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염송집주(30권)

선문염송집 권29 제1369칙

태화당 2022. 4. 6. 08:48

一三六九舒州*投子山*義靑禪師 因僧問 師唱誰家曲 宗風嗣阿誰 師曰 *威音前一箭 射透兩重山 僧云 如何是相付底事 師曰 全因淮地月 得照郢陽春 僧云 恁麽則入水見長人 師曰 秖知*荊玉異 那辨*楚王心 隨後以拂子敲禪床

 

丹霞淳頌 珊瑚枝上玉花開 風遞淸香九垓 勿謂乾坤成委曲 *韶陽曾見睦州來

 

第一三六九則; 此話出五燈會元十四

投子山; 位於安徽省西南部揚子江沿岸 山中有投子寺 唐宋之際 此地稱爲舒州 大同禪師曾居此山 擧揚宗風三十餘年 宋神宗熙寧八年(1075) 義靑禪師至此山 大揚曹洞宗風 元豐六年(1083)於此遷化

義靑; (1032-1083) 宋代曹洞宗僧 靑社(山東)人 俗姓李 七歲於妙相寺出家 習百法論 入京聽華嚴有省 人稱靑華嚴 去叩禪林 參聖巖寺之浮山法遠(圓鑑) 隨侍六年 了悟洞下宗旨 法遠乃以大陽警玄之頂相衣履直裰付囑之(五家正宗贊三大陽玄 師年八十 嘆無繼其法者 作偈幷皮履布裰 寄遠錄公使求法器傳續之) 未久 見圓通法秀 意氣相投 自是道聲遠播 初住建州白雲山 未久卽遷舒州投子山 擧大陽之宗風 故有投子之號 宋神宗元豐六年示寂 敕諡慈濟 壽五十二 坐三十有七夏 法嗣九人 以芙蓉道楷最著 著有投子靑禪師錄 [續傳燈錄六 五燈會元十四 佛祖歷代通載十九 禪林僧寶傳十七] 從容錄四第六十四則 示衆云 韶陽親見睦州 拈香於雪老 投子(義靑)面承圓鑒 嗣法於大陽

威音前一箭; 指衆生本具之佛性 於無限悠久以來 衆生卽具有淸淨之佛心 猶如威音王佛以前所放之一箭

荊玉; 荊山玉 和氏之璧 卞和之璧 和璧 連城之璧 見上第五則卞璧

楚王; 見上第五則卞璧

韶陽曾見睦州來; 虛堂集六第九十三則 韶州雲門山文偃禪師 初參睦州陳尊宿 扣其門 陳問曰 阿誰 門曰 文偃 陳開門把住曰 道道 門無語 陳曰 秦時?輅鑽 遂托開以門掩 折右足 門因發明大意 陳指游雪峰 陞堂乃出衆云 項上三百斤鐵枷 何不脫却 峰下座把住曰 因甚到與麼 門以手拭目 後嗣雪峰 道振叢林 後遷雲門 名重天下 投子雲門異派同流 至今源遠不絶 續佛慧命 大顯曹溪之道者皆出二師 道力致之然也

 

一三六九서주 투자산(*投子山) 의청선사(*義靑禪師), 중이 묻되 묻되 스님은 누구 집 곡을 부르며 종풍은 누구에게서 이었습니까 함으로 인해 스님이 가로되 위음전일전(*威音前一箭)이 양중산(兩重山)을 쏘아 투과했다. 중이 이르되 무엇이 이 상부(相付)하는 일입니까. 스님이 가로되 전부 회지(淮地)의 달로 인해 영양(郢陽)의 봄을 득조(得照)한다. 중이 이르되 이러하다면 곧 입수하여 장인을 봅니다(入水見長人) 스님이 가로되 다만 형옥(*荊玉)의 특이(特異)함만 알거늘 어찌 초왕(*楚王)의 마음을 분변하리오. 뒤 따라 불자로써 선상을 두드렸다.

 

단하순(丹霞淳)이 송하되 산호의 가지 위에 옥화(玉花)가 피었고/ 바람이 청향(淸香)을 전하며() 구해(九垓)에 두루하다()/ 건곤이 위곡(委曲)을 이룬다고 이르지 말지니/ 소양이 일찍이 목주를 친견하고 왔다(*韶陽曾見睦州來)

 

第一三六九則; 차화는 오등회원14에 나옴.

投子山; 안휘성 서남부 양자강 연안에 위치함. 산중에 투자사(投子寺)가 있으며 당송의 즈음에 이 지역은 일컬어 서주(舒州)라 했고 대동선사(大同禪師)가 일찍이 이 산에 거주하며 종풍을 거양하기 30여 년이었음. 송 신종 희녕 8(1075) 의청선사(義靑禪師)가 이 산에 이르러 조동종풍을 대양(大揚)하다가 원풍 6(1083) 여기에서 천화했음.

義靑; (1032-1083) 송대 조동종승. 청사(靑社; 산동) 사람이며 속성은 이(). 7세에 묘상사에 출가해 백법론(百法論)을 익혔음. 입경(入京)하여 화엄을 듣다가 깨침이 있었으며 사람들이 청화엄(靑華嚴)이라 일컬었음. 떠나 선림에 고문(叩問)하다가 성암사(聖巖寺)의 부산법원(浮山法遠; 圓鑑. 임제하 6)에게 참문(參問)하며 수시(隨侍)하기 6년이었으며 조동하(曹洞下)의 종지를 요오(了悟)했음. 법원이 이에 대양경현(大陽警玄; 동산하 5)의 정상(頂相; 초상화)ㆍ의리(衣履)ㆍ직철(直裰)을 그에게 부촉했음(오가정종찬3 대양현. 스님의 나이 80에 그의 법을 이을 자가 없음을 탄식했다. 게를 짓고 아울러 皮履布裰遠錄公에게 기탁하며 법기를 구해 그것을 傳續하게 했다). 오래지 않아 원통법수(圓通法秀; 운문하 5)를 뵈었는데 의기가 상투(相投)하였고 이로부터 도성(道聲)이 멀리 전파되었음. 처음엔 건주(建州) 백운산에 주지했고 오래지 않아 곧 서주(舒州) 투자산(投子山)으로 옮겨 대양(大陽)의 종풍을 거양(擧揚)한지라 고로 투자의 호가 있음. 송 신종 원풍 6년에 시적했으며 칙시(敕諡)는 자제(慈濟)며 나이는 52며 좌()37(). 법사가 9인인데 부용도해(芙蓉道楷)가 가장 저명하며 저서에 투자청선사록(投子靑禪師錄)이 있음 [속전등록6. 오등회원14. 불조역대통재19. 선림승보전17]. 종용록4 64. 시중해 이르되 소양(韶陽)은 목주를 친견했지만 설로(雪老)에게 염향(拈香)했고 투자(投子; 義靑)는 원감(圓鑒)을 면승(面承)했으나 대양(大陽)의 법을 이었다.

威音前一箭; 중생이 본래 갖춘 불성을 가리킴. 무한히 유구(悠久)한 이래로 중생이 곧 청정한 불심을 갖추고 있음이 마치 위음왕불 이전에 방출한 바의 1()과 같음.

荊玉; 형산옥ㆍ화씨지벽ㆍ변화지벽ㆍ화벽ㆍ연성지벽이니 위 제5칙 변벽(卞璧)을 보라.

楚王; 위 제5칙 변벽(卞璧)을 보라.

韶陽曾見睦州來; 허당집6 93. 소주 운문산 문언선사가 목주 진존숙을 초참(初參)하여 그의 문을 두드렸다. ()이 물어 가로되 누구냐. 운문이 가로되 문언입니다. 진이 개문하고 파주(把住)하고는 가로되 말하라, 말하라. 운문이 말이 없자 진이 가로되 진시(秦時)의 탁로찬(?輅鑽)이로구나. 드디어 밀어 젖히며 문을 닫았는데 우족(右足)이 부러졌다. 운문이 인하여 대사(大意)를 발명(發明)했다. ()이 지시하여 설봉에 노닐었다. 승당하자 이에 대중에서 나와 이르되 목 위의 3백 근 철가(鐵枷)를 왜 벗어버리지 않습니까. 설봉이 하좌하여 파주(把住)하고 가로되 무엇으로 인해 이러함에 이르렀는가. 운문이 손으로써 눈을 닦았다. 후에 설봉을 이었고 도가 총림을 진동했다. 후에 운문으로 옮겼고 이름이 천하에 막중(莫重)했다. 투자와 운문은 이파동류(異派同流)니 지금토록 원원(源遠)하여 끊기지 않고 불타의 혜명(慧命)을 이으니 조계지도(曹溪之道)를 대현(大顯)하는 자는 다 두 스님에게서 나옴은 도력이 그렇게 이르게 했음이다.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daum.net)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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