며 보병과 기병을 패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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