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염송집주(30권)

선문염송집 권26 제1207칙

태화당 2022. 3. 18. 07:23

一二漳州羅漢院*桂琛禪師 問脩山主 甚處來 脩云 南方來 師云 南方近日佛法如何 脩云 商量浩浩 師云 爭如我這裏 種田*愽飯喫 脩云 爭奈三界何 師云 你喚什麽作三界 有本云 其僧言下有省

 

天童覺頌 宗說般般盡强爲 流傳耳口便*支離 種田愽飯家常事 不是飽參人不知

又頌 叅飽明知無所求 *子房終不貴封侯 忘機歸去同魚鳥 *濯足滄浪煙水秋

上方岳拈 地藏和尙 秪解種田 不解收禾 這僧三千里外行脚

雲峰悅拈 會麽 揷田愽飯喫 言中誰辨的 午後打齋鍾 金剛曾失色

大潙喆拈 淸貧長樂 濁富多憂

天童覺送*監收 上堂云 *一日不作 一日不食 歇者無心穫者力 分明秪个是家風 會得種田愽飯喫 記得 地藏問僧什麽處來 喚什麽作三界 師云 唯心唯識 平出平入 *金刀之齊 玉尺之直 你喚什麽作三界 眞个不曾遺顆粒

圓通機上堂擧此話云 大衆 者僧 當時但向他道 *終日忙忙 那事* 直敎地藏老漢 上無衝天之計 下無入地之謀 這僧旣進語不得 地藏亦乃休去 致令千古之下 掛人唇齒 盡作平常商量 山僧若作地藏 當時却向他道 雪後始知松柏操 歲寒方見丈夫心

靈源淸上堂擧此話云 種田愽飯喫 佛法正商量 言下超三界 靈機發妙光 妙光發無處藏 閑者閑兮忙者忙 因知異類中*行李 白牯狸奴勝法王 且道 白牯狸奴 有什麽長處 便能勝得法王 會麽 報恩深有地 成事了無功

智海淸謝監收上堂擧此話 愽飯喫 師云 作家宗師 天然猶在 頌曰 揷田愽飯喫 農功大驀直 家家鼓腹自謳謌 蠢蠢誰知有帝力 君不見 *周公*成王*合穗呈祥 *大戊**兮拱把修德 噫 祖父田園一片平 子孫好好勤*耕穡

白雲昺上堂擧此話云 魚行水濁 鳥飛毛落 若能荷負得行 可謂吾宗不墜 還會麽 種田愽飯喫 言中須辨的 日午打三更 金剛曾失色 當陽不覆藏 日用承誰力 忙忙塵世人 幾个知恩德

 

第一二七則; 此話出宏智錄二擧話文 聯燈會要二十六羅漢桂琛 師插田次 見僧乃問 甚處來 云 南方 師云 南方近日佛法如何 云 商量浩浩地 師云 爭如我這裏種田博飯喫 云 爭柰三界何 師云 儞喚甚麼作三界 僧有省

桂琛; (867-928) 五代僧 常山(位於浙江)人 俗姓李 夙有出塵之志 依萬歲寺無相大師剃髮受戒 專學毘尼 然以持戒束身非解脫之道 乃轉志遊方 參訪南宗諸師 先謁雪峰義存 參訊禪要 惜無所見 至福州玄沙師備座下 得一言啓發 廓爾脫落衆惑 時漳州州牧於閩城西方石山建地藏院 請師演法 駐錫十八年 學徒集者二百餘人 後住漳州羅漢院 大闡玄要 南北參徒臻湊 契機開悟者不知其數 世人尊以羅漢桂琛之號 唐天成三年秋示疾 安坐數日告終 享年六十二 僧臘四十 諡號眞應禪師 弟子有淸涼文益 龍濟紹修等多數 [五燈會元八 宋高僧傳十三]

愽飯; 愽 同博 猶換也

支離; 不相接續之意 [楞嚴經正脉疏六]

子房; 又稱張子房 張良字子房 見上第四五三則張良

濯足滄浪; 水經註疏云 蓋漢水至於楚地 則其名爲滄浪之水也 希麟音義十 悼屈原 屈 九勿反 姓屈 名原 字典平 楚爲三閭大夫 王甚重之 爲靳尙等姤其能 共讚毁之 乃被流放 後遊於湘潭 行吟澤畔 著離騷云 滄浪之水淸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 可以濯吾足也

監收; 卽管理寺院所有地之收入及租稅等雜務之職稱 設立於元代 在莊主管轄之下 職權相當於知庫 然其弊甚多 按百丈淸規下諸莊監收條 古規初無莊主監收 近代方立此名 此名一立 其弊百出 爲住持私任匪人者有之 因利曲徇者有之 爲勤舊執事人連年佔充者有之 托勢求充者有之 樹黨分充者有之 角力爭充者有之 蠹公害私不可枚擧 雖欲匡救 未如之何 [備用淸規六 禪林寶訓一 象器箋職位類]

一日不作一日不食; 禪林寶訓音義 百丈寺 在南嶽之絶頂也 大智禪師 每日力作以償其供 有勸止者 則曰 我無德以勞人 衆不忍而藏其作具 徧索不得 遂不食 故有一日不作一日不食之語 流播寰宇 先德率身多如此矣

金刀之齊玉尺之直; 拈頌說話曰 金刀云云者 齊之直之而平無等差 亦有裁短之義

終日忙忙那事無妨; 金剛經註(一卷 宋 道川頌竝著語) 以是義非法 水至成渠 頌曰 終日忙忙那事無妨 不求解脫不樂天堂 但能一念歸無念 高步毗盧頂上行

; 底本作防 諸禪錄皆作妨

行李; 含有多義 此指悟道者的機用實踐

周公; 姬姓 諱旦 周文王姬昌第四子 周武王姬發的弟弟 周武王九年 東伐至盟津 周公輔行 十一年 伐紂 至牧野 周公佐武王 作牧誓 破殷 入商宮 已殺紂 封紂子武庚祿父 使管叔蔡叔傅之 以續殷祀 遍封功臣同姓戚者 封周公旦於少昊之虛曲阜 是爲魯公 周公不就封 留佐武王 其後武王旣崩 成王少 輔翼成王 管 蔡 武庚等反 周公乃奉成王命 興師東伐 作大誥 遂誅管叔 殺武庚 放蔡叔 成王長 能聽政 於是周公乃還政於成王 周公並制作禮樂 作周官 官別其宜 作立政 以便百姓 百姓說 [史記三十三魯周公世家 百度百科]

成王; (1132-1083) 周成王姬誦 武王子 卽位年十三 周公居冢宰攝政 元年丙戌 管叔蔡叔霍叔 皆文王子 流言曰 公將不利於孺子 武庚從而同反 周公作大誥 奉王命以討之 七年初 武王作邑於鎬京 謂之宗周 是爲西都 將營成周 居於洛邑而未果 至是成王如武王之志 定鼎于郟鄏 二月 使召公先相宅 三月 周公至洛興工營築 謂之王城 是爲東都 南係於洛水 北因于郟山 周公又營成周 成王居洛邑 遷殷頑民於成周 復還歸西都 十二月 周公歸政於成王 成王在位三十七年內 七年周公攝政 [釋氏稽古略一]

大戊; 同太戊 商之第九代王 雍己弟 以伊隲爲相 亳有祥 桑穀共生于朝 一暮大拱 大戊問於伊隲 隲曰 妖不勝德 君之政其有闕歟 太戊於是修先王之政 明養老之禮 早朝晏退 問疾弔喪 三日而祥枯死 三年遠方重譯 而至者七十六國 有賢臣巫咸臣扈等 共輔佐之 商道復興 號稱中宗 在位七十五年 [釋氏稽古略一]

; 或稱殷商 成湯滅夏桀後 建立國家名商 後多次遷徙 公元前十四世紀 盤庚遷殷(今河南省偃師縣西) 改國號爲殷

; 商湯(約前1670-1587) 卽成湯 子姓 名履 又名天乙(殷墟甲骨文稱成 唐 大乙 宗周甲骨與西周金文稱成唐) 河南商丘人 湯是契的第十四代孫 主癸之子 商朝開國君主 [百度百科]

耕穡; 耕種和收穫 泛指農事

合穗; 謂禾苗一莖生二穗 古人視爲祥瑞

 

一二장주(漳州) 라한원(羅漢院) 계침선사(*桂琛禪師)가 수산주(脩山主)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가 이르되 남방에서 옵니다. 스님이 이르되 남방은 근일에 불법이 어떠하던가. 수가 이르되 상량(商量)함이 호호(浩浩)입니다. 스님이 이르되 어찌 나의 이 속에서 종전(種田; 농사짓다)하여 박반(*愽飯)하여 먹음과 같으리오. 수가 이르되 3()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스님이 이르되 네가 무엇을 3계라고 불러짓느냐. 어떤 본()에 이르되 그 중이 언하에 살핌이 있었다.

 

천동각(天童覺)이 송하되 종설(宗說; 宗通說通)이 갖가지(般般)임은 모두 억지로 함이니(强爲)/ 이구(耳口)에 유전(流傳)되어 곧 지리(支離)/ 종전(種田)하여 박반(愽飯)함은 가상(家常; 일상)의 일이지만/ 이 포참(飽參)한 사람이 아니면 알지 못한다.

 

또 송하되 참포(叅飽; 싫컷 참구함)하면 구할 바가 없음을 환히 아나니/ 자방(*子房)은 마침내 봉후(封侯)를 귀중히 여기지 않았다/ 망기(忘機)하고 돌아가매 어조(魚鳥)와 같나니/ 창랑에 발을 씻는(*濯足滄浪) 연수(煙水)의 가을이다.

 

상방악(上方岳)이 염하되 지장화상은 다만 종전(種田)할 줄만 알았지 수화(收禾)할 줄 알지 못했고 이 중은 3천 리 밖에서 행각했다.

 

운봉열(雲峰悅)이 염하되 아느냐, 종전(揷田)하여 박반(愽飯)하여 먹는다 하니/ 언중(言中)에 무엇이() 단적(辨的)한가/ 오후에 재종(齋鍾 )을 치니/ 금강이 일찍이 실색(失色)했다.

 

대위철(大潙喆)이 염하되 청빈(淸貧)하면 길이 즐겁지만 탁부(濁富)는 근심이 많다.

 

천동각(天童覺)이 감수(*監收)를 전송하며 상당해 이르되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나니(*一日不作 一日不食)/ 헐자(歇者; 쉰 자)는 무심하고 수확하는 자는 힘이다/ 분명히 다만 이 가풍이니/ 종전(種田)하여 박반(愽飯)하여 먹음을 회득(會得)하라. 기득(記得)컨대 지장(地藏)이 중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무엇을 3계라고 불러짓느냐. 스님이 이르되 유심(唯心)과 유식(唯識)은 평출(平出)이며 평입(平入)이다. 금도의 가지런함과 옥척의 곧음이거늘(*金刀之齊 玉尺之直) 네가 무엇을 3계라고 불러짓느냐. 진개(眞个)로 일찍이 과립(顆粒)을 유실(遺失)하지 않았다.

 

원통기(圓通機)가 상당하여 차화를 들고 이르되 대중이여 이 중이 당시에 단지 그를 향해 말하되 종일 망망해도 나사는 무방하다(*終日忙忙 那事*) 했더라면 바로 지장(地藏) 노한으로 하여금 위로는 하늘에 오를 계책이 없고 아래론 땅에 들어갈 계묘(計謀)가 없었으리라. 이 중이 이미 진어(進語)함을 얻지 못한지라 지장도 또한 곧 휴거(休去)했으니 천고지하(千古之下)에 사람의 순치(唇齒)에 걸리되 모두 평상(平常)의 상량으로 짓게 함에 이르렀다. 산승이 만약 지장이 되었다면 당시에 도리어 그를 향해 말하되 설후(雪後)에 비로소 송백의 지조(志操)를 알고 세한(歲寒)에 바야흐로 장부의 마음을 본다.

 

영원청(靈源淸)이 상당하여 차화를 들고 이르되 종전(種田)하여 박반(愽飯)하여 먹으면서/ 불법을 바로 상량한다/ 언하에 3계를 초월햐니/ 영기(靈機)가 묘광(妙光)을 발한다/ 묘광을 발하매 숨길 곳이 없나니/ 한가한 자는 한가하고 바쁜 자는 바쁘다/ 인하여 이류(異類) 중의 행리(*行李)를 아나니/ 백고(白牯; 흰 소)와 이노(狸奴; 고양이)가 법왕(法王)보다 수승(殊勝)하다. 그래 말하라, 백고와 이노가 무슨 장처(長處)가 있어 곧 능히 법왕보다 수승함을 얻느냐. 아느냐, 보은(報恩)은 깊이 경지(境地)가 있으나 성사(成事)하고 나선 공()이 없다.

 

지해청(智海淸)이 감수(監收)에게 감사하며 상당하여 차화를 들어 박반(愽飯)하여 먹는다. 스님이 이르되 작가 종사가 천연(天然)으로 아직 있다. 송왈(頌曰) 삽전(揷田; 논밭에 모종을 심음)하여 박반(愽飯)하여 먹나니/ 농공(農功; 농사)이 매우 맥직(驀直; 一直)이다/ 가가(家家)가 배 두드리며 스스로 구가(謳謌)하나니/ 준준(蠢蠢)에 누가 제력(帝力)이 있는 줄 알겠는가/ 그대가 보지 못하느냐,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보필하매 합수(*合穗; 合穎)하여 정상(呈祥)하고/ 태무(*大戊)가 은탕(**)을 일으키매 공파(拱把; 두 손을 맞잡다)하여 수덕(修德)했다. (), 조부의 전원(田園)의 일편(一片)이 평탄하나니/ 자손은 호호(好好) 경색(*耕穡)에 힘쓰라. ().

 

백운병(白雲昺)이 상당하여 차화를 들고 이르되 고기가 다니면 물이 탁하고 새가 날면 털이 떨어진다. 만약 능히 하부(荷負)하여 행함을 얻는다면 가위(可謂) 오종(吾宗)이 추락하지 않으리라. 도리어 아느냐. 종전(種田)하여 박반(愽飯)하여 먹나니/ 언중에 꼭 단적(端的)을 분변하라/ 일오(日午)3경을 치니/ 금강이 일찍이 실색()했다/ 당양(當陽)하여 부장(覆藏)하지 않나니/ 일용(日用)하며 누구의 힘을 받느냐/ 망망(忙忙)한 진세(塵世)의 사람이/ 몇 개가 은덕을 아는가.

 

第一二七則; 차화는 굉지록2 거화문(擧話文)에 나옴. 연등회요26 라한계침(羅漢桂琛). 스님이 삽전(插田)하던 차에 중을 보고 이에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이르되 남방입니다. 스님이 이르되 남방은 근일에 불법이 어떠하던가. 이르되 상량(商量)함이 호호지(浩浩地)입니다. 스님이 이르되 어찌 나의 이 속에서 종전(種田; 농사짓다)하여 박반()하여 먹음과 같으리오. 이르되 3계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스님이 이르되 네가 무엇을 3계라고 불러짓느냐. 중이 성찰이 있었다.

桂琛; (867-928) 오대승. 상산(절강에 위치함) 사람이며 속성은 이(). 일찍이 출진(出塵. 俗塵을 벗어남)의 뜻이 있었으며 만세사 무상대사에게 의지해 머리 깎고 수계했음. 비니(毘尼; )를 오로지 배웠는데 그러나 지계(持戒)는 몸을 구속하고 해탈의 도가 아니라 하여 이에 뜻을 돌려 유방(遊方)하면서 남종(南宗)의 여러 스님을 참방했음. 먼저 설봉의존을 참알하여 선요(禪要)를 참신(參訊; 參問)했으나 아깝게도 보는 바가 없었음. 복주의 현사사비(玄沙師備)의 좌하(座下)에 이르러 일언의 계발(啓發)을 얻자 휑하게 온갖 의혹을 탈락(脫落)했음. 때에 장주의 주목(州牧)이 민성(閩城)의 서쪽 방석산에 지장원(地藏院)을 건립하고 스님에게 청하여 법을 연설케 했음. 주석하기 18년에 학도로 모인 자가 2백여 사람이었음. 후에 장주 라한원에 주지하면서 현요(玄要)를 크게 열자 남북의 참도(參徒)가 진주(臻湊; 이르러 모임)하여 계기(契機)하여 개오(開悟)한 자는 그 수를 알지 못함. 세인이 라한계침(羅漢桂琛)의 호로써 존경했음. 당 천성 3년 가을에 질환을 보이더니 안좌(安坐)하기 며칠 만에 종말을 고했음. 향년은 62며 승랍은 40이며 시호는 진응선사. 제자에 청량문익ㆍ용제소수 등 다수가 있음 [오등회원18. 송고승전13].

愽飯; ()은 박()과 같음. ()과 같음.

支離; 서로 접속하지 않음의 뜻 [릉엄경정맥소6].

子房; 또 칭호가 장자방(張子房)이니 장량의 자가 자방임. 위 제463칙 장량(張良)을 보라.

濯足滄浪; 수경주소(水經註疏)에 이르되 대개 한수(漢水)가 초지(楚地)에 이르면 곧 그 이름이 창랑지수(滄浪之水)가 된다. 희린음의10. 도굴원(悼屈原) ()은 구물반(九勿反)이다. 성이 굴()이며 이름이 원()이며 자는 전평이다. ()에서 삼려대부(三閭大夫)가 되었고 왕이 매우 그를 중시했다. 근상(靳尙) 등이 그의 재능을 질투하여 함께 그를 찬훼(讚毀; 고하여 헐뜯음)했고 이에 유방(流放)을 입었다. 후에 상담(湘潭)에 노닐다가 음택반(吟澤畔)을 지나면서 이소(離騷)를 지어 이르되 창랑지수(滄浪之水)가 맑으면 가이(可以)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지수가 흐리면 가이 나의 발을 씻으리라.

監收; 곧 사원 소유지의 수입 및 조세 등의 잡무를 관리하는 직칭. 원대(元代)에 설립했고 장주(莊主)의 관할 아래 있었으며 직권은 지고(知庫)에 상당함. 그러나 그 폐해가 매우 많았음. 백장청규하 제장감수조(諸莊監收條)를 안함하니 고규(古規)엔 애초 장주와 감수가 없었는데 근대에 비로소 이 명칭을 세웠다. 이 명칭이 한 번 서자 그 폐해가 백출(百出)하였다. 주지가 사적으로 임명한 비인(匪人; 행위가 단정하지 못한 사람)이 있고 이양(利養)으로 인해 곡순(曲徇; 순종. 曲從)하는 자가 있고 근구(勤舊)와 집사인(執事人)을 위해 연년(連年)에 점거하며 충원되는 자가 있고 권세에 의탁해 충원되기를 구하는 자도 있고 당()을 세워 나누어 맡는 자도 있고 힘을 겨루어 다투어 맡는 자도 있으니 공공(公共)을 좀먹고 사사(私事)를 해함을 가히 매거(枚擧)하지 못한다. 비록 바르게 하여 구제하려 해도 같게 하지 못함을 어찌하랴 [비용청규6. 선림보훈1. 상기전직위류].

一日不作一日不食; 선림보훈음의. 백장사(百丈寺)는 남악의 절정에 있다. 대지선사(大智禪師)가 매일 힘껏 작무(作務)하여 그 공양을 상환(償還)했다. 중지를 권하는 자가 있자 곧 가로되 나는 덕이 없으면서 사람들을 노고롭게 한다. 대중이 참지 못하고 그의 작구(作具; 작업도구)를 감추었다. 두루 찾아도 얻지 못하자 드디어 먹지 않았다. 고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一日不食)는 말이 있어 환우(寰宇)에 유파(流播)되었다. 선덕이 솔신(率身)함은 다분히 이와 같았다.

金刀之齊玉尺之直; 염송설화에 가로되 금도운운(金刀云云)한 것은 가지런히 하고 곧게 하여 평등히 등차(等差)가 없음. 또한 재단(裁短)의 뜻이 있음.

終日忙忙那事無妨; 금강경주(金剛經註; 一卷 宋 道川頌竝著語). 이시의(以是義)비법(非法) 물이 이르면 도랑을 이룬다. 송왈(頌曰) 종일 망망해도 나사는 무방하나니(終日忙忙那事無妨}하나니/ 해탈을 구하지 않고 천당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지 능히 일념이 무념으로 돌아가면/ 비로정상(毗盧頂上)을 고보(高步)하며 행하리라.

; 저본에 방()으로 지어졌음. 여러 선록에 모두 방()으로 지었음.

行李; 많은 뜻을 함유했음. 여기에선 오도자의 기용(機用)의 실천을 가리킴.

周公; 희성(姬姓)이며 휘()는 단()이니 주문왕(周文王) 희창(姬昌)의 제4자며 주무왕(周武王) 희발(姬發)의 제제(弟弟; 아우). 주무왕 9년 동벌(東伐)하여 맹진(盟津)에 이르자 주공이 보행(輔行)했음. 11년 벌주(伐紂)하여 목야(牧野)에 이르자 주공이 무왕을 보좌했고 목서(牧誓)를 지었음. 파은(破殷)하고 상궁(商宮)에 들어갔고 이미 주()를 죽이고는 주자(紂子) 무경(武庚)을 녹부(祿父)로 봉()하고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으로 하여금 그를 돌보게 하여 은사(殷祀)를 잇게 했음. 공신과 동성(同姓)의 척자(戚者)를 두루 봉()했는데 주공단(周公旦)을 소호지허(少昊之虛; 少昊故墟) 곡부(曲阜)에 봉했으니 이것이 노공(魯公)이 됨. 주공이 봉지(封地)에 나아가지 않고 무왕을 유좌(留佐)했음. 그 후 무왕이 이미 붕어(崩御)하고 성왕(成王)이 연소(年少)한지라 성왕을 보익(輔翼)했음. ()ㆍ채()ㆍ무경(武庚) 등이 반란하자 주공이 이에 성왕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켜 동벌(東伐)하면서 대고(大誥)를 지었음. 드디어 관숙(管叔)을 베고 무경(武庚)을 죽이고 채숙(蔡叔)을 추방했음. 성왕이 장성하여 능히 청정(聽政)할 만하자 이에 주공이 정권을 성왕에게 돌려 주었음. 주공은 아울러 예악(禮樂)을 제작하고 주관(周官)을 만들고 관()을 그 마땅함에 구별하여 입정(立政)을 지어 백성을 편하게 했으니 백성이 기뻐했음 [사기33노주공세가. 백도백과].

成王; (1132-1083) 주성왕(周成王) 희송(姬誦)이니 무왕(武王)의 아들이며 즉위한 나이는 13. 주공(周公)이 총재(冢宰)에 거처하며 섭정(攝政)했음. 원년 병술 관숙ㆍ채숙ㆍ곽숙은 모두 문왕(文王)의 아들인데 유언(流言)하여 가로되 주공이 장차 유자(孺子; 1. 유아ㆍ아동을 가리킴. 2. 천자나 제후의 계승인을 가리킴)에게 불리하리라. 무경(武庚)이 이를 좇아 반란하자 주공이 대고(大誥)를 짓고 왕명을 받들어 그를 토벌했음. 7년 초 무왕이 호경(鎬京)에 작읍(作邑)하고 이를 일러 종주(宗周)라 했으니 이것이 서도(西都)가 됨. 장차 성주(成周)를 경영하려 했으나 낙읍(洛邑)에 거주하면서 미과(未果; 결과를 얻지 못함)했음. (7년 초)에 이르러 성왕이 무왕의 의지와 같이 겹욕(郟鄏)에 정정(定鼎)하고 2월에 소공(召公)을 시켜 먼저 상택(相宅)하게 했음. 3월 주공이 낙()에 이르러 흥공(興工)하여 영축營築)하고 이를 일러 왕성(王城)이라 했으니 이것이 동도(東都)가 됨. 남으로는 낙수(洛水)에 이어졌고 북으로는 겹산(郟山)을 인()했음. 주공이 또 성주(成周)를 경영하고 성왕은 낙읍(洛邑)에 거주하면서 은()의 완민(頑民)을 성주(成周)로 옮겼음. 다시 서도(西都)로 환귀했음. 12월 주공이 성왕에게 정권을 돌려주었음. 성왕의 재위 37년 내에 7년 동안 주공이 섭정했음 [석씨계고략1].

大戊; 태무(太戊)와 같음. ()의 제9대왕(第九代王)이며 옹기의 동생이니 이척(伊隲)을 재상으로 삼았음. ()에 상(; 재앙)이 있었으니 상곡(桑穀; 뽕나무와 닥나무)이 조정(朝廷)에 함께 났는데 하룻밤에 크기가 아름()이었음. 태무가 이척에게 묻자 이척이 가로되 요()가 덕을 이기지 못합니다. 주군의 정치에 그 궐()함이 있는가 합니다. 태무가 이에 선왕의 정치를 닦고 양로의 예()를 밝혔음. 조조안퇴(早朝晏退; 일찍 朝會하고 늦게 퇴근)하고 문질조상(問疾弔喪; 병자를 문병하고 喪事에 조문)했더니 3일 만에 상(; 재앙)이 고사(枯死)했으며 3년 만에 원방(遠方)에서 중역(重譯)하며 이른() 것이 76국이었음. 현신(賢臣) 무함(巫咸)ㆍ신호(臣扈) 등이 있어 함께 보좌했고 상도(商道)가 부흥했으며 호칭하기를 중종(中宗)이라 했음. 재위 75[석씨계고략1].

; 혹 명칭이 은상(殷商)이니 성탕(成湯)이 하걸(夏桀)을 멸한 후 건립한 국가의 이름이 상()이었고 후에 여러 차례 천사(遷徙)했는데 공원전 14세기 반경(盤庚)이 은(; 지금의 하남성 언사현 서)으로 옮기고 국호를 고쳐 은이라 했음.

; 상탕(商湯; 1670-1587)이니 곧 성탕(成湯). 자성(子姓)이며 이름은 리()니 또 이름이 천을(天乙; 殷墟 甲骨文에선 大乙로 호칭하고 宗周甲骨西周金文에선 成唐으로 호칭함). 하남 상구(商丘) 사람. ()은 이 계()의 제14대손이며 주계(主癸)의 아들이니 상조(商朝)의 개국군주 [백도백과].

耕穡; 경종(耕種)과 수확(收穫)이니 널리 농사를 가리킴.

合穗; 이르자면 화묘(禾苗)가 한 줄기에 두 이삭이 생겨남이니 고인이 상서(祥瑞)로 보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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