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염송집주(30권)

선문염송집 권30 제1428칙

태화당 2022. 4. 12. 09:39

一四二八婺州*善慧傅大士 見*梁王不起 其臣問曰 大士見王 爲什麽不起 大士云 法地若動 一切不安

 

投子靑頌 *梁國令他魏國愁 渡江投水暗隨流 雖然寸土居無動 爭奈*雙林樹半秋

又拈 安邦定亂 實假良肱 立法明宗 須憑作者 然投機不妙 過犯彌天 力用不全 化風減半 若據將高就下 則枯木重陽 若盡令雙趺 則哀同萬里

 

第一四二八則; 五燈會元二善慧大士 又一日講經次 帝至 大衆皆起 唯士端坐不動 近臣報曰 聖駕在此 何不起 士曰 法地若動 一切不安

善慧; 傅翕(497-569) 南朝梁代禪宗著名之尊宿 東陽烏傷(浙江義烏)人 字玄風 號善慧 又稱善慧大士 魚行大士 傅大士 雙林大士 東陽大士 烏傷居士 與寶誌共稱爲梁代二大士 嘗與里人共捕魚 每得魚則盛於竹籠 沈入深水 竝謂 欲去者去 欲止者留 時人以之爲愚 年十六 娶劉氏女妙光 生普建普成二子 年二十四 於沂水取魚 適逢胡僧嵩頭陀(名達摩) 遂棄魚具 入烏傷縣松山雙檮樹下結庵 自號雙林樹下當來解脫善慧大士 自稱由兜率天宮來說法 日常營作 夜歸行道 苦行七年 自謂得首楞嚴定 竝能通儒道典籍 學徒漸集 衆皆虔誠精進 不惜身命 梁大通六年(534) 遣弟子傅暀上書致武帝 獻上中下三善之策 閏十二月 帝召入禁闕 講經於重雲殿 大同元年(535)四月 還松山 五年 重赴鍾山 於壽光殿與帝論眞諦 作偈頌呈之 六年(一說五年) 營造松山雙檮樹間之佛殿 九重塼塔 竝於斯地寫經律千餘卷 此卽雙林寺 七年 自宣爲賢劫千佛之一佛 十年 捨屋宇田地 設大施會 太淸二年(549) 欲焚身供養三寶 弟子堅留之 代士燒身者十九人 士乃止之 未久亂起 梁亡 傅翕家居徒衆甚多 講說不輟 每率徒衆焚指燃臂以供佛 嘗營齋轉法華經二十一遍 屢設無遮會 竝於會稽鑄寶王像十尊 爲便於讀大藏經 建有輪藏 令衆轉之 可得大利益 故後世所作輪藏皆安置其父子三人之像 此外 士於天台之一心三觀有其獨到之領略 而以三觀四運爲其心要 倡導三觀一心四運推檢之說 陳太建元年四月 集弟子告誡畢 趺坐入寂 壽七十三 弟子葬之於雙林山頂 號彌勒下生 撰有心王銘 語錄四卷 還源詩等 [善慧大士錄 續高僧傳二十五 傳燈錄二十七 同三十 神僧傳四]

梁王; 梁武帝 見上第九八則梁武帝

梁國令他魏國愁下; 空谷集三第四十則 二十七祖付達磨大士讖偈云 路行跨水忽逢羊 獨自悽悽暗渡江 日下可怜雙象馬 二株嫰桂久昌昌 此讖達磨西來始終之事 達磨始來見梁武帝 帝名衍 衍從行從水 故云路行跨水 帝旣不契 祖師果有洛陽之游 故云逢羊 羊陽聲相近也 祖師不欲人知其行 是夜航葦西邁 故曰暗渡江也 祖師西來見梁魏二帝 此言日下雙象馬也 九年面壁於少林 故曰二株嫩桂也 久九音同也 假達磨不契鈍滯之事 而比大士徑挺不近人情 亦相類也 末後兩句點他雖有千尺寒松 且無抽條石笋 佛事人情不能周足 還知麼 相見易得好 共住難爲人

雙林; 善慧入烏傷縣松山雙檮樹下結庵 自號雙林樹下當來解脫善慧大士 見此則善慧

 

一四二八무주 선혜(*善慧) 부대사(傅大士)가 양왕(*梁王)을 보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신하가 물어 가로되 대사는 왕을 보고도 무엇 때문에 일어나지 않습니까. 대사가 이르되 법지(法地)가 만약 움직이면 일체가 불안합니다.

 

투자청(投子靑)이 송하되 양국이 저 위국으로 하여금 수심케 했나니(*梁國令他魏國愁)/ 도강(渡江)하며 투수(投水)하여 몰래() 흐름을 따랐다/ 비록 그러히 촌토(寸土)도 무동(無動)에 거처했지만/ 쌍림수(*雙林)가 반은 가을임을 어찌하리오.

 

또 염하되 안방(安邦; 邦國을 안정)하고 정란(定亂; 난을 平定)함은 실로 양굉(良肱; 賢能輔佐)을 빌려야 하고 입법(立法)하고 명종(明宗)함은 꼭 작자에게 의빙(依憑)해야 한다. 그러나 투기(投機)가 묘하지 않으면 과범(過犯; 過錯)이 하늘에 두루하고 역용(力用)이 완전하지 않으면 화풍(化風; 교화의 바람)이 감반(減半)한다. 만약 장고취하(將高就下)에 의거하자면 곧 고목(枯木)이 중양(重陽; 2仲春)이려니와 만약 쌍부(雙趺)의 영()을 다한다면 곧 슬픔()이 만 리와 같으리라.

 

第一四二八則; 오등회원2 선혜대사(善慧大士). 또 어느 날 강경(講經)하던 차에 제()가 이르자 대중이 모두 일어났다. 오직 대사만이 단좌(端坐)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근신(近臣)이 알려 가로되 성가(聖駕)가 여기에 계시거늘 왜 일어나지 않습니까. 대사가 가로되 법지(法地)가 만약 움직이면 일체가 불안합니다.

善慧; 傅翕(497-569) 남조 양대(梁代) 선종의 저명한 존숙이며 동양 오상(절강 의오) 사람이니 자는 현풍(玄風)이며 호는 선혜(善慧). 또 호칭이 선혜대사(善慧大士)ㆍ어행대사(魚行大士)ㆍ부대사(傅大士)ㆍ쌍림대사(雙林大士)ㆍ동양대사(東陽大士)ㆍ오상거사(烏傷居士). 보지(寶誌)와 공칭(共稱)하여 양대(梁代)2대사(大士)라 함. 일찍이 마을 사람과 함께 물고기를 잡았는데 매번 물고기를 얻으면 곧 죽롱(竹籠)에 담아 깊은 물에 담가 넣고는 아울러 이르되 떠나려는 자는 떠나고 머무려고 하는 자는 머물러라. 당시의 사람들이 이를 어리석음으로 삼았음. 나이 16에 유씨(劉氏)의 딸 묘광(妙光)에게 장가들어 보건(普建)과 보성(普成) 두 아들을 낳았음. 나이 24에 기수(沂水)에서 물고기를 취하는데 마침 호승(胡僧) 숭두타(嵩頭陀; 이름이 달마)를 만났고 드디어 어구(魚具)를 버리고 오상현 송산(松山) 쌍도수(雙檮樹) 아래 들어가 암자를 엮고 스스로 호하기를 쌍림수하당래해탈선혜대사(雙林樹下當來解脫善慧大士)라 했음. 자칭하기를 도솔천궁으로부터 와서 설법한다 했음. 낮에는 늘 영작(營作)하고 밤에는 돌아와 행도(行道)하면서 고행하기 7년이었음. 스스로 이르기를 수릉엄정(首楞嚴定)을 얻었다 했고 아울러 능히 유도(儒道)의 전적을 통달했음. 학도가 점차 모였고 대중이 모두 건성(虔誠)으로 정진하며 신명을 아끼지 않았음. 양 대통 6(534) 제자 부왕을 보내어 무제에게 서신을 올려 이르게 했으며 상중하 3()의 책략을 바쳤음. 12월 무제가 금궐(禁闕)로 불러들여 중운전(重雲殿)에서 강경(講經)하게 했음. 대동 원년(535) 4월 송산으로 돌아갔음. 5년 다시 종산(鍾山)에 다다라 수광전(壽光殿)에서 무제와 진제(眞諦)를 논했고 게송을 지어 그에게 보였음. 6(일설에 5) 송산(松山) 쌍도수(雙檮樹) 사이의 불전(佛殿)9()의 전탑(塼塔)을 영조(營造)하고 아울러 이 땅에서 경률 천여 권을 서사했으니 이것이 곧 쌍림사(雙林寺). 7년 스스로 선포하기를 현겁천불의 1()이라 했음. 10년 옥우(屋宇)와 전지(田地)를 희사해 대시회(大施會)를 베풀었음. 태청 2(549) 분신하여 삼보에 공양하려 하자 제자들이 굳게 그것을 만류했으며 대사를 대신해 소신(燒身)한 자가 19인이었음. 대사가 이에 그것을 그치게 했음. 오래지 않아 난이 일어나 양()이 망했음. 부흡가(傅翕家)에 거처하는 도중이 매우 많았으며 강설을 거치지 않았음. 매번 도중을 거느리며 손가락을 태우고 팔을 태워 공불(供佛)했음. 일찍이 영재(營齋)하며 법화경 21()을 전독했고 여러 차례 무차회(無遮會)를 개설했음. 아울러 회계(會稽)에 보왕상(寶王像) 10()을 주성(鑄成)했고 대장경을 전독(轉讀)하기에 편하도록 윤장(輪藏)을 건립했으며 대중으로 하여금 그것을 돌리게 하면서 가히 대이익을 얻게 했음. 고로 후세에 만든 바 윤장에는 모두 그 부자 3인의 형상을 안치했음. 이 밖에 대사는 천태의 일심삼관(一心三觀)에 그만이 독도(獨到)한 영략(領略)이 있었고 삼관사운(三觀四運)을 그 심요(心要)로 삼아 삼관일심사운추검(三觀一心四運推檢)의 설을 창도(倡導)했음. () 태건 원년 4월 제자를 소집해 고계(告誡)를 마치자 부좌(趺坐)하고 입적했으니 나이는 73. 제자들이 쌍림의 산정에 장사 지내고 미륵하생이라고 호했음. 찬술(撰述)에 심왕명ㆍ어록 4권ㆍ환원시 등이 있음 [선혜대사록. 속고승전25. 전등록27, 30. 신승전4].

梁王; 양무제니 위 제98칙 양무제(梁武帝)를 보라.

梁國令他魏國愁下; 공곡집3 10. 27조가 달마대사에게 부촉(付屬)한 참게(讖偈)에 이르되 로()를 행()하면서 수()를 넘고 홀연히 양()을 만나며/ 독자(獨自)로 처처(悽悽)히 몰래 도강(渡江)하리라/ 일하(日下)에 가련(可怜)한 쌍상마(雙象馬)/ 이주(二株)의 눈계(嫩桂; 은 예쁠 눈)가 오래() 창창(昌昌)하리라. 이것은 달마가 서래(西來)한 시종의 일을 참()했다. 달마가 처음 와서 양무제(梁武帝)를 뵈었는데 제()의 이름이 연()이다. ()은 행()을 좇고 수()를 좇는지라 고로 이르되 로행과수(路行跨水)이다. ()가 이미 계합하지 못했으므로 조사가 과연 낙양(洛陽)의 노닒이 있었다. 고로 이르되 봉양(逢羊)이니 양()은 양성(陽聲)과 서로 가깝다. 조사가 그 행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이 밤에 위(; 갈대 위. 작은 배)를 운항하여 서쪽으로 갔으므로 고로 가로되 암도강(暗渡江)이다. 조사가 서래(西來)하여 양위(梁魏)의 이제(二帝)를 보았으니 이것은 일하(日下)의 쌍상마(雙象馬)를 말함이다. 구년(九年) 동안 소림(少林)에서 면벽했으므로 고로 가로되 이주눈계(二株嫩桂)이다. ()는 구()와 음이 같다. 달마가 불계(不契)한 둔체지사(鈍滯之事)를 빌려 대사(大士)가 경정(徑挺)하여 인정을 가까이 하지 않음에 비교했으니 또한 서로 유사하다. 말후의 양구(兩句)는 그가 비록 천척(千尺)의 한송(寒松)이 있지만 다만 추조(抽條)의 석순(石笋)이 없어 불사(佛事)와 인정(人情)을 능히 주족(周足)하지 못함을 점검했다. 도리어 아느냐, 상견하여선 우호(友好)를 얻기 쉽지만 공주(共住)하면 사람을 위하기가 어렵다.

雙林; 선혜(善慧)가 오상현(烏傷縣) 송산(松山) 쌍도수(雙檮樹) 아래 들어가 암자를 엮고 스스로 호하기를 쌍림수하당래해탈선혜대사(雙林樹下當來解脫善慧大士)라 했으니 차칙(此則)의 선혜(善慧)를 보라.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daum.net)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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