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宣州明寂珵禪師 遍見前輩尊宿 如瑯瑘雪竇天衣 皆承事請法 出世嗣興敎坦和尙 坦嗣瑯瑘 後遷*太平州瑞竹 退居西堂 師初遊方從之 請益雪竇*拈古*頌古 珵令看因緣 皆要自見自說不假其言語 師洞達先聖之微旨 珵甞稱於衆曰 杲必再來人也 復遊郢州大陽 見元首座*洞山微和尙堅首座 微在*芙蓉會中首衆 堅爲侍者十餘年 師周旋三公座下甚久 盡得曹洞宗旨 受授之際皆臂香 以表不妄付授 師自惟曰 禪有傳授 豈佛祖自證自悟之法 棄之依湛堂 一日湛堂問曰 爾鼻孔因什麽今日無半邊 對曰 *寶峯門下 湛堂曰 *杜撰禪和 *又一日於粧十王處 問曰 此官人姓什麽 對曰 *姓梁 湛堂以手自摸頭曰 爭奈姓梁底少箇*幞頭 對曰 雖無幞頭鼻孔髣髴 湛堂曰 杜撰禪和 又看經次 問曰 看什麽經 對曰 金剛經 曰是法平等無有高下 爲什麽雲居山高寶峯山低 對曰 是法平等無有高下 堂曰 爾做得箇座主使下 一日問曰 杲上座 我這裏禪 爾一時理會得 敎爾說也說得 敎爾做拈古頌古小參*普說 爾也做得 秖是有一件事未在 爾還知麽 對曰 甚麽事 湛堂曰 爾秖欠這一解在 *㘞 若爾不得這一解 我方丈與爾說時便有禪 纔出方丈便無了 惺惺思量時便有禪 纔睡著便無了 若如此 如何敵得生死 對曰 正是某疑處 後湛堂疾亟 問曰 和尙若不起此疾 敎某依附誰 可以了此大事 曰有箇*勤巴子 我亦不識他 爾若見之 必能成就此事 若見他了不得 便修行去 後世出來參禪
●太平州; 今安徽當塗 五代南唐置新和州 後改稱雄遠軍 宋叫平南軍 後升爲太平州 元爲太平路 明爲太平府 淸爲太平府屬安徽省 民國廢除 州治在當塗縣 轄區大致相當於馬鞍山及蕪湖 [百度百科]
●拈古; 擧出前人公案機語 加以評議 是禪家說法的一種形式 也是禪宗語錄的一種類型
●頌古; 擧出前人公案機語 用偈句韻語加以闡釋評議 是禪師說法的一種形式 按禪林寶訓下 萬庵曰 頌始自汾陽 曁雪竇宏其音 顯其旨 汪汪乎不可涯
●洞山微; 道微 宋代曹洞宗僧 得法於天寧芙蓉道楷 開法瑞州洞山 [續傳燈錄十二]
●芙蓉; 道楷(1043-1118) 宋代曹洞宗僧 沂州沂水(山東沂水)人 俗姓崔 幼隱伊陽山中 學辟穀之術 後悟其非 棄而習佛 於京師術臺寺出家 後參投子義靑得法 元豐五年(1082)弘法於沂州仙洞山 竝先後住持洛陽之招提 郢州之大陽山 隨州之大洪山崇寧保壽禪院 東京天寧寺等刹 大揚洞上之風 從者如雲 崇寧三年(1104) 徽宗聞其名 召住京師十方淨因禪院 賜紫衣及定照禪師之號 師以衣非佛制 卻而不受 帝怒 黥而流放淄州 師終不屈 後帝悟 聽其自便 師遂於芙蓉湖上建寺 大揚禪風 學者風從 政和七年(1117) 徽宗賜以華嚴禪寺一額 後又賜名興化寺 於翌年五月入寂 壽七十六 世稱芙蓉道楷 法嗣有丹霞子淳 淨因法成等 有芙蓉道楷禪師語要一卷(又作定照禪師語要) [禪林僧寶傳十七 聯燈會要二十八 湖北金石志十]
●臂香; 謂將香置於臂上燃燒 以供養佛菩薩 表示赤誠之意
●寶峯; 宋代黃龍派僧克文 曾住寶峰 湛堂文準嗣克文
●杜撰; 原指在詩文或其他著作中 妄作論述而毫無根據之情形 其語由來下列諸說 一漢代之田何精通易學 遷居杜陵 世稱杜田生 然或謂其易學實無師承之處 故世人多以杜田 或杜園 譏之 後訛稱爲杜撰 二據傳 道家五千餘卷之書中 除道德經二卷外 其餘均爲唐末文人杜光庭所撰述 多屬虛誕之說 故後人多稱僅憑臆造而無所本之說爲杜撰 三宋代文人杜默作詩時 常不合律 時人遂以行事不合法式者 謂之杜撰
●又一日於粧十王處; 續傳燈錄二十七大慧宗杲章作又因彩粧十王次
●姓梁; 湛堂文準姓梁
●幞頭; 古代一種頭巾 古人以皂絹三尺裹髮 有四帶 二帶系腦後垂之 二帶反系頭上 令曲折附項 故稱四脚 或折上巾 至北周武帝時 裁出脚後幞髮始名幞頭 初用軟帛垂脚 隋始以桐木爲骨子 唐方以羅代繒 帝服則脚上曲 人臣下垂 [百度詞典]
●普說; 禪家之說法也 禪師上法堂升法座 爲大衆說法 稱爲普說
●㘞; 用同咄 表示用力之聲 正字通 㘞 一說梵言 㘞之一聲 㘞同咄 ▲玉篇 㘞 牽船聲 正字通 㘞 進船聲 ▲廬山蓮宗寶鑑十 此箇㘞字 一切世人 口中未嘗不說 喩如失物人忽然尋見 不覺發此一聲是㘞字也 宗門多言此字者 蓋尋師訪道之人 參究三二十年 忽然心花發現 會得此事 不覺㘞地一聲 如失物得見 慶快平生 是其字義也
●勤巴子; 圓悟克勤之別名 圓悟頭上有斑點 形似巴字 故稱 一說成都呼巴西 師成都人 故稱勤巴子
【81】 선주(宣州) 명적정(明寂珵) 선사는 전배(前輩)의 존숙(尊宿)을 편견(遍見)했으니 예컨대(如) 낭야(瑯瑘; 慧覺)ㆍ설두(雪竇; 重顯)ㆍ천의(天衣; 義懷)를 모두 승사(承事; 받들어 모시다)하며 청법(請法)했다. 출세하여 흥교탄(興敎坦) 화상을 이었으니 탄(坦)은 낭야(瑯瑘)를 이었다. 후에 태평주(*太平州) 서죽(瑞竹)으로 옮겼고 서당(西堂)으로 퇴거(退居)했다. 스님(師; 대혜)이 처음 유방(遊方)하다가 그를 따르면서 설두의 염고(*拈古)와 송고(*頌古)를 청익했는데 정(珵)이 인연(因緣; 공안)을 간(看)하게 하면서 모두 자견자설(自見自說)하고 그 언어를 빌리지 않음을 요했다. 스님이 선성(先聖)의 미지(微旨)를 통달(洞達)했다. 정(珵; 저본에 程으로 지었음)이 일찍이 대중에게 칭찬해 가로되 고(杲; 宗杲)는 반드시 재래인(再來人)이다. 다시 영주(郢州) 대양(大陽)을 유행(遊行)하다가 원수좌(元首座)ㆍ동산미(*洞山微) 화상ㆍ견수좌(堅首座)를 참견했다. 미(微)는 부용(*芙蓉) 회중(會中)에 있으면서 수중(首衆; 수좌)이었고 견(堅)은 10여 년 동안 시자가 되었다. 스님이 3공(公)의 좌하(座下)에서 주선(周旋)한 지 매우 오래되었고 조동종지(曹洞宗旨)를 모두 얻었다. 수수(受授)하는 즈음에 모두 비향(臂香)하며 망령되이 부수(付授)하지 않음을 표시했다. 스님이 스스로 사유해 가로되 선(禪)에 전수(傳授)가 있다면 어찌 불조(佛祖)의 자증자오(自證自悟)하는 법이겠는가. 그것을 포기(抛棄)하고 담당(湛堂; 文準)에게 의지했다. 어느 날 담당이 물어 가로되 너의 비공(鼻孔)이 무엇 때문에 금일 반변(半邊)이 없느냐. 대왈(對曰) 보봉문하(*寶峯門下)입니다. 담당이 가로되 두찬선화(*杜撰禪和)로구나. 또 어느 날 장십왕처에(*又一日於粧十王處) 문왈(問曰) 이 관인(官人)은 성이 무엇인가. 대왈(對曰) 성이 양입니다(*姓梁). 담당이 손으로써 스스로 머리를 더듬으며(摸; 막) 가로되 성이 양(梁)인 게 저(箇) 복두(*幞頭)가 모자람(少)을 어찌하겠는가. 대왈(對曰) 비록 복두는 없지만 비공(鼻孔)은 방불(髣髴)합니다. 담당이 가로되 두찬선화(杜撰禪和)로구나. 또 간경(看經)하던 차에 문왈(問曰) 무슨 경을 보느냐(看). 대왈(對曰) 금강경입니다. 가로되 이 법은 평등하여 고하가 있지 않다 했거늘 무엇 때문에 운거산(雲居山)은 높고 보봉산(寶峯山)은 낮으냐. 대왈 이 법은 평등하여 고하가 있지 않습니다. 담당이 가로되 너는 저(箇) 좌주(座主)의 사하(使下; 仆從. 僕夫)를 주득(做得)하겠다. 어느 날 문왈(問曰) 고상좌(杲上座)야, 나의 이 속의 선(禪)을 네가 일시에 이회(理會)함을 얻었다. 너로 하여금 설하게 하면 또한 설함을 얻고 너로 하여금 염고(拈古)와 송고(頌古), 소참(小參)과 보설(*普說)을 짓게(做) 하면 네가 또한 주득(做得)한다. 다만 이, 일건사(一件事)가 있어 미재(未在; 不然)니 네가 도리어 아느냐. 대왈(對曰) 무슨 사(事)입니까. 담당이 가로되 네가 다만 이 일해(一解)가 모자라 있나니 화(*㘞)다. 만약 네가 이 일해(一解)를 얻지 못한다면 내가 방장에서 너와 더불어 설할 때 곧 선(禪)이 있다가 겨우 방장을 나가면 곧 없다(無了). 성성(惺惺)하게 사량(思量)할 때 선(禪)이 있다가 겨우 수착(睡著)하면 곧 없다(無了). 만약 이와 같다면 어떻게 생사를 적득(敵得; 對敵하다)하겠는가. 대왈(對曰) 바로 이 모(某)가 의심하던 곳입니다. 후에 담당이 질병이 긴급하자(亟) 문왈(問曰) 화상이 만약 이 질병에서 일어나지 못하시면 모(某)로 하여금 누구에게 의부(依附)하게 해야 가이(可以) 이 대사(大事)를 마치겠습니까. 가로되 저(箇) 근파자(*勤巴子)가 있나니 내가 또한 그를 알지 못하지만 네가 만약 그를 참견한다면 반드시 능히 차사(此事)를 성취할 것이다. 네가 그를 참견하고도 얻지 못한다면 곧 수행하여 가서 후세에 출래(出來)하여 참선하거라.
●太平州; 지금의 안휘 당도(當塗)니 오대 남당이 신화주를 설치했고 후에 개칭하여 웅원군이라 했음. 송은 평남군이라 일컬었고 후에 승격하여 태평주(太平州)라 했음. 원에선 태평로가 되었고 명에선 태평부가 되었음. 청은 태평부를 안휘성에 귀속시켰고 민국(民國)에서 폐제(廢除)했음. 주치(州治)는 당도현에 있었고 할구(轄區)는 대치(大致; 대개) 마안산 및 무호에 상당함 [백도백과].
●拈古; 전인의 공안의 기어(機語)를 거출하여 평의를 가함이니 이는 선가 설법의 1종 형식임. 또 이는 선종어록의 1종 유형임.
●頌古; 전인(前人)의 공안의 기어(機語)를 거출(擧出)하여 게구(偈句)의 운어(韻語)를 써서 천석(闡釋)하고 평의(評議)를 가함이니 이는 선사의 설법의 일종 형식임. 선림보훈하를 안험하니 만암(萬庵)이 가로되 송(頌)은 분양(汾陽)으로부터 비롯했고 설두(雪竇)에 이르러 그 음을 크게(宏) 하고 그 지취를 나타내었으니 왕왕(汪汪)하여 가히 헤아리지(涯) 못한다.
●洞山微; 도미(道微)니 송대 조동종승. 천녕 부용도해에게서 득법하고 서주 동산에서 개법했음 [속전등록12].
●芙蓉; 도해(道楷; 1043-1118)니 송대 조동종승. 기주 기수(산동 기수) 사람이며 속성은 최. 어릴 적에 이양산 가운데 은거하며 벽곡(辟穀)의 술법을 배웠는데 후에 그 그름을 깨닫고 버리고서 불법을 학습했으며 경사(京師) 술대사에서 출가했음. 후에 투자의청(投子義靑)을 참알해 득법했음. 원풍 5년(1082) 기주 선동산에서 홍법했고 아울러 선후(先後)로 낙양의 초제ㆍ영주의 대양산ㆍ수주의 대홍산숭녕보수선원ㆍ동경의 천녕사 등의 사찰에 주지(住持)하면서 동상(洞上)의 종풍을 크게 드날렸으며 따르는 자가 구름과 같았음. 숭녕 3년(1104) 휘종이 그의 이름을 듣고 불러서 경사의 시방정인선원에 주(住)하게 하고 자의(紫衣)와 및 정조선사란 호를 주었으나 스님이 옷이 불제(佛制)가 아니란 까닭으로 돌려주고 받지 않자 제(帝)가 노하여 경(黥. 刺字할 경이니 얼굴이나 팔뚝의 살을 따고 홈을 내어 먹물로 죄명을 찍어 넣던 벌)하고 치주로 유방(流放; 유배)했으나 스님은 마침내 굽히지 않았으며 뒤에 제(帝)가 깨닫고 그 스스로 편한 대로 함을 청허(聽許. 聽도 許임)했음. 스님이 드디어 부용호상(芙蓉湖上)에 절을 세우고 선풍을 크게 드날렸으며 학자가 풍종(風從. 바람처럼 따름)했음. 정화 7년(1117) 휘종이 화엄선사(華嚴禪寺)의 1액(額)을 주었으며 후에 또 흥화사란 이름을 주었음. 다음해 5월에 입적했음. 나이는 76이며 세칭이 부용도해(芙蓉道楷). 법사에 단하자순ㆍ정인법성 등이 있으며 부용도해선사어요(또 정조선사어요로 지음) 1권이 있음 [선림승보전17. 연등회요28. 호북금석지10].
●臂香; 이르자면 향을 가져다 팔 위에 안치하고 연소하여 불보살에게 공양함이니 적성(赤誠; 忠誠)의 뜻을 표시함.
●寶峯; 송대 황룡파승 극문(克文)이 일찍이 보봉(寶峰)에 주했고 담당문준(湛堂文準)이 극문을 이었음.
●杜撰; 원래 시문(詩文)이나 혹은 기타의 저작 가운데 있어 망령(妄靈)되이 논술을 지어 터럭만큼도 근거가 없는 정형(情形)을 가리킴. 그 말의 유래는 아래에 여러 설을 나열하겠음. 1. 한대(漢代)의 전하(田何)가 역학(易學)을 정통하였으며 두릉(杜陵)에 옮겨 거주했는데 세칭이 두전생(杜田生)임. 그러나 혹은 이르기를 그 역학이 실은 사승(師承)한 곳이 없는지라 고로 세인이 많이 두전(杜田) 혹은 두원(杜園)이라 하여 그를 비웃었음. 후에 잘못 호칭하여 두찬(杜撰)이라 했음. 2. 전(傳)에 의거하건대 도가(道家)의 5천여 권의 책 중에 도덕경 2권(道經ㆍ德經)을 제한 밖에 그 나머지는 균일하게 당말(唐末)의 문인인 두광정(杜光庭)이 찬술한 것이며 많이 허탄(虛誕)의 설에 속한지라 고로 후인이 많이들 겨우 억설(臆說)에 의빙하여 조작하고 근본할 바의 설이 없는 것을 일컬어 두찬(杜撰)이라 하였음. 3. 송대(宋代)의 문인 두묵(杜默)이 시를 지을 때 늘 율(律)에 맞지 않았으므로 당시의 사람이 드디어 행사(行事)가 법식에 맞지 않는 것을 두찬(杜撰)이라고 말했음.
●又一日於粧十王處; 속전등록27 대혜종고장(大慧宗杲章)에 우인채장십왕차(又因彩粧十王次; 十王을 彩粧하던 차로 인해)로 지었음.
●姓梁; 담당문준의 성이 양(梁).
●幞頭; 고대 1종의 두건. 고인이 3척의 검은 비단으로 머리카락을 쌌는데 4대(帶; 띠)가 있었으니 2대(帶)는 두뇌 뒤에 매어서 드리우고 2대는 두상에 반대로 매었음. 굽게 꺾어지게 해 목에 붙인지라 고로 명칭이 사각(四脚) 혹 절상건(折上巾)임. 북주(北周) 무제 시에 이르러 각후(脚後)의 복발(幞髮)을 잘라 내었으며 비로소 복두(幞頭)로 이름했음. 처음은 부드러운 비단을 써서 각(脚)을 내렸음. 수(隋)에서 비로소 오동나무로 골자(骨子)를 만들었으며 당(唐)에서 비로소 나(羅; 깁. 비단)로 증(繒; 비단)을 대체했음. 제복(帝服)은 곧 각상(脚上)이 굽었고 인신(人臣)은 아래로 처졌음 [백도사전].
●普說; 선가의 설법임. 선사가 법당에 올라가 법좌에 올라 대중을 위해 설법함을 일컬어 보설이라 함.
●㘞; 용(用)이 돌(咄)과 같음. 힘쓰는 소리를 표시함. 정자통 화(㘞) 일설에 범언(梵言)이다. 화지일성(㘞之一聲) 화(㘞)는 돌(咄)과 같다. ▲옥편. 화(㘞) 배를 끄는 소리다. 정자통 화(㘞) 진선(進船)하는 소리다. ▲여산연종보감10(廬山蓮宗寶鑑十). 이것 화자(㘞字)는 일체의 세인(世人)이 구중(口中)에서 일찍이 설하지 않음이 없다. 유여(喩如; 비유로 예를 듦) 물건을 잃은 사람이 홀연히 심견(尋見)하고는 불각에 이 일성(一聲)을 발함이 이 화자(㘞字)다. 종문에서 이 글자를 많이 말하는 것은 대개 심사방도(尋師訪道)하는 사람이 3, 20년 참구하고는 홀연히 심화(心花)가 발명하여 이 일을 회득(會得)하매 불각에 화지일성(㘞地一聲)함이 잃었던 물건을 득견함과 같아서 경쾌(慶快)한 평생이니 이것이 그 자의(字義)다.
●勤巴子; 원오극근의 별명. 원오의 두상에 반점이 있었는데 형상이 파자(巴字)와 비슷한지라 고로 일컬음. 1설엔 성도(成都)를 파서(巴西)로 부르며 스님이 성도 사람인지라 고로 일컬어 근파자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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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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