裴相國休鎭宛陵 建大禪苑請師說法 以師酷愛舊山 還以黃檗名之 又請師至郡以所解一編示師 師接置於坐略不披閱 良久云 會麽 公云 未測 師云 若便恁麽會得猶較些子 若也形於紙墨何有吾宗 裴乃贈詩一章曰 自從大士傳心印 額有圓珠七尺身 掛錫十年棲蜀水 浮盃今日渡章濱 一千龍象隨高步 萬里香華結勝因 擬欲事師爲弟子 不知將法付何人〈觀前所敍 則運禪師居洪州大安寺 後裴公在宣州剏寺請師居之 號曰黃蘗 而贈以詩也 然所敍之事與詩意全不相合 今詳此詩 乃裴公在洪州時作也 言挂錫十年棲蜀水者 謂師先住高安之黃蘗已十年也 按前漢地理志 豫章郡建成縣有蜀水 建成者卽唐之高安縣也 浮盃今日渡章濱者 謂自黃蘗請師來至洪城也 按前漢地理誌 豫章水出贛縣西南北入大江 洪州城在章水之濱 而郡名豫章也 又裴公作傳心法要序云 有大禪師號希運 住洪州高安縣黃蘗山鷲峯下 海衆常千餘人 予會昌二年廉于鍾陵 自山迎至州憩龍興寺 旦夕問道 大中二年廉于宛陵 復禮迎至所部 寓開元寺云云 鍾陵洪州也 宛陵宣州也 觀此序所述 亦謂師先住高安黃蘗 而裴公請至洪州 與前詩正合 逮其廉于宣州 雖復迎請師 但寓開元寺而已 初無建寺之說 不知本章何以差誤若此 蓋當以裴公法要序與詩爲正 且會昌三年武宗廢敎其二年 言師居黃蘗已十載 此必然之理也 裴公在宣州請師 乃大中重興之後 而師再聚徒於黃蘗之時也 故千頃南公章中云 大中初裴公出撫宛陵 請黃蘗和尙出山 而南公隨之也 其餘在裴公章中辨之矣〉 師亦無喜色 自爾黃蘗門風盛于江表矣
●宛陵; 位於安徽省東南揚子江南岸丘陵地帶的都市 從徽州至杭州的交通要地 唐代裵休招黃檗希運於洪州景德寺 朝夕受敎而錄之 編曰宛陵錄 又大慧宗杲出生削髮地
●掛錫; 又作挂錫 行脚僧人棲止于某寺院 或其他適宜之處 稱作挂錫 錫 行脚僧人的拄杖
●蜀水; 祖庭事苑三 蜀水 在今筠州米山縣北三里 桉晉書地理志云 蜀水源出縣內小界山 東流五百九十里 入南昌縣漳水合
●浮盃; 盃 此指小舟
●章濱; 諸禪錄皆作漳濱 碧巖錄第十一則種電鈔云 漳水在明南昌縣 乃古洪州也
●所部; 管轄的部門或管領的部屬
●江表; 又稱江東 指江南 揚子江以南
배상국(裴相國) 휴(休)가 완릉(宛陵)을 진수(鎭守)하면서 대선원(大禪苑)을 건립하고 스님의 설법을 청했다. 스님이 구산(舊山)을 혹애(酷愛)한지라 도리어 황벽(黃檗)으로써 그것을 이름했다. 또 스님을 청해 군(郡)에 이르게 하고 해석한 바 1편(編)을 스님에게 보이자 스님이 접수해 자리에 방치하고 조금(略)도 피열(披閱; 저본에 拔閱로 지었음)하지 않았다. 양구(良久)하고 이르되 아느냐. 공(公)이 이르되 헤아리지 못합니다(未測). 사운(師云) 만약 바로 이렇게(恁麽) 회득(會得)하면 오히려 조금은 상당하려니와(較些子) 만약에 지묵(紙墨)에 형상(形象)한다면 어찌 오종(吾宗)이 있겠는가. 배휴(裴休)가 이에 시(詩) 1장(章)을 증정(贈呈)했으니 가로되 대사(大士)가 심인(心印)을 전수(傳受)하심으로부터/ 이마에 원주(圓珠)가 있고 7척의 몸이다/ 괘석(掛錫)하고서 10년 동안 촉수(蜀水)에 쉬다가/ 부배(浮盃; 작은 배를 띄우다)하여 금일 장빈(章濱)을 건너셨다/ 1천의 용상(龍象)이 고보(高步)를 따르고/ 만 리에 향화(香華)로 승인(勝因)을 맺는다/ 스님을 모시며 제자가 되고자 하나니/ 법을 가지고 어떤 사람에게 부촉(付屬; 付)하실지 알지 못하겠네〈앞에 서술한 바를 보건대 곧 運禪師가 洪州 大安寺에 거주했고 후에 裴公이 宣州에 있으면서 剏寺하여 스님을 청해 거주하게 하고 號曰 黃蘗이라 하고 시를 증정했다. 그러나 서술한 바의 일이 詩意와 전혀 相合하지 않는다. 이제 이 시를 詳考하건대 곧 裴公이 洪州에 있을 때 지은 것이다. 말한 挂錫하고서 十年 동안 蜀水에 쉬다가 라고 한 것은 이르자면 스님이 먼저 高安의 黃蘗에 거주한 지 이미 10년이다. 前漢地理志를 안험컨대 豫章郡 建成縣에 蜀水가 있고 建成이란 것은 곧 唐의 高安縣이다. 浮盃하여 금일 章濱을 건너셨다 한 것은 이르자면 黃蘗으로부터 스님을 청해 와서 洪城에 이른 것이다. 前漢地理誌를 안험컨대 豫章水는 공현(贛縣) 西南에서 나와 북쪽 大江으로 들어간다. 洪州城이 章水之濱에 있어 郡名이 豫章이다. 또 裴公이 傳心法要序를 지어 이르되 대선사가 있으니 호는 希運이며 洪州 高安縣 황벽산 취봉(鷲峯) 아래 거주했으니 海衆이 늘 千餘人이다. 내가 會昌 2년(842) 鍾陵을 廉(査察)했는데 산으로부터 맞이해 州에 이르러 龍興寺에 休憩하게 하고 旦夕으로 問道했다. 大中 2年(848) 宛陵을 廉했는데 다시 예로 맞이하여 所部에 이르러 開元寺에 寓居하게 했다 云云 鍾陵은 洪州며 宛陵은 宣州다. 차서(此序)의 소술(所述)를 보건대 또한 이르기를 스님이 먼저 高安 黃蘗에 住했고 裴公이 청해 洪州에 이르렀다 했으니 前詩와 正合한다. 그가 宣州를 廉함에 이르러 비록 다시 스님을 迎請했으나 단지 開元寺에 寓居했을 따름이다. 애초에 建寺之說이 없다. 本章에서 무엇 때문에 差誤가 이와 같은지 알지 못하겠다. 大蓋 마땅히 裴公의 法要序와 詩로써 바름을 삼아야 하리라. 또 會昌三年은 武宗이 廢敎한 그 2년이니 말하자면 스님이 황벽에 거주한 지 이미 十載며 이것은 필연의 이치다. 裴公이 宣州에 있으면서 請師한 것은 곧 大中이 重興한 후며 스님이 다시 황벽에서 聚徒한 때다. 고로 千頃南公章 中에 이르되 大中初 裴公이 나가서 宛陵을 鎭撫했고 황벽화상의 出山을 청했고 南公이 그를 따랐다. 그 나머지는 裴公章 中에서 그것을 분변한다〉. 스님이 또한 희색(喜色)이 없었다. 이로부터 황벽문풍(黃蘗門風)이 강표(江表)에 성행했다.
●宛陵; 안휘성 동남 양자강 남안 구릉지대에 위치하는 도시. 휘주로부터 항주에 이르는 교통의 요지. 당대 배휴(裵休)가 황벽희운(黃檗希運)을 홍주(洪州) 경덕사(景德寺)에 초청하여 조석으로 가르침을 받으며 그것을 기록하고 편(編)해 가로되 완릉록(宛陵錄)이라 했음. 또 대혜종고가 출생하고 삭발한 지방임.
●掛錫; 또 괘석(挂錫)으로 지음. 행각하는 승인이 어떤 사원이나 혹 기타 적의(適宜; 적당)한 곳에 서지(棲止)함을 일컬어 괘석으로 지음. 석(錫)은 행각하는 승인의 주장자.
●蜀水; 조정사원3. 촉수(蜀水)는 지금의 균주(筠州) 미산현(米山縣) 북쪽 3리에 있음. 진서(晉書) 지리지(地理志)를 안험하니 이르되 촉수의 수원은 현내(縣內)의 소계산(小界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590리를 흘러 남창현(南昌縣) 장수(漳水)에 들어가 합한다.
●浮盃; 배(盃)는 여기에선 작은 배를 가리킴.
●章濱; 여러 선록에 모두 장빈(漳濱)으로 지었음. 벽암록 제11칙 종전초(種電鈔)에 이르되 장수(漳水)는 명(明)의 남창현(南昌縣)에 있으니 곧 옛 홍주(洪州)다.
●所部; 관할의 부문(部門) 혹 관령(管領)의 부속(部屬).
●江表; 또 호칭이 강동이니 강남을 가리킴. 양자강 이남임.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tistory.com)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40만 원. 할인. 잔본 81질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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