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七六】 종남산(*終南山) 유정선사(*惟政禪師)가, 당문종(*唐文宗)이 합리(蛤蜊; 백합. 대합)를 즐겨 먹었는데 어느 날 어찬(御饌) 가운데 열어도 벌어지지 않는 것이 있는지라 제(帝)가 기이하게 여겨 곧 분향하고 기도하매 이에 열렸고 갑자기 보살의 형의(形儀)로 변화했으며 범상(*梵相)을 구족한지라 스님을 불러 물음으로 인해 스님이 가로되 신이 듣기로(*臣聞) 응당 이 몸으로써 득도할 자(*應以此身得度者)에겐 곧 이 몸을 나타내어 설법한다 했습니다. 제(帝)가 가로되 보살의 몸은 이미 나타났거니와 다만 설법을 듣지 못했습니다. 스님이 가로되 폐하가 이를 보시매 상(常)입니까 비상(非常)입니까. 믿습니까 믿지 않습니까. 제(帝)가 가로되 희기(希奇)한 일이며 짐이 깊이 믿습니다. 스님이 가로되 폐하는 이미 설법을 들어 마쳤습니다. 제(帝)가 크게 기뻐했다. 천하의 사원에 칙령하여 각기 관음상을 세우게 했다.
지비자(知非子)가 송하되 현신(現身)하여 설법하며 자비를 내려/ 종남사(終南師; 惟政)에게 1구로 정기(呈機)했다/ 대당천자가 휑하게 깨달으니/ 질뢰(疾雷; 빠른 우레)가 파칩(破蟄; 겨울잠을 깨뜨림)하여 면룡(眠龍)이 날았다.
●第一七六則; 전등록4 종남산 유정선사(惟政禪師). 당 대화(大和; 827-835) 중 문종(文宗)이 합리(蛤蜊; 백합. 대합)를 즐겨 먹었는데 연해(沿海)의 관리(官吏)가 선시(先時; 시일에 앞서)에 갈마들며 진상했고 사람들이 또한 노지(勞止; 勞苦)했다. 어느 날 어찬(御饌) 가운데 열어도 벌어지지 않는 것이 있는지라 황제가 그것을 기이하게 여겨 곧 분향(焚香)하고 기도하매 갑자기 보살의 형의(形儀)로 변화했으며 범상(梵相)을 구족(具足)했다. 곧 금속단향합(金粟檀香合; 盒子)에 저장하고 아름다운 비단으로 덮어 흥선사(興善寺)에 하사(下賜)하여 뭇 승인들로 하여금 첨례(瞻禮)케 했으며 인해 군신(群臣)에게 묻되 이것이 무슨 상서(祥瑞)인가 하였다. 혹 말하기를 태일산(太一山)의 유정선사(惟政禪師; 崇山普寂의 法嗣니 神秀下二世)가 불법을 깊이 밝혔으며 박문강식(博聞彊識; 널리 듣고 잘 알다)합니다. 황제가 곧 불러 이르게 하여 그 일을 물었다. 스님이 가로되 신(臣)이 듣기로 사물이 헛되이 응함이 없다 했으니 이는 곧 폐하의 신심(信心)을 계시(啓示)함입니다. 고로 계경(契經)에 이르되 응당 이 몸으로써 득도할 자에겐 곧 이 몸을 나타내어 설법한다(應以此身得度者 卽現此身而爲說法) 했습니다. 황제가 가로되 보살의 몸은 이미 나타났거니와 다만 설법을 듣지 못했습니다. 스님이 가로되 폐하께서 이를 보매 상(常)입니까, 비상(非常)이 됩니까. 믿습니까 믿지 않습니까. 황제가 가로되 희기(希奇)한 일이며 짐(朕)이 깊이 믿습니다. 스님이 가로되 폐하께선 이미 설법을 들어 마쳤습니다. 때에 황정(皇情)이 열예(悅豫; 喜悅)하여 미증유를 얻었고 조칙으로 천하 사원에 각기 관음상을 세우게 했다. 답이 수휴(殊休; 특수히 아름다움)했기 때문에 인하여 스님을 내도량에 머물게 했는데 여러 차례 고별하며 입산하려고 하자 다시 조령(詔令)으로 성수사에 머물렀다. 무종(武宗)이 즉위함에 이르러 스님이 홀연히 종남산에 들어가 은거했는데 사람이 그 연고를 묻자 스님이 가로되 나는 원수(仇)를 피한다. 후에 산사(山舍)에서 마쳤고 나이는 87이다.
●終南山; 섬서 장안현 서방 약 29㎞에 위치함. 동쪽 남전(藍田)에서 일어나 서쪽 미현(郿縣)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8백여 리에 뻗쳤으니 진령산맥(秦嶺山脈)의 일부분이 됨. 또 명칭이 중남산ㆍ태을산ㆍ지폐산이니 약칭이 남산(南山). 당대 화엄종 제1조 두순(杜順; 法順)이 종남산에 은거함으로 인해 세칭이 종남법순(終南法順)이며 지엄(智儼)이 남산 지상사(至相寺)에 거주하며 화엄종을 홍양(弘揚)한지라 세칭이 지상대사(至相大師)며 정토종의 선도(善導)가 남산 오진사(悟眞寺)에 거주하며 염불로 수행한지라 세칭이 종남대사(終南大師)며 율종의 도선(道宣)이 남산 풍덕사(豐德寺)에 거주하며 사분율종(四分律宗)을 홍양한지라 그 계통을 곧 일컬어 남산율종(南山律宗)이라 함 [자은사삼장법사전10. 개원석교록8. 장안지9, 동12. 고금도서집성산천전제65].
●惟政; (757-843) 당대승. 또한 가로되 항정(恒政)이니 평원(지금 산동에 속함) 주씨. 본주(本州) 연성사 전징에게 나아가 출가했고 등계(登戒)한 다음 숭산 보적(普寂; 神秀를 이었음)에게 도를 물었고 해결한 다음 의심이 없었고 태을산에 탁석(卓錫)하자 학인이 도풍을 듣고 개미처럼 모였음. 대화(大和) 5년(831) 문종이 관음상을 얻었는데 유정을 불러 문답하고 칭지(稱旨)하자 칙명으로 천하 사원에 관음상을 세우게 하여 대답이 특수히 아름다운지라 조령(詔令)으로 성수사에 거주하게 했음. 후에 고별하고 종남산에 들어갔음 [송고승전11. 전등록4. 육학승전7].
●唐文宗; (809-840. 재위 826-840) 즉 이앙이니 목종의 차자. 재위 14년. 태화 원년(827) 탄절(誕節)에 비서감 백거이에게 조칙해 안국사 대사 의림과 상청궁 도사 양홍원을 초인(招引)하게 하고 인덕전에서 3교를 담론하게 했음. 5년 조칙으로 천하 사원에 모두 관음성상을 세우게 했음. 개성 3년(868) 징관이 입적하자 특별히 3일 동안 철조(輟朝; 朝見을 거둠)하고 중신이 호소(縞素; 흰색. 喪服을 가리킴)했으며 전신을 받들어 종남산에 탑을 세웠음 [불법금탕편7. 구당서17. 불조통기42].
●梵相; 범어로 이르되 범마(梵摩; 梵 brahman)ㆍ바라하마(婆羅賀摩)ㆍ발람마(跋濫摩)는 여기에선 이르되 적정ㆍ청정ㆍ이욕(離欲)이니 범상은 곧 청정한 형상.
●臣聞; 대송승사략하(大宋僧史略下)에 이르되 남제(南齊) 때에 이르러 법헌(法獻)과 현창(玄暢) 두 사람이 나누어 승정(僧正)이 되었는데 황제를 대면해 논하면서 이름을 일컫고 앉지 않았다. 후에 중흥사 승 종계(鐘啓)가 답하면서 빈도(貧道)라고 일컬음으로 인해 제(帝)가 이를 혐의했다. 왕검(王儉)에게 물어 가로되 선배 사문이 제왕과 함께 얘기하면서 무어라고 호칭했는가, 정전(正殿)에서 도리어 앉았는가. 왕검이 대답해 가로되 한(漢)나라와 위(魏)나라는 불법이 흥하지 않아서 기전(紀傳)을 보지 못했습니다. 위국(僞國; 五胡十六國을 가리킴)이 조금씩 흥성하면서 다 빈도(貧道)라고 일컬얻고 또한 미리 앉았다고 들었습니다. 및 진(晉)나라 초에도 또한 그러했습니다. 중대(中代)에 유빙과 환현 등이 있어 다 사문으로 하여금 다 절하게 하려 했으나 조정의 의론이 분운(紛紜)하여 일이 다 그쳐서 잠잠해 졌습니다. 송(宋)의 중조(中朝)에 또한 절하게 하려 했으나 이윽고 또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이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다분히 미리 앉고 빈도라고 일컬었습니다. 제(帝)가 가로되 창(暢)과 헌(獻) 두 승인은 도업이 이와 같았지만 오히려 스스로 이름을 일컫거늘 하물며 다시 나머지랴. 읍배(揖拜)케 함은 곧 너무 심하지만 이름을 일컬음은 또한 혐오가 없다. 이로 말미암아 사문이 다 제왕에게 이름을 일컬었으니 헌ㆍ창이 시작이 된다. 근조(近朝)의 금대(今代)에 도는 경박하고 인심이 어그러져 표장(表章)을 일컬어 이르면서 일컫기를 신(臣)이 머리를 조아린다 하거니와 무릇 머리를 조아린다는 것은 예배며 신이라고 일컬음은 낮춤의 지극함이다. 그 시작한 바를 찾자면 당나라 때를 벗어나지 않는다. 수나라 대흥선사 번경사문(翻經沙門)인 법경(法經) 등이 중경목록(衆經目錄)을 진상하면서 아직 신이라고 일컫지 않고 다만 이르기를 중사문(衆沙門) 법경 등이 황제대단월에게 근백(謹白)합니다 했다. 후주(後周)의 석담적(釋曇積)이 사태표(沙汰表)로 간(諫)하면서도 또한 오직 이름만 일컬으며 황제대단월에게 아룁니다 했고 후에 빈도라고 일컬었다. 이에 후주(後周)의 석씨(釋氏)인 임도림(任道林)이 무제(武帝)의 조서를 대면해 가로되 또 신이라고 일컬었지만 그 시절을 상고하건대 도림은 형체와 옷이 이미 변했으니 마치 불도징(佛圖澄)의 법손(法孫)인 왕명광(王明廣)과 한가지다. 승인인 도림이 되었을 것 같으면 반드시 신이라고 일컫지 않았으리라. 당나라 서명사 사문 현칙(玄則)이 선림묘기(禪林妙記)를 올리면서 후서(後序) 중에 다만 승등(僧等)이란 2자를 일컬었다 …… 이로 말미암아 이를 알지니 당나라의 3엽(葉; 시대 세대)에는 아직 신이라고 일컫지 않았다. 숙종 상원 원년(760) 3월 8일 어찰(御札)을 내려 중사(中使) 유초강을 보내어 청하되 조계 6조가 전한 바의 의발을 내전에 들게 했다. 아울러 제자인 영도(令韜)에게도 조칙했는데 영도가 연로(年老)하다며 표를 올려 사양했고 제자인 명상(明象)을 보냈는데 표를 올리면서 일컫기를 신(臣)이라 했다. 사전(史傳)을 보매 이로부터 비롯했다. 혹은 가로되 법림(法琳; 572-640)이 표를 올려 도사(道士)가 승려 위에 거처함을 논하면서 이르되 신(臣)의 나이가 황혼을 탐(乘)에 다닥치면서 비로소 태평의 시대를 맞았습니다 …… 이 설에 의거하면 곧 법림이 신이라 일컬었으니 또 시초에 있음이다.
●應以此身得度者;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 가로되 응당 불신(佛身)을 써야(以) 득도(得度)할 자에겐 관세음보살이 곧 불신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응당 벽지불신(辟支佛身)을 써야 득도할 자에겐 곧 벽지불신을 나타애어 설법하며 응당 성문신(聲聞身)을 써야 득도할 자에겐 곧 성문신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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