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州黃檗希運禪師 閩人也 幼於本州黃檗山出家 額間隆起如肉珠 音辭朗潤志意沖澹 後遊天台逢一僧 與之言笑如舊相識 熟視之目光射人 乃偕行屬㵎水暴漲 乃捐笠植杖而止 其僧率師同渡 師曰 兄要渡自渡 彼卽褰衣躡波若履平地 迴顧云 渡來渡來 師曰 咄遮自了漢 吾早知當斫汝脛 其僧歎曰 眞大乘法器我所不及 言訖不見 師後遊京師 因人啓發乃往參百丈 問曰 從上宗乘如何指示 百丈良久 師云 不可敎後人斷絕去也 百丈云 將謂汝是箇人 乃起入方丈 師隨後入云 某甲特來 百丈云若爾則他後不得孤負吾
●黃檗山; ①位於福建福淸縣城西十七公里處 又稱南山 以盛産黃檗(其樹皮可作藥用與染料用)而得名 唐貞元五年(789) 正幹禪師開山建寺 名般若堂 其後大闢堂宇 歷時八年 改稱建福寺 旋有希運禪師住山 黃檗之名頓顯 此寺遂成爲中國禪宗臨濟派之大道場 宋時頗爲興盛 其後 歷經興衰 明神宗曾賜以萬福禪寺之額 至崇禎十四年(1641) 隱元始重興 後隱元東渡日本 開創宇治大和山 卽取其規模 竝取名爲黃檗山萬福禪寺 [傳燈錄九 宋高僧傳二十 釋氏稽古略三 黃檗山志] ②位於江西宜豐縣西五十七公里處 又稱鷲峰山 唐末 希運禪師至此開山 以其出家於福州黃檗山 故世稱此山爲黃檗山 寺名黃檗寺 又稱靈鷲寺 不久 四方學者望風雲集 往來常有千餘人 唐宣宗曾幸此山 與希運同觀瀑布 竝相對賦詩 從此黃檗宗風盛於江南 又希運之後 有法濟 志因 惟初 惟勝 道全 永泰等相繼住此 山名益著 南宋紹興九年(1139) 高宗曾賜名報恩光孝禪寺 以爲追念其父徽宗之所 至明中葉曾廢毁 然明思宗時 常愚炤通等 曾復興之 [黃檗禪師傳心法要序 隆興佛敎編年通論二十六 佛祖歷代通載二十三]
●沖澹; 沖 和也 澹 恬靜也 [禪林寶訓音義]
●自了漢; 只顧自己修行而絲毫不存濟世利人或敎化他人之念者 亦有以之爲小乘修行者之貶稱
●是箇人; 猶是箇漢 意謂是一箇眞正的丈夫漢 是一箇眞正的參禪者 箇 代詞 相當于這那 又相當于什麽
홍주(洪州)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 민인(閩人)이니 어릴 적에 본주(本州) 황벽산(黃檗山)에서 출가했다. 이마 사이가 융기(隆起)한 게 육주(肉珠)와 같았고 음사(音辭)가 낭윤(朗潤; 밝고 윤택함)했고 지의(志意; 意志)가 충담(沖澹)했다. 후에 천태산(天台山)을 유람하다가 한 중을 만났는데 그와 함께 말하고 웃으면서 마치 예전부터 서로 아는 이와 같았다. 곰곰히 그를 보니 눈빛이 사람을 쏘았다. 이에 함께 가다가 개울물이 갑자기 불어남을 당했다. 이에 삿갓을 버리고 지팡이를 세우고(植) 쉬는데 그 중이 스님을 인솔해 함께 건너려고 했다. 사왈(師曰) 형이 건너고자 한다면 스스로 건너시오. 그가 곧 옷을 걷고 파도를 디디는데 평지처럼 밟았다. 돌아보며 이르되 건너오시오, 건너오시오. 사왈 에끼(咄), 이 자기만 깨닫는 자(自了漢)로구나. 내가 일찍 알았다면 마땅히 너의 정강이를 쪼갰을 것이다. 그 중이 감탄하며 가로되 진실로 대승법기(大乘法器)로구나. 나는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스님이 후에 경사(京師)를 유행(遊行)하다가 사람의 계발(啓發)로 인해 이에 백장(百丈)을 왕참(往參)하여 문왈(問曰) 종상(從上; 從前. 以前)의 종승(宗乘; 저본에 宗承으로 지었음)을 어떻게 지시하시렵니까. 백장이 양구(良久)했다. 사운(師云) 후인으로 하여금 단절되게 함은 옳지 못합니다. 백장이 이르되 다만(將) 이르기를 네가 시개인(是箇人)이라 하노라. 이에 일어나 방장으로 들어갔다. 스님이 뒤따라 들어가 이르되 모갑이 특별히 왔습니다. 백장이 이르되 만약 그렇다면(爾) 곧 타후(他後)에 나를 저버림(孤負)을 얻지 않을 것이다.
●黃檗山; ①복건 복청현성(福淸縣城) 서쪽 17㎞ 곳에 위치함. 또 명칭이 남산(南山)이며 황벽(黃檗; 그 樹皮는 가히 약용과 염료용으로 씀)이 성산(盛産)하기 때문에 이름을 얻었음. 당 정원 5년(789) 정간선사가 개산하고 사원을 세웠고 이름을 반야당이라 했음. 그 후에 당우(堂宇)를 크게 열어 8년을 역시(歷時)하였고 개칭하여 건복사라 했음. 이윽고(旋) 희운선사(希運禪師)가 있어 주산(住山)했고 황벽의 이름이 돈현(頓顯)했으니 이 사원은 드디어 중국 선종 임제파의 대도량을 이루었음. 송시(宋時) 자못 흥성했고 그 후에 흥쇠를 역경(歷經)했음. 명(明) 신종이 일찍이 만복선사의 편액을 주었으며 숭정 14년(1641)에 이르러 은원(隱元)이 비로소 중흥했음. 후에 은원이 일본으로 동도(東渡)하여 우치(宇治) 대화산(大和山)을 개창하고 곧 그 규모를 취했으며 아울러 이름을 취해 황벽산 만복선사(萬福禪寺)라 했음 [전등록9. 송고승전20. 석씨계고략3. 황벽산지]. ②강서 의풍현 서쪽 57㎞ 곳에 위치함. 또 호칭이 취봉산(鷲峰山)이니 당말(唐末) 희운선사(希運禪師)가 여기에 이르러 개산했음. 그가 복주 황벽산에서 출가했으므로 고로 이 산을 세간에서 일컫기를 황벽산이라 했음. 사명(寺名)은 황벽사며 또 명칭이 영취사였음. 오래지 않아 사방의 학자가 망풍(望風)하여 운집했고 왕래하는 이가 늘 천여 인이 있었음. 당선종(唐宣宗)이 일찍이 이 산에 거둥하여(幸) 희운(希運)과 폭포를 함께 관람했으며 아울러 서로 부시(賦詩)로 상대했는데 이로 좇아 황벽종풍이 강남에 성했음. 또 희운의 뒤에 법제ㆍ지인ㆍ유초ㆍ유승ㆍ도전ㆍ영태 등이 있어 상계(相繼)하여 여기에 거주한지라 산명이 더욱 드러났음. 남송 소흥 9년(1139) 고종이 일찍이 사명(賜名)하여 보은광효선사(報恩光孝禪寺)라 했고 그의 부친 휘종을 추념(追念)하는 장소로 삼았음. 명(明) 중엽에 이르러 일찍이 폐훼(廢毁)했으나 그러나 명 사종(思宗) 시 상우, 소통 등이 일찍이 그것을 부흥했음 [황벽선사전심법요서. 융흥불교편년통론26. 불조역대통재23].
●沖澹; 충(沖)은 화(和)며 담(澹)은 염정(恬靜; 고요함)임 [선림보훈음의].
●自了漢; 단지 자기의 수행만 돌아보고 실터럭만큼도 세상을 건지고 사람을 이롭게 하거나 혹은 타인을 교화할 생각이 있지 않는 자임. 또한 이로써 소승(小乘) 수행자의 폄칭(貶稱)으로 삼음이 있음.
●是箇人; 시개한(是箇漢)과 같음. 뜻으로 이르자면 이 1개의 진정한 장부한이며 이 1개의 진정한 참선자임. 개(箇)는 대사(代詞)니 저(這)ㆍ나(那)에 상당함. 또 십마(什麽)에 상당함.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tistory.com)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40만 원. 할인. 잔본 81질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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