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염송집주(30권)

선문염송집 권30 제1434칙

태화당 2022. 4. 13. 09:53

一四三四南嶽*慧思和尙 因誌公令人傳語云 何不下山敎化衆生 目視雲漢作麽 師云 三世諸佛 被我一口呑盡 何處更有衆生可敎化

 

法雨岳頌 一口呑盡三世佛 呑則任呑吐不出 吐得出 胸題*萬字背圓月

法眞一頌 目視煙霄卧白雲 不知山下有乾坤 從何更有衆生度 三世如來一口呑

淨嚴遂頌 生佛名殊體不殊 呑來度去漫區區 浮雲廓散日當午 一點靈光爍大虛

五祖戒拈 更說道理看

玄覺徵 且道 是山上語 山下語

雪竇顯拈 有什麽屎臭氣

瑯瑘覺拈 驗人端的處

翠嵓芝拈 思大 秪見針頭利 不見鑿頭方

芭蕉徹拈 更進一步 又云 雖是入泥入水 幾人搆得

天聖泰拈 思大只知開口 寶公平地

佛印元雲居辭衆上堂云 雖然衰老百無堪 自利何如去指南 寄語聽泉猿鶴道 大千都是*卧龍庵 且道 庵內人爲什麽 不見庵外事 憶得誌公 何處更有衆生可度 師云 大小思大 已入在誌公彀中了也 何謂 旣有諸佛可呑 豈無衆生可度 然雖如是 覔箇大肚皮漢也難得

海印信上堂擧此話 連擧瑯瑘覺拈 又擧明和尙拈 若不是思大 洎被誌公喚下山來 師云 永安卽不然 大小思大 被誌公輕喚 便下山來

上方益拈 思大開大口卽不無 要且被寶公一拶 直得藏身無地 若也辨得 海上橫行

曹溪明上堂擧此話云 勘破了也 諸人且道 賓家被勘破 主家被勘破 明眼衲僧 試請斷看 當時忽若有人 恁麽問曹溪 曹溪只向他道 *自小持齋身已老 見人無力下禪床 雖然如是 他家自有兒孫在

慈受上堂擧此話云 思大恁說話 只知開口闊 不覺舌頭長 旣有諸佛可呑 豈無衆生可度 若是山僧卽不然 自四月十六下*焦山 或山路上行 或野店頭宿 也不見諸佛可呑 爲什麽如此 但知飢來喫飯 渴卽飮水 困卽啜茶 亦無衆生可度 爲什麽如此 只爲人人具足 个个圓成 蝦蟆蚯蚓 頂佩圓光 白牯狸奴 胸題萬字 今日來到*慧林院裏 與人相見 且道 與古人說話 是同是別 會麽 不勞久立

慈航朴上堂擧此話云 思大和尙 只知開口闊 不覺舌頭長 旣有諸佛可呑 豈無衆生可度 若是个通變底 向者裏 轉身吐氣 隨處入作 遇緣卽宗 敲唱雙行 主賓互顯 豈不是大丈夫之所當爲 拈起拄杖云 還見麽 鐵作一尋非等閑 壁立千仞須摧踏

妙智廓上堂擧此話云 誌公外揚家醜 未免喪盡門風 思大不護口門 已是墮渠圈繢 盧山今日 又且不然 忽有人問 何不下山敎化衆生 目視雲漢作麽 却向道 雲有出山勢 水無投㵎聲

 

第一四三四則; 此話出五燈會元二 按佛祖統紀六云 台宗第三祖慧思尊者 姓李氏 元魏南豫州武津人 陳宣帝稱爲大禪師 思大之名蓋得於此 大建九年(577) 六月二十二日示寂 壽六十三 夏四十九 傳燈云 誌公令人謂思師曰 何不下山敎化衆生 師報曰 三世諸佛被我一口呑卻 有何衆生可化 今考南岳願文 自序誕生之年 當梁武天監十四年(525) 至陳光大二年(568)始至南岳 時年五十四 誌公已入滅 於梁武之世久矣 不當有此遣問 今恐別有一師 後人誤傳爲誌公耳

慧思; (515-577) 南北朝時代之高僧 武津(河南上蔡)人 俗姓李 世稱南嶽尊者 思大和尙 思禪師 天台宗第三祖 自幼歸佛樂法 心愛法華經 年十五出家 後參河南慧文禪師 得授觀心之法 北齊天保五年(554) 師至光州 不分遠近 爲衆演說 長達十四年之久 又師於河南南部之大蘇山傳法與智顗 陳代光大二年(568)始入湖南衡山(南嶽) 悟三生行道之迹 講筵益盛 居止十年 遂有南嶽尊者之稱 倍受宣帝禮遇 尊稱大禪師 故思大和尙 又稱思禪師 蓋基於此 太建九年 晏然而化 壽六十三 著作多半門徒筆記而成 如法華經安樂行義一卷 諸法無諍三昧法門二卷 大乘止觀法門四卷 四十二字門二卷 受菩薩戒儀一卷等 自撰者有南嶽思大禪師立誓願文一卷 [續高僧傳十七 弘贊法華傳四 佛祖統紀六 佛祖歷代通載十一]

萬字; 見上第四三一則卍字

卧龍庵; 拈頌說話曰 卧龍菴者 雲居方丈也

自小持齋身已老; 五燈會元四趙州從諗 眞定帥王公 攜諸子入院 師坐而問曰 大王會麼 王曰 不會 師曰自小持齋身已老 見人無力下禪牀 王尤加禮重

焦山; 爲江蘇鎭江之東 孤峙在長江中之小島嶼 與南岸象山對峙 又稱譙山 樵山 浮玉山 銀島 傳焦山之名 始自後漢處士焦先 三詔不應 隱居於此 後人建焦公祠以祀之 山麓有定慧寺 爲江南著名古刹之一 與福州鼓山寺 同爲近世中國曹洞禪之主要道場 [古今圖書集成山川典一四 中國佛敎史下]

慧林院; 洛陽慧林寺

 

一四三四남악 혜사화상(*慧思和尙), 지공(誌公)이 사람을 시켜 말을 전해 이르되 왜 하산하여 중생을 교화하지 않고 눈으로 운한(雲漢)을 보아서 무엇하리오 함으로 인해 스님이 이르되 삼세제불도 내가 한입에 삼켜 없앰을 입었거늘 어느 곳에 다시 중생이 있어 가히 교화하겠는가.

 

법운악(法雨岳)이 송하되 한입에 삼세불을 삼켜 없앴다 하니/ 삼킴은 곧 삼키는 대로 일임하지만 토해 내지 못했다/ 토해 냄을 얻으면/ 가슴엔 만자(*萬字)를 제()하고 등엔 원월(圓月)이다.

 

법진일(法眞一)이 송하되 눈으로 연소(煙霄; 雲霄)를 보며 백운에 누웠나니/ 산 아래 건곤이 있는 줄 알지 못한다/ 어디로 좇아 다시 제도할 중생이 있는가/ 삼세여래도 한입에 삼켰다.

 

정엄수(淨嚴遂)가 송하되 중생과 부처가 이름은 다르지만() 체는 다르지 않거늘/ 삼켜 오고 제도해 가면서 도연히() 구구(區區)한다/ 부운(浮雲)이 휑하게 흩어지매 해가 당오(當午; 정오에 당함)했나니/ 일점의 영광(靈光)이 태허(大虛)를 녹인다().

 

오조계(五祖戒)가 염하되 다시 도리를 설해 보아라.

 

현각(玄覺)이 징()하되 그래 말하라, 이는 산상(山上)의 말인가, 산하(山下)의 말인가.

 

설두현(雪竇顯)이 염하되 무슨 시취기(屎臭氣; 똥냄새)가 있느냐.

 

낭야각(瑯瑘覺)이 염하되 사람의 단적처(端的處)를 감험했다.

 

취암지(翠嵓芝)가 염하되 사대는 다만 송곳(針頭)의 예리함만 보고 끌(鑿頭)의 모남을 보지 못했다.

 

파초철(芭蕉徹)이 염하되 다시 한 걸음 나아가거라. 또 이르되 비록 이 입니입수(入泥入水)하더라도 몇 사람이 구득(搆得; 領悟)하겠는가.

 

천성태(天聖泰)가 염하되 사대는 다만 입을 열 줄만 알았고 보공(寶公)은 평지에서 끽교(; 넘어짐)했다.

 

불인원(佛印元)이 운거(雲居)에서 사중(辭衆; 대중에게 고별)하며 상당해 이르되 비록 그렇게 쇠로(衰老)하여 온갖 것을 감내하지 못하지만/ 자리(自利)가 어찌, 가서 지남(指南)함만 같으리오/ 청천(聽泉)하는 원학(猿鶴)에게 말을 맡겨 말하노니/ 대천(大千)이 모두 이 와룡암(*卧龍庵)이다. 그래 말하라, 암내(庵內)의 사람이 무엇 때문에 암외(庵外)의 일을 보지 못하는가. 억득(憶得)하건대 지공(誌公)어느 곳에 다시 중생이 있어 가히 제도하겠는가. 스님이 이르되 대소 사대는 이미 지공의 구중(彀中; 射程距離 )에 들어와 있다. 무엇을 말함이냐, 이미 가히 삼킬 제불이 있거늘 어찌 가히 제도할 중생이 없겠는가. 그러하여 비록 이와 같지만 저() 대두피한(大肚皮漢)을 찾으매 또한 얻기 어렵다.

 

해인신(海印信)이 상당하여 차화를 들고 이어서 낭야각의 염을 들고 또 들되 명화상(明和尙)이 염하되 만약 이 사대가 아니었다면 거의 지공이 불러 하산함을 입었으리라. 스님이 이르되 영안(永安; 超信)은 곧 그렇지 않다. 대소 사대가 지공이 가볍게 불러 곧 하산함을 입었다. ()하라.

 

상방익(上方益)이 염하되 사대가 큰입을 엶은 곧 없지 않지만 요차(要且) 보공의 일찰(一拶)을 입자 바로 장신(藏身)할 땅이 없음을 얻었다. 만약에 변득(辨得)한다면 해상에 횡행(橫行)하리라.

 

조계명(曹溪明)이 상당하여 차화를 들고 이르되 감파(勘破)했다. 제인은 그래 말하라, 빈가(賓家)가 감파를 입었느냐, 주가(主家)가 감파를 입었느냐. 명안납승(明眼衲僧)은 시험삼아 청하건대 판단해 보아라. 당시에 홀약(忽若) 어떤 사람이 이렇게 조계(曹溪)에게 물었다면 조계가 다만 그를 향해 말하되 어릴적부터 지재하여 몸이 이미 늙은지라(*自小持齋身已老) 사람을 보고도 선상에서 내려올 힘이 없다.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지만 타가(他家)는 저절로 아손(兒孫)이 있다.

 

자수(慈受)가 상당하여 차화를 들고 이르되 사대의 이러한 설화는 다만 넓게 입을 열 줄만 알고 설두(舌頭; )가 긴 줄 깨닫지 못했다. 이미 가히 삼킬 제불이 있거늘 어찌 가히 제도할 중생이 없겠는가. 만약 이 산승일진대 곧 그렇지 않다. 416으로부터 초산(*焦山)에서 내려가 혹 산로상(山路上; 은 방면을 표시)을 다니거나 혹 야점두(野店頭; 는 조사)에 숙박하면서 또한 가히 삼킬 제불을 보지 못했나니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가. 단지 배고프면 끽반(喫飯)하고 목마르면 곧 음수(飮水)하고 피곤하면 곧 철다(啜茶; 차를 마시다)할 줄만 알았다. 또한 가히 제도할 중생이 없었나니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가. 다만 사람마다 구족했고 개개(个个)가 원성(圓成)했기 때문이니 하마구인(蝦蟆蚯蚓; 두꺼비와 지렁이)이 정수리에 원광(圓光)을 찼고() 백고이노(白牯狸奴; 흰 소와 고양이)가 가슴에 만자(萬字)를 제()했다. 금일 혜림원(*慧林院) 속에 내도(來到)하여 사람들과 상견했다. 그래 말하라, 고인의 설화와 더불어 이 같은가 이 다른가. 아느냐, 노고롭게 구립(久立)하지 말아라.

 

자항박(慈航朴)이 상당(上堂)하여 차화를 들고 이르되 사대화상은 다만 넓게 입을 열 줄만 알고 설두(舌頭; )가 긴 줄 깨닫지 못했다. 이미 가히 삼킬 제불이 있거늘 어찌 가히 제도할 중생이 없겠는가. 만약 이(是个) 통변(通變)하는 이라면 이 속을 향해 전신(轉身)하여 토기(吐氣)하면서 곳을 따라 입작(入作; 入進하여 작용)하고 우연(遇緣)하면 곧 종()이며 고창(敲唱)을 쌍행(雙行)하고 주빈(主賓)이 호현(互顯)하리니 어찌 이 대장부가 당연히 할 바가 아니겠는가. 주장자를 집어 일으키고 이르되 도리어 보느냐. 쇠로 1()을 만듦이 등한함이 아니지만 벽립천인(壁立千仞)도 꼭 최답(摧踏)하리라.

 

묘지곽(妙智廓)이 상당하여 차화를 들고 이르되 지공은 가추(家醜)를 외양(外揚)하여 문풍(門風)을 상진(喪盡)함을 면하지 못했고 사대는 구문(口門)을 보호하지 못했으니 이미 이는 그의 권궤(圈繢; 올가미)에 떨어졌다. 노산(盧山; 從廓)은 금일 우차(又且) 그렇지 않다. 홀연히 어떤 사람이 묻되 왜 하산하여 중생을 교화하지 않고 눈으로 운한(雲漢)을 보아서 무엇하리오. 도리어 향해 말하되 구름은 출산(出山)할 형세가 있지만 물은 투간(投㵎)하는 소리가 없다.

 

第一四三四則; 차화는 오등회원2에 나옴. 불조통기6을 안험하니 이르되 태종(台宗) 3조 혜사존자(慧思尊者)는 성이 이씨(李氏)며 원위(元魏) 남예주(南豫州) 무진 사람이다. () 선제(宣帝)가 일컫기를 대선사(大禪師)라 했으므로 사대(思大)의 이름이 대개 이에서 얻어졌다. 대건 9(577) 622일에 시적했고 나이는 63이며 하()49. 전등록(27)에 이르되 지공이 사람을 시켜 사사(思師)에게 일러 가로되 어찌하여 하산해서 중생을 교화하지 않는가. 스님이 알려 가로되 삼세제불이 나의 한입에 삼켜짐을 입었거늘 무슨 가히 교화할 중생이 있으리오. 이제 남악의 원문(願文)을 고찰(考察)하매 스스로 탄생한 해를 서술()하되 양무(梁武) 천감 14(525)에 당하며 진() 광대 2(568)에 이르러 비로소 남악에 이르렀고 때에 나이가 54였다. 지공은 이미 입멸했으며(誌公天監 13; 514에 시적했음) 양무의 세대에서 오래인지라 이 견문(遣問)이 있다 함은 부당하다. 다른 한 스님이 있어 후인이 잘못 전해 지공으로 삼았는가 지금 염려한다.

慧思; (515-577) 남북조시대의 고승. 무진(武津; 하남 상채) 사람이며 속성은 이(). 세칭이 남악존자(南嶽尊者)ㆍ사대화상(思大和尙)ㆍ사선사(思禪師)니 천태종 제3. 어릴 적부터 불타에게 귀의하고 불법을 좋아했으며 마음에 법화경을 사랑했음. 나이 15에 출가했고 후에 하남(河南) 혜문선사(慧文禪師)를 참해 관심지법(觀心之法)을 득수(得授)했음. 북제(北齊) 천보 5(554) 스님이 광주(光州)에 이르러 원근을 분별하지 않고 대중을 위해 연설했으며 길게는 14년의 장구함에 도달했음. 또 스님이 하남 남부의 대소산(大蘇山)에서 지의(智顗)에게 전법했음. 진대(陳代) 광대 2(568) 비로소 호남 형산(衡山; 南嶽)에 들어가 삼생행도(三生行道)의 자취를 깨쳤으며 강연(講筵)이 더욱 흥성했음. 거지(居止)한 지 10년이라 드디어 남악존자의 명칭이 있음. 선제(宣帝)의 예우를 배수(倍受)했고 존칭하여 대선사(大禪師)라 했으며 고로 사대화상(思大和尙), 또 사선사(思禪師)라 일컬었음이 대개 여기에서 기본(基本)했음. 태건 9년 안연(晏然)히 화()했으니 나이는 63. 저작은 다반(多半; 대부분)이 문도의 필기(筆記)로 이루어졌으니 예컨대() 법화경안락행의 1권ㆍ제법무쟁삼매법문 2권ㆍ대승지관법문 4권ㆍ사십이자문 2권ㆍ수보살계의 1권 등임. 자찬(自撰)한 것은 남악사대선사입서원문 1권임 [속고승전17. 홍찬법화전4. 불조통기6. 불조역대통재11].

萬字; 위 제431칙 만자(卍字)를 보라.

卧龍庵; 염송설화에 가로되 와룡암이란 것은 운거(雲居)의 방장(方丈)이다.

自小持齋身已老; 오등회원4 조주종심(趙州從諗). 진정수(眞定帥)인 왕공(王公; 王公鎔이니 五代 때의 偏覇. 釋氏稽古略三에 이르되 王鎔鎭州眞定府를 통솔하며 趙王이라고 일컬었다)이 여러 아들을 데리고 입원(入院)했다. 스님이 앉은 채 물어 가로되 대왕이여 아시겠습니까. 왕이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 스님이 가로되 어릴 적부터 재()를 가져 몸이 이미 늙은지라 사람을 보고도 선상에서 내려올 힘이 없습니다(自小持齋身已老 見人無力下禪牀). 왕이 더욱 예중(禮重)을 더했다.

焦山; 강소 진강(鎭江)의 동쪽에, 고치(孤峙)하여 장강 중의 작은 도서(島嶼)에 있으며 남안(南岸)의 상산(象山)과 대치(對峙). 또 명칭이 초산(譙山)ㆍ초산(樵山)ㆍ부옥산ㆍ은도(銀島). 전하기를 초산의 명칭은 후한 처사 초선(焦先)3()에 응하지 않고 여기에 은거함으로부터 비롯했음. 후인이 초공사(焦公祠)를 세워 그를 제사 지냈음. 산기슭에 정혜사가 있으니 강남의 저명한 고찰의 하나가 되며 복주 고산사(鼓山寺)와 함께 근세 중국 조동선(曹洞禪)의 주요한 도량이 됨 [고금도서집성산천전104. 중국불교사하].

慧林院; 낙양 혜림사(慧林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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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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