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生*肇*融*叡 乃*羅什*法師之高弟 號四依菩薩 嘗同羅什釋維摩經 至不可思議品皆*閣筆 蓋此境界非心思口議 遂不能措一詞 如*李*長者論 入*華嚴法界 詞分句解 皎如日星 *泮然無疑 若非親遇了緣 安能如此
●生; 道生(355-434) 劉宋僧 本姓魏 鉅鹿人 値竺法汰而出家 遂姓竺 入廬山 幽棲七年 鑽仰群經 後與慧叡慧嚴同遊長安 從羅什受學 後還都 止靑園寺 著二諦論 佛性常有論 法身無色論 佛無淨土論等 守文之徒 多生嫌嫉 又六卷之泥洹經 先至京師 生剖析經理 立闡提成佛之義 時大本未傳 舊學不許之 以爲邪說 遂擯於衆中 生袖手入平江虎丘山 竪石爲聽徒 講涅槃經 至闡提有佛性處曰 如我所說 契佛心否 群石皆首肯 後遊廬山 居銷景巖 聞曇無讖在北涼 重譯涅槃之後品 至南京見之 果如生言 宋元嘉十一年十一月寂 [高僧傳七 釋氏稽古略二]
●肇; 僧肇(384-414) 略稱肇法師 東晉僧 長安人 俗姓張 家貧 以傭書爲業 遂得博覽經史 初好老莊 及讀維摩經而感悟 遂出家 善方等大乘經典 兼通三藏 冠年名聲已震關中 才思幽玄 精於談論 聞鳩摩羅什羈留涼土 前往從之 羅什歎爲奇才 及至姚秦破涼 乃隨侍羅什入長安 稟姚興之命 與僧叡等於逍遙園詳定經論 解悟彌深 被稱爲解空第一 弘始六年(404) 羅什譯出大品般若經 師乃撰般若無知論呈之 後又撰述不眞空論 物不遷論 涅槃無名論 注維摩詰經十卷等 義熙十年示寂 年僅三十一 後人收集僧肇所著之宗本義 物不遷 不眞空 般若無知 涅槃無名諸論 題名爲肇論行世 [佛祖歷代通載八 梁高僧傳六 出三藏記集八 同九 肇論疏上 魏書釋老志二十]
●融; 道融 魏晉時代僧 汲郡林慮(河南汲縣)人 鳩摩羅什之門人 十二歲出家 初學外典 及三十歲 才解英絶 窮究內外經書 參與羅什之譯場 後寂於彭城 世壽七十四 著有法華 大品般若 金光明 十地 維摩等經之義疏 師講說法華經之際 每將經文分科爲九轍 故時人譽之爲九轍法師 [梁高僧傳六 法華傳記二 大唐內典錄三]
●叡; 僧叡 劉宋僧 冀州(今屬河北)人 一說 爲魏郡長樂人 年十八依僧賢出家 二十二博通經論 道聲遐布 遠近歸德 復從鳩摩羅什學 遂精練五門 善入六觀 仕所翻經 叡並參正 秦主姚興待以優禮 贊爲四海標領 著有智論 十二門論 中論等序 法華 維摩 思益 自在王禪等經序 並註大小品般若經 已而入廬山 依慧遠修淨業 後止京師烏衣寺 [梁高僧傳七 釋氏六帖十 六學僧傳十一]
●羅什; 鳩摩羅什(344 -413 一說 350-409) 又作究摩羅什 鳩摩羅什婆 拘摩羅耆婆 略稱羅什 什 此云童壽 東晉龜玆國(新疆疏勒)人 四大譯經家之一 父母俱奉佛出家 素有德行 羅什自幼聰敏 七歲從母入道 遊學天竺 遍參名宿 博聞强記 譽滿五天竺 後歸故國 王奉爲師 前秦苻堅聞其德 遣將呂光率兵迎之 呂光西征旣利 遂迎羅什 然於途中聞苻堅敗沒 遂於河西自立爲王 羅什乃羈留涼州十六七年 直至後秦姚興攻破呂氏 羅什始得東至長安 時爲東晉隆安五年(401) 姚興禮爲國師 居於逍遙園 與僧肇僧嚴等 從事譯經工作 自後秦弘始五年(40 3)四月 羅什先後譯出中論 百論 十二門論(以上合稱三論) 般若 法華 大智度論 阿彌陀經 維摩經 十誦律等經論 其譯經之總數不一 出三藏記集稱三十五部 二九四卷 開元釋敎錄則謂七十四部 三八四卷 羅什通達多種外國語言 所譯經論內容卓拔 文體簡潔曉暢 至後世頗受重視 居十二年而入寂 時爲晉義熙九年 壽七十 或謂義熙五年示寂 又據梁高僧傳記載 姚興以羅什爲聰明超凡之輩 不欲其無嗣 遂以十女逼令受之 元魏孝文帝曾至洛陽 遣使覓羅什之後嗣 委任以官爵 迨至隋世 關中鳩摩氏猶有顯者 或卽羅什之後人 [大品般若經序 百論序 大智度論序 梁高僧傳二 廣弘明集二十三]
●法師; 稱能精通佛法爲人之師者 又謂行法之師也 ▲法華義疏九 以人能上弘大法 下爲物師 故云法師 如世藥師以藥治人病 名爲藥師
●閣筆; 又作擱筆 停筆 放下筆 ▲祖庭事苑六 譯經記云 羅什譯維摩經 至芥納須彌 毛呑巨海 姚興閣筆曰 後人信否 如何
●李長者論; 指唐代李通玄之新華嚴經論 釋氏稽古略三云 開元二十二年(734) 太原李長者 名通玄 日食一柏葉棗小餠 因呼棗柏大士 初開元七年(719) 太原孟縣高仙奴舘之齋中造論 逾三年遷馬氏古佛堂側 閱十年負經書而去之 山行二十里偶一虎 長者撫之曰 吾著華嚴論 能爲擇棲止處否 卽以經囊負其背 行至神福山原下土龕前駐止 長者乃於龕著論 每夕口出白光以代燈燭 日有二女子汲水炷香 每食時具饌 齋畢撤而去 如是五載 長者著論畢 遂滅跡不見也 論成四十卷 開元二十八年(740)三月長者卒 壽九十五歲 又著決疑論 會釋 十門玄義 緣生解 迷十明等論 十玄六相 百門義海 偈讚語等 竝傳於世 ○李長者; 李通玄(635-730) 唐代華嚴學者 王族出身 或謂滄州(河北滄縣)人 開元七年(719) 隱於太原府壽陽方山之土龕 參究新譯華嚴經 居山中數載 每日僅以棗顆柏葉餠爲食 世稱棗柏大士 開元十八年三月 於龕室坐化 享年九十六 宋徽宗賜號顯敎妙嚴長者 所著有新華嚴經論四十卷 華嚴經會釋論十四卷 十玄六相 百門義海等 [華嚴經決疑論序及後記 華嚴經合論卷首李長者事迹 唐李長者通玄行蹟記 昭化寺帖]
●長者; 積財具德者之通稱 如須達長者等 ▲玄應音義八 財盈一億 德行又高 便稱長者 爲王輔佐 彼土數法 萬萬爲一億也 ▲韓非子詭使第四十五 重厚自尊 謂之長者 ▲祖庭事苑七 長者 一稱長者 體具十德 一姓貴 二高位 三大富 四威猛 五智深 六年耆 七行淨 八備禮 九上歎 十下歸
●華嚴法界; 大乘究竟之理 法華經謂之實相(方便品曰唯佛與佛乃能究盡諸法實相) 華嚴經名爲法界(第八會名入法界品) 法界者就體之名 實相者就義之稱 其實一也 華嚴一經以此法界爲體 一部始終不外乎明此法界之理 故云華嚴法界 法界有理法界 事法界 理事無礙法界 事事無礙法界等四種
●泮然; 釋然 思念﹑疑慮等消除貌
【80】 생(*生)ㆍ조(*肇)ㆍ융(*融)ㆍ예(*叡)는 곧 라집(*羅什) 법사(*法師)의 고제(高弟)니 호가 사의보살(四依菩薩)이다. 일찍이 라집과 함께 유마경을 해석했는데 불가사의품에 이르자 모두 각필(*閣筆)했다. 대개 이 경계는 마음으로 사유하거나 입으로 의논하지 못한다. 드디어 능히 일사(一詞)도 두지 못했다. 예컨대(如) 이장자론(*李長者論)은 화엄법계(*華嚴法界)에 들어가서 사(詞)로 분석하고 구(句)로 해석하되 밝기가 일성(日星)과 같은지라 반연(*泮然)하여 의심이 없어진다. 만약 친히 요연(了緣)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이와 같겠는가.
●生; 도생(道生; 355-434)이니 유송승(劉宋僧). 본성은 위(魏)며 거록 사람. 축법태(竺法汰)를 만나 출가했으며 드디어 성을 축(竺)이라 했음. 여산에 들어가 7년 동안 고요히 쉬면서 뭇 경을 찬앙(鑽仰; 칭송하면서 우러러봄)했음. 후에 혜예ㆍ혜엄과 함께 장안을 유람하다가 라집을 좇아 수학했음. 뒤에 도읍으로 돌아가 청원사에 머물면서 이제론ㆍ불성상유론ㆍ법신무색론ㆍ불무정토론 등을 지었는데 문구를 지키는 무리가 많이 혐의와 질투를 내었음. 또 6권의 니원경이 먼저 경사에 이르렀는데 도생이 경의 이치를 부석(剖析; 분석)하여 천제(闡提)도 성불한다는 뜻을 세웠음. 때에 대본(大本)이 전래되지 않았으며 구학(舊學)이 그것을 허가하지 않고 삿된 설로 삼았으며 드디어 대중 가운데서 쫓아내었음. 도생이 수수(袖手; 1. 팔짱을 낌. 2. 어떤 일에 직접 나서지 않고 버려둠)하고 평강 호구산(虎丘山)으로 들어가 돌을 세워 청도(聽徒; 청중)로 삼고 열반경을 강설했는데 천제(闡提)도 불성이 있다는 곳에 이르자 가로되 내가 설한 바와 같으며 불심에 계합하는가, 뭇 돌이 다 수긍하였음. 후에 여산을 유람하다가 소경암에 거주했음. 담무참이 북량에 있으면서 열반경의 후품을 거듭 번역한다 함을 들었는데 남경에 이르러 그것을 보니 과연 도생의 말과 같았음. 송 원가 11년 11월에 시적했음 [고승전7. 석씨계고략2].
●肇; 승조(僧肇; 384-414)니 약칭이 조법사(肇法師)임. 동진(東晉)의 승려며 장안 사람이며 속성(俗姓)이 장(張). 집안이 가난해 용서(傭書; 남에게 고용되어 글씨를 쓰는 일)로써 업(業)을 삼았으며 드디어 경사(經史)를 박람(博覽)함을 얻었음. 처음엔 노장(老莊)을 좋아했는데 및 유마경을 읽고서 감오(感悟)하여 드디어 출가했음. 방등(方等)의 대승경전을 잘했으며 겸하여 3장(藏)을 통달했음. 관년(冠年)에 명성이 이미 관중(關中)을 진동(震動)했고 재사(才思)가 유현(幽玄)하고 담론에 정밀했음. 구마라집이 양토(涼土)에 기류(羈留)한다 함을 듣고 앞으로 가서 그를 좇았는데 라집이 기재(奇才)라고 탄복했으며 그리고 요진(姚秦)이 파량(破涼)함에 이르자 이에 라집을 수시(隨侍)하며 장안에 들어갔음. 요흥(姚興)의 명령을 받아 승예(僧叡) 등과 함께 소요원(逍遙園)에서 경론을 상정(詳定)하면서 해오(解悟)가 더욱 깊어졌으며 해공제일(解空第一)로 일컬어짐을 입었음. 홍시 6년(404) 라집이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역출(譯出)하자 스님이 이에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을 지어 그에게 드렸으며 후에 또 부진공론(不眞空論)ㆍ물불천론(物不遷論)ㆍ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ㆍ주유마힐경(注維摩詰經) 10권 등을 찬술(撰述)했음. 의희 10년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겨우 31. 후인이 승조가 지은 바인 종본의(宗本義)ㆍ물불천(物不遷)ㆍ부진공(不眞空)ㆍ반야무지(般若無知)ㆍ열반무명(涅槃無名)의 여러 논을 수집(收集)하여 조론(肇論)으로 제명(題名)했으며 세상에 유행함 [불조역대통재8. 양고승전6. 출삼장기집8, 동9. 조론소상. 위서석로지20].
●融; 도융(道融)이니 위진시대(魏晉時代) 승인. 급군 임려(하남 급현) 사람. 구마라집의 문인(門人). 12세에 출가하여 처음엔 외전(外典)을 학습했음. 30세에 이르자 재해(才解)가 영절(英絶)했고 내외 경서(經書)를 궁구했음. 라집의 역장(譯場)에 참여했고 후에 팽성에서 입적했음. 세수(世壽) 74. 저서에 법화, 대품반야, 금광명, 십지, 유마 등 경의 의소(義疏)가 있음. 스님이 법화경을 강설할 즈음에 매양 경문을 가지고 분과(分科)하여 구철(九轍)로 삼은지라 고로 시인(時人)이 그를 기려 구철법사라 했음 [양고승전6. 법화전기2. 대당내전록3]
●叡; 승예(僧叡)니 유송승(劉宋僧). 기주(지금 하북에 속함) 사람인데 일설엔 위군(魏郡) 장락 사람이라 함. 나이 18에 승현에게 의지해 출가했고 22에 경론을 박통(博通)했으며 도성(道聲)이 멀리 퍼지고 원근이 귀덕(歸德)했음. 다시 구마라집을 좇아 학습하여 드디어 5문(門)에 정련(精練)했고 6관(觀)에 선입(善入)했음. 번경(翻經)하는 바에 종사(仕)하였고 승예가 아울러 참정(參正)했음. 진주(秦主) 요흥이 우례(優禮)로 대접했음. 사해(四海)의 표령(標領; 楷模. 表率)이라고 칭찬했음. 저서에 지론ㆍ십이문론ㆍ중론 등의 서(序)와 법화ㆍ유마ㆍ사익ㆍ자재왕선 등 경의 서와 아울러 주대소품반야경(註大小品般若經)이 있음. 이미 그러고선 여산에 들어가 혜원에게 의지하며 정업(淨業)을 닦았음. 후에 경사 오의사(烏衣寺)에 머물렀음 [양고승전7. 석씨육첩10. 육학승전11].
●羅什; 구마라집(鳩摩羅什; 梵 Kumārajīva. 344-413 一說 350-409) 또 구마라집(究摩羅什)ㆍ구마라집바ㆍ구마라기바로 지으며 약칭이 라집ㆍ집임. 여기에선 이르되 동수(童壽)며 동진(東晉) 구자국(龜玆國; 신강 소륵) 사람. 사대역경가(四大譯經家)의 한 사람. 부모는 다 봉불(奉佛)하여 출가했으며 본디 덕행이 있었음. 라집이 어릴 적부터 총민(聰敏)했으며 7세에 어머니를 좇아 입도(入道)했으며 천축에 유학하며 명숙(名宿)을 두루 참알했으며 박학강기했으며 명예가 5천축에 가득했음. 후에 고국에 돌아오자 왕이 받들어 스승으로 삼았음.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이 그 덕망(德望)을 듣고 장군 여광(呂光)을 파견해 장병을 거느리고 그를 영접하게 했음. 여광이 서정(西征)에서 이미 승리하였고 드디어 라집을 영접했음. 그러나 도중에서 부견이 패몰(敗沒)했다 함을 듣고는 드디어 하서(河西)에서 자립하여 왕이 되었음. 라집은 이에 양주(涼州)에서 십육칠 년을 기류(羈留; 抑留)했음. 바로 후진(後秦)의 요흥(姚興)이 여씨(呂氏)를 공파(攻破)함에 이르자 라집이 비로소 동쪽 장안에 이름을 얻었으니 때는 동진 융안 5년(401)이 됨. 요흥이 예(禮)로 국사를 삼았음. 소요원(逍遙園)에 거주하면서 승조(僧肇)ㆍ승엄(僧嚴) 등과 함께 역경공작에 종사했음. 후진 홍시 5년(403) 4월부터 라집이 선후로 중론ㆍ백론ㆍ십이문론(이상 합칭이 三論)ㆍ반야ㆍ법화ㆍ대지도론ㆍ아미타경ㆍ유마경ㆍ십송률 등의 경론을 역출(譯出)했음. 그 역경의 총수(總數)는 일치하지 않음. 출삼장기집에선 35부, 294권이라 하고 개원석교록에선 곧 이르기를 74부, 384권이라 했음. 라집은 여러 종의 외국 어언(語言)을 통달하여 번역한 바 경론의 내용이 탁발(卓拔)하고 문체가 간결하고 효창(曉暢; 밝고 화창)하여 후세에 이르러 자못 중시(重視)를 받았음. 12년을 거주하다가 입적했으니 때는 진(晉) 의희 9년이 되며 나이는 70. 혹은 이르기를 의희 5년에 시적했다 함. 또 양고승전의 기재에 의거하자면 요흥이 라집을, 총명이 초범(超凡)한 무리로 여겨 그의 무사(無嗣)를 바라지 않아 드디어 10녀(女)로써 압박하여 그에게 받게 했음. 원위(元魏) 효문제가 일찍이 낙양에 이르자 사자를 보내 라집의 후사(後嗣)를 찾아 관작(官爵)을 위임했음. 수세(隋世)에 이르러 관중(關中)의 구마씨(鳩摩氏)에 아직 현저한 자가 있었으니 혹 곧 라집의 후인인가 함 [대품반야경서. 백론서. 대지도론서. 양고승전2. 광홍명집23].
●法師; 능히 불법에 정통하고 사람의 스승이 되는 자를 일컬음. 또 법을 행하는 스님을 일컬음. ▲법화의소9. 사람으로서 능히 위로는 대법을 크게 하고 아래로는 사람의 스승이 되는지라 고로 이르되 법사(法師)니 세간의 약사가 약으로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지라 이름해 약사라 함과 같다.
●閣筆; 또 각필(擱筆)로 지음. 붓을 멈춤. 붓을 내려놓음. ▲조정사원6. 역경기에 이르되 라집이 유마경을 번역하는데 개자가 수미를 납입하고 터럭이 바다를 삼킨다 함에 이르자 요흥(姚興)이 각필(閣筆)하고 가로되 후인이 믿겠습니까, 어떻습니까.
●李長者論; 당대 이통현(李通玄)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을 가리킴. 석씨계고략3에 이르되 개원(開元) 22년(734) 태원(太原)의 이장자(李長者)는 이름이 통현(通玄)이다. 하루에 하나의, 잣잎과 대추의 작은 떡을 먹었으므로 인하여 조백대사(棗柏大士)라 부른다. 처음에 개원 7년(719) 태원 맹현(孟縣) 고선노(高仙奴)의 별관(別舘)의 집 속에서 논을 지었다. 3년을 넘기자 마씨(馬氏)의 고불당 곁으로 옮겼는데 10년을 지내고는 경서를 지고 떠났다. 20리를 산행하다가 한 호랑이를 만났다(偶는 遇임). 장자가 어루만지며 가로되 내가 화엄론을 지으려 하는데 능히 살며 머물 곳을 간택하겠는가. 곧 경낭을 그 등에 실었다. 가다가 신복산(神福山) 언덕 아래의 토감(土龕) 앞에 이르자 멈추었다. 장자가 이에 토감에서 논을 짓는데 매일 밤마다 입에서 백광을 내어 등촉에 대체했다. 날마다 두 여자가 있어 물을 긷고 향을 사루었으며 매번 식사 때는 음식을 갖추었고 재식을 마치면 거두어 갔다. 이와 같이 하기를 다섯 해에 장자가 저론(著論)을 마쳤고 드디어 종적을 없애고 보이지 않았다. 논은 40권을 이루었다. 개원 28년(740) 3월에 장자가 죽었는데 나이는 95세다. 또 결의론(決疑論)ㆍ회석(會釋)ㆍ십문현의(十門玄義)ㆍ연생해(緣生解)ㆍ미십명(迷十明) 등의 논을 지었다. 십현육상(十玄六相)ㆍ백문의해(百門義海)ㆍ게찬어(偈讚語) 등이 모두 세상에 전해졌다. ○李長者; 이통현(李通玄; 635-730)이니 당대 화엄학자. 왕족 출신. 혹 이르기를 창주(하북 창현) 사람이라 함. 개원 7년(719) 태원부 수양 방산(方山)의 토감(土龕)에 은거하며 신화엄경을 참구했으며 산중에 거주하기 몇 해에 매일 겨우 대추와 잣잎의 떡으로써 식사를 삼았으며 세칭이 조백대사(棗柏大士)임. 개원 18년 3월 감실에서 좌화(坐化)했음. 향년은 96. 송휘종이 현교묘엄장자란 호를 주었음. 소저(所著)에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40권ㆍ화엄경회석론 14권ㆍ십현육상ㆍ백문의해 등이 있음 [화엄경결의론서급후기. 화엄경합론권수이장자사적. 당이장자통현행적기. 소화사첩].
●長者; 재물을 쌓고 덕을 갖춘 자의 통칭이니 예컨대(如) 수달장자(須達長者) 등임. ▲현응음의8. 재물이 1억(億)을 채우고 덕행이 또 높아야 곧 장자라고 일컬으며 왕을 보좌한다. 그 국토의 수법(數法)은 만에 만이 1억이 된다. ▲한비자 궤사 제45. 중후자존(重厚自尊)을 일러 장자(長者)라 한다. ▲조정사원7. 장자(長者) 첫째 장자로 일컬어지려면 몸에 10덕을 갖추어야 함. 1은 성귀(姓貴; 族姓이 高貴함)며 2는 고위(高位; 지위가 높음)며 3은 대부(大富)며 4는 위맹(威猛)이며 5는 지심(智深; 지혜가 깊음)이며 6은 연기(年耆; 耆는 늙은이 기. 곧 나이가 많음)며 7은 행정(行淨; 행위가 깨끗함)이며 8은 비례(備禮; 예의를 갖춤)며 9는 상탄(上歎; 위에서 찬탄함)이며 10은 하귀(下歸; 아래에서 귀의함)임.
●華嚴法界; 대승 구경지리(究竟之理)니 법화경은 이를 일러 실상(實相; 방편품에 가로되 오직 불타와 불타만이 이에 능히 제법실상을 究盡한다)이라 하고 화엄경은 이름해 법계(法界; 제8회의 이름이 입법계품)라 함. 법계란 것은 체(體)로 나아가 이름했고 실상이란 것은 의(義)로 나아가 호칭했으니 기실(其實)은 하나임. 화엄 1경(經)은 이 법계를 체로 삼으며 1부(部)가 시종 이 법계지리(法界之理)를 밝힘의 밖이 아니므로 고로 이르되 화엄법계임. 법계에 이법계ㆍ사법계ㆍ이사무애법계ㆍ사사무애법계 등 4종이 있음.
●泮然; 석연(釋然)이니 사념(思念)ㆍ의려(疑慮) 등이 소제(消除)되는 모양.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tistory.com)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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