玉泉皓禪師 元豐間 首衆僧於襄陽谷隱 望聳諸方 無盡居士張公奉使京西南路 就謁之 問曰 師得法何人 皓曰 復州北塔廣和尙 公曰 與伊相契可得聞乎 皓曰 只爲伊不肯與人說破 公善其言 致開法于郢州大陽 是時谷隱主者私爲之喜 謂我首座出世 盛集緇素 以爲歆艶 皓登座曰 承皓在谷隱十年 不曾飮谷隱一滴水 嚼谷隱一粒米 汝若不會來 大陽爲汝說破 擕拄杖下座 傲然而去 尋遷玉泉 有示衆曰 一夜雨霶烹 打倒葡萄棚 知事 頭首 行者 人力 拄底拄 撑底撑 撑撑拄拄到天明 依舊可憐生 自謂此頌法身向上事 如傅大士云空手把鋤頭 洞山云五臺山上雲蒸飯 只頌得法身邊事 然爲人超放 未易以凡聖議 甞製犢鼻裩 書歷代祖師名而服之 乃曰 唯有文殊普賢較些子 且書於帶上 故叢林目爲皓布裩 有侍僧效之 皓見而詬曰 汝具何道理 敢以爲戲事耶 嘔血無及耳 僧尋於鹿門如所言而逝 嗚呼 世所同者 道所異者 跡而已 皓之唱道 開豁正見 至於示跡殊常 則爲不測 人求於往昔 殆鄧隱峰普化之流亞歟
●玉泉皓; 承皓(1011-1091) 北宋雲門宗僧 眉州(四川)丹稜人 俗姓王 天聖年間(1023-1031) 依大力院出家 後遊學諸方 至復州參北塔思廣禪師(雲門下三世) 體達玄旨 得大自在三昧 乃嗣其法 曾製犢鼻裩 書歷代祖師之名而言 唯有文殊普賢較些子 且將此語書於帶上 故叢林稱師爲皓布裩 元豐年間(1078-1084) 住襄陽谷隱山 後移住荊門郡玉泉寺 元祐六年示寂前 門人圍繞之 師笑曰 吾年八十一 老死舁屍出 兒郞齊著力 一年三百六十日 言畢而寂 壽八十一 [聯燈會要二十八 續燈錄六 續傳燈錄五 佛祖通載十九]
●無盡居士; 張商英(1043-1121) 北宋黃龍派居士 蜀州(四川崇慶)新津人 字天覺 號無盡居士 自幼卽銳氣倜儻 日誦萬言 初任通州主簿 一日入寺見藏經之卷冊齊整 怫然曰 吾孔聖之書 乃不及此 欲著無佛論 後讀維摩經有感 乃歸信佛法 神宗(1068-1085)時 受王安石推擧入朝 大觀年間 爲尙書右僕射 未久因事謫於外 及遷江西運使 禮謁東林寺常總(嗣黃龍) 得其印可 復投兜率寺從悅(黃龍下二世) 就巖頭末後之句有所參究 得嗣其法 紹聖(1094-1098)初年 受召爲左司諫 因上書論司馬光呂公著而左遷 又常詆當時宰相蔡京 故屢受貶 大觀四年(1110)六月 天久旱 乃受命祈雨 晩忽雨 徽宗大喜 賜商霖二字 後受蔡京讒言 貶知河南府 宣和四年歿 壽七十九 賜諡文忠 著有護法論一卷 [釋氏稽古略四 居士傳二十八 宋史三五一]
●奉使; 一奉命出使 二奉命出使的使者
●復州; 今湖北天門
●北塔廣; 思廣 宋代雲門宗僧 依五祖師戒受法 住復州北塔 [五燈會元十五 續傳燈錄二]
●郢州; 今湖北鍾祥 隋以前的郢州一般指後來的鄂州 治所在今武漢市武昌 南朝宋從荊 湘 江 豫四州析置 隋滅陳 改爲鄂州 另一郢州以今鍾祥爲治所 [百度百科] ▲湖廣名勝志八荊州府曰 春秋楚文王自丹陽徙都於此 謂之郢都
●出世; 禪師於自身 修持功成後 再次歸還人間敎化衆生 亦稱出世 或被任命住持之職 昇進高階位之僧官等 皆稱爲出世
●緇素; 一又稱緇白 出家衆通常披著黑衣 故以緇代稱 在家者披著素衣 故又稱白衣 緇素卽出家在家之竝稱 意謂道俗 僧俗 二分辨 此指一
●拄杖; 又作柱杖 主杖 ▲祖庭事苑八 拄杖 佛在鷲峰山 有老苾芻登山上下 脚跌倒地 佛言 應畜拄杖 聞佛許已 六衆卽便以金銀雜綵等物 雕飾其杖 俗旅嫌賤 苾芻白佛 佛言 苾芻有二種緣應畜拄杖 一爲老瘦無力 二爲病苦嬰身 又制大小不得過麤指 正如今禪家游山拄杖 或乘危涉險 爲扶力故 以杖尾細怯 遂存小枝許 串鐵永者是也 行脚高士多携麤重堅木 持以自衒 且曰 此足以禦宼防身 往往愚俗必謂禪家流固當若是 豈不薄吾佛之遺訓乎
●示衆; 於禪林中 禪師爲門弟大衆等開示宗要 稱爲示衆 又作垂語 垂示 六祖壇經定慧品 師示衆云 善知識 我此法門以定慧爲本 諸經錄中有關示衆一詞 以本經所載爲最早
●知事; 僧院司事務僧之總名 禪院諸役擬朝官 分兩班 都寺 監寺 副寺 維那 典座 直歲諸役爲東班 稱此等僧爲知事
●頭首; 禪林中 列於西序之主要職位 其職權在於統理大衆 相對於東序之知事而言 西序之首座 書記 藏主 知客 浴主 庫頭 統稱六頭首 [百丈淸規四西序頭首 禪苑淸規三請頭首]
●行者; 乃指觀行者 或泛指一般佛道之修行者 又稱行人修行人 禪林中 行者乃指未出家而住於寺內幇忙雜務者 行者之居所稱爲行堂 行堂之主首稱行堂主 或單稱堂主 行者有剃髮者 亦有未剃髮而攜帶家眷者 種類繁多 例如 參頭行者 副參行者 執局行者(方丈行者 六局行者等之總稱) 庫司行者(隨從都寺) 堂司行者(隨從維那) 庫子(副寺寮之行者) 客頭行者 茶頭行者 喝食行者(飮食時 唱報飯食湯等名稱者 喝卽唱之意) 供頭行者(又作供過行者 卽分配飯食者) 直殿行者 衆寮行者 門頭行者等 年少之行者 稱爲童行 道者 童侍 僧童 或稱驅烏沙彌 沙喝(飯食時之嚮導 相當於充任喝食沙彌之意) 聽叫 類同於行者 有所謂淨人(又作苦行) 指不剃髮而專爲僧衆服務者 蓋禪林職位之繁多 猶如朝廷之文武兩班 以共維繫寺院之法命 然此職位制度 自宋代以降 諸宗融合 於一般較大之寺院皆循此制 而小寺院則無此細分 [百丈淸規四大衆章 禪苑淸規二 三 四 八 百丈淸規證義記六 象器箋職位類]
●人力; 僕人 傭工
●傅大士; 傅翕(497-569) 南朝梁代禪宗著名之尊宿 東陽烏傷(浙江義烏)人 字玄風 號善慧 又稱善慧大士 魚行大士 傅大士 雙林大士 東陽大士 烏傷居士 與寶誌共稱爲梁代二大士 嘗與里人共捕魚 每得魚則盛於竹籠 沈入深水 竝謂 欲去者去 欲止者留 時人以之爲愚 年十六 娶劉氏女妙光 生普建普成二子 年二十四 於沂水取魚 適逢胡僧嵩頭陀(名達摩) 遂棄魚具 入烏傷縣松山雙檮樹下結庵 自號雙林樹下當來解脫善慧大士 自稱由兜率天宮來說法 日常營作 夜歸行道 苦行七年 自謂得首楞嚴定 竝能通儒道典籍 學徒漸集 衆皆虔誠精進 不惜身命 梁大通六年(534) 遣弟子傅暀上書致武帝 獻上中下三善之策 閏十二月 帝召入禁闕 講經於重雲殿 大同元年(535)四月 還松山 五年 重赴鍾山 於壽光殿與帝論眞諦 作偈頌呈之 六年(一說五年) 營造松山雙檮樹間之佛殿 九重塼塔 竝於斯地寫經律千餘卷 此卽雙林寺 七年 自宣爲賢劫千佛之一佛 十年 捨屋宇田地 設大施會 太淸二年(549) 欲焚身供養三寶 弟子堅留之 代士燒身者十九人 士乃止之 未久亂起 梁亡 傅翕家居徒衆甚多 講說不輟 每率徒衆焚指燃臂以供佛 嘗營齋轉法華經二十一遍 屢設無遮會 竝於會稽鑄寶王像十尊 爲便於讀大藏經 建有輪藏 令衆轉之 可得大利益 故後世所作輪藏皆安置其父子三人之像 此外 士於天台之一心三觀有其獨到之領略 而以三觀四運爲其心要 倡導三觀一心四運推檢之說 陳太建元年四月 集弟子告誡畢 趺坐入寂 壽七十三 弟子葬之於雙林山頂 號彌勒下生 撰有心王銘 語錄四卷 還源詩等 [善慧大士錄 續高僧傳二十五 傳燈錄二十七 同三十 神僧傳四]
●洞山; 此指守初(910-990) 宋代雲門宗僧 鳳翔(今屬陝西)傅氏 年十六依渭州崆峒志諗薙髮 詣涇州淨圓受具 後至長沙 依雲門文偃悟旨 出住洞山 法道大宏 太平興國六年(981) 朝廷賜徽號紫衣 住山四十年 有語錄行世 [禪林僧寶傳八 續傳燈錄十二 五燈會元十五]
●犢鼻裩; 又作犢鼻褌 卽短裩 一說圍裙 史記司馬相如列傳 裴駰集解引韋昭曰 犢鼻褌 今三尺布作 形如犢鼻 由是 有形似之說 [百度百科]
●文殊; 三藏法數七 文殊三名[出翻譯名義] 一文殊師利 梵語文殊師利 華言妙德 謂具不可思議種種微妙功德 故名妙德 二滿殊尸利 梵語滿殊尸利 華言妙首 謂具不可思議微妙功德 在諸菩薩之上 故名妙首 三曼殊室利 梵語曼殊室利 華言妙吉祥 謂具不可思議微妙功德 最勝吉祥 故名妙吉祥
●普賢; 梵名邲輸跋陀 又作三曼多跋陀羅 或譯曰普賢 或作遍吉 主一切諸佛之理德定德行德 與文殊之智德證德相對 卽理智一雙 行證一雙 三昧般若一雙也 故以爲釋迦如來之二脅士 文殊駕師子侍佛之左方 普賢乘白象 侍佛之右方(今反智右理左之說者 示理智融通之義 又胎藏界之次第右蓮左金也) 此理智相卽 行證相應 三昧與般若全者 卽毘盧舍那法身佛也 華嚴一經之所明 歸於此一佛二菩薩之法門 故稱爲華嚴三聖 [法華義疏十二 探玄記二 大日經疏一]
●較些子; 較 差也 些子 卽些少 謂有些少的差異也 兼帶否定與肯定兩意
●嗚呼; 祖庭事苑五 西漢注 嗚呼 或作於戲 或作烏虛 或烏呼者 義皆同 蓋嘆聲也 俗之讀者 隨字而別文 曲爲解釋 云有吉凶善惡之殊 是不通其大旨也 義例具詩及尙書 不可一一徧擧之
●鄧隱峰; 唐代僧 邵武(今屬福建)鄧氏 幼若不慧 父母聽其出家 初參馬祖 復來往石頭 兩次不捷 後印心馬大師 元和年間(806-820) 欲登五臺山 於淮西出發途中 受阻於叛軍吳元濟與官軍交戰 遂擲錫空中 飛身而過 兩軍將兵見之 戰意頓息 師旣顯神異 慮成惑衆 遂入五臺山 於金剛窟前倒立而寂 [祖堂集十五 宋高僧傳二十一 傳燈錄八]
●普化; (?-860) 唐代僧 嗣盤山寶積 南嶽下三世 日本禪宗支派普化宗之祖 姓氏壽皆不詳 寶積示寂後 師卽遊化北地鎭州 佐贊於臨濟 臨濟住未久 師全身脫去 [宋高僧傳二十 傳燈錄十 釋氏稽古略三]
●流亞; 同一類的人或物
옥천호(玉泉皓; 承皓) 선사가 원풍(元豐; 1078-1085) 간 양양(襄陽) 곡은(谷隱)에서 중승(衆僧)의 수좌(首座)였고 명망(名望; 望)이 제방(諸方)에 솟았다(聳). 무진거사(無盡居士) 장공(張公)이 경서남로(京西南路; 南宋에서 설치한 地方行政區)에 봉사(奉使)하다가 나아가(就) 예알(禮謁)하였다. 문왈(問曰) 스님이 어떤 사람에게서 득법(得法)하셨습니까. 호왈(皓曰) 복주(復州) 북탑광(北塔廣; 思廣) 화상입니다. 공왈(公曰) 그(伊)와 더불어 상계(相契)한 것을 가히 득문(得聞)하겠습니까. 호왈(皓曰) 다만 그(伊)는 사람에게 설파(說破)해 줌을 긍정하지 않습니다. 공(公)이 그 말을 좋게 여겨(善) 영주(郢州) 대양(大陽)에서 개법(開法)함에 이르렀다(致). 이때 곡은(谷隱)의 주자(主者)가 사사로이 기뻐하며 이르되 나의 수좌(首座)가 출세(出世)하여 치소(緇素)를 성집(盛集)하였구나 하며 흠염(歆艶; 貪스럽고 아름답다)으로 삼았다. 호(皓)가 등좌(登座; 法座에 오름)하여 가로되 승호(承皓)가 곡은(谷隱)에 있은 지 10년 동안 일찍이 곡은의 한 방울 물을 마시거나 곡은의 한 알의 쌀도 씹지(嚼) 않았다. 너희가 만약 알지 못한다면(不會來) 대양(大陽; 承皓)이 너희를 위해 설파하리라. 주장(拄杖)을 가지고(擕) 하좌(下座)하여 오연(傲然; 오만스러움)히 떠났다. 이윽고(尋) 옥천(玉泉)으로 옮겼다. 시중(示衆)이 있어 가로되 하룻밤에 비가 방팽(霶烹; 큰 비가 오는 소리)하더니 포도붕(蒲萄棚)을 타도했다. 지사(知事)와 두수(頭首), 행자(行者)와 인력(人力)이 주(拄; 버티다)하는 자는 주하고(拄底拄) 탱(撐; 버티다)하는 자는 탱하면서(撑底撑) 탱탱주주(撐撐拄拄)하다가 천명(天明)에 이르렀지만 의구히 가련생(可憐生; 생은 조사)이다. 스스로 이르되 이것은 법신향상사(法身向上事)를 송(頌)했다. 예컨대(如) 부대사(傅大士)가 이르되 빈손으로 서두(鋤頭; 호미. 頭는 조사)를 잡았다와 동산(洞山; 守初)이 이르되 오대산(五臺山) 위에서 구름으로 밥을 찐다 한 것은 다만 법신변사(法身邊事)를 송득(頌得)했다. 그러나 사람됨(爲人)이 초방(超放; 高超豪放)하여 범성(凡聖)으로써 의논함이 쉽지 않다. 일찍이 독비곤(犢鼻裩)을 제작(製作)해 역대조사(歷代祖師)의 이름을 써서(書) 입었다(服之). 이에 가로되 오직 문수(文殊)와 보현(普賢)이 있어 조금은 상당하다(較些子). 다만(且) 대상(帶上)에 쓴지라(書) 고로 총림에서 명목(名目)해 호포곤(皓布裩)이라 했다. 시승(侍僧)이 있어 이를 본받았다(效之). 호(皓)가 보고서 꾸짖으며 가로되 네가 무슨 도리를 갖추었기에 감히 희사(戲事)로 삼느냐. 구혈(嘔血)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중이 이윽고 녹문(鹿門)에서 말한 바와 같이 죽었다(逝). 오호(嗚呼)라, 세(世; 세상)에서 같은 바의 것이나 도가 다른 바의 것은 자취(跡)일 따름이다. 호(皓)의 창도(唱道; 도를 宣唱함)는 정견(正見)을 개활(開豁)했다. 시적(示跡)에 이르러 수상(殊常)했고 곧 헤아리지(測) 못했다. 사람들이 왕석(往昔)에서 구했으니 거의(殆) 등은봉(鄧隱峰)이나 보화(普化)의 유아(流亞)인가 했다.
●玉泉皓; 승호(承皓; 1011-1091)니 북송 운문종승. 미주(사천) 단릉 사람이며 속성은 왕. 천성년 간(1023-1031) 대력원에 의지해 출가했음. 후에 제방에 유학(遊學)하다가 복주에 이르러 북탑사광선사(北塔思廣禪師; 운문하 3세)를 참해 현지(玄旨)를 체달(體達)하고 대자재삼매를 얻고 이에 그의 법을 이었음. 일찍이 독비곤(犢鼻裩)을 제작해 역대 조사의 이름을 쓰고 말하되 오직 문수와 보현이 조금 상당하다(較些子). 또 이 말을 가져다 띠(帶) 위에 쓴지라 고로 총림에서 스님을 호칭하기를 호포곤(皓布裩)이라 했음. 원풍년 간(1078-1084) 양양 곡은산에 거주했고 후에 형문 옥천사(玉泉寺)로 이주했음. 원우 6년 시적하기 전 문인(門人)이 그를 위요하자 스님이 웃으며 가로되 나의 나이 81에 늙어 죽으니 시체를 마주 들고 나가라. 아랑(兒郞; 남자. 남아)이 가지런히 힘을 붙일지니 1년 3백6십 일이다. 말을 마치자 적(寂)했으니 나이는 81 [연등회요28. 속등록6. 속전등록5. 불조통재19].
●無盡居士; 장상영(張商英; 1043-1121)이니 북송 황룡파 거사. 촉주(蜀州; 사천 숭경) 신진(新津) 사람이며 자는 천각(天覺)이며 호는 무진거사(無盡居士). 어릴 적부터 곧 예기(銳氣)가 척당(倜儻; 근기가 卓異)하여 하루에 만언(萬言)을 외웠음. 처음에 통주주부(通州主簿)에 임용되었는데 어느 날 입사(入寺)하여 장경(藏經)의 권책(卷冊)이 제정(齊整)함을 보고 발끈하며 가로되 우리 공성(孔聖)의 서책이 여기에도 미치지 못하겠는가 하고는 무불론(無佛論)을 지으려고 했음. 후에 유마경을 읽고 느끼는 게 있어 이에 불법에 귀신(歸信)했음. 신종(神宗; 1068-1085) 때 왕안석(王安石)의 추거(推擧)를 받아 입조(入朝)했고 대관년 간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가 되었으며 오래지 않아 사건으로 인해 외지(外地)로 적강(謫降)되었다가 강서운사(江西運使)로 좌천(左遷)됨에 이르렀음. 동림사(東林寺) 상총(常總; 황룡을 이었음)을 예알(禮謁)하고 그의 인가(印可)를 얻었음. 다시 도솔사 종열(從悅; 황룡하 2세)에게 투입해 암두(巖頭)의 말후지구(末後之句)로 나아가 참구하는 바가 있었고 그의 법 이음을 얻었음. 소성(紹聖; 1094-1098) 초년(初年) 부름을 받아 좌사간(左司諫)이 되었는데 글을 올려 사마(司馬) 광려공(光呂公)의 저서를 논함으로 인해 좌천되었고 또 늘 당시의 재상 채경(蔡京)을 욕한지라 고로 여러 차례 폄강(貶降)을 받았음. 대관(大觀) 4년(1110) 6월에 하늘이 오래 가물었는데 칙명을 받고 기우(祈雨)하여 저녁에 홀연히 비가 와 휘종(徽宗)이 크게 기뻐하며 상림(商霖) 2자(字)를 주었음. 후에 채경(蔡京)의 참언(讒言)을 받아 지하남부(知河南府)로 폄강(貶降)되었음. 선화(宣和) 4년에 죽었으니 나이는 79며 사시(賜諡)가 문충(文忠). 저서에 호법론(護法論) 1권이 있음 [석씨계고략4. 거사전28. 송사351].
●奉使; 1. 봉명(奉命)하여 출사(出使)함. 2. 봉명하여 출사하는 사자(使者).
●復州; 지금의 호북 천문.
●北塔廣; 사광(思廣)이니 송대 운문종승. 오조사계(五祖師戒)에 의지해 법을 받았고 복주 북탑(北塔)에 거주했음 [오등회원15. 속전등록2].
●郢州; 지금의 호북 종상. 수(隋) 이전의 영주는 일반으로 후래의 악주(鄂州)를 가리키며 치소(治所)는 지금의 무한시(武漢市) 무창에 있었음. 남조(南朝) 송(宋)은 형(荊)ㆍ상(湘)ㆍ강(江)ㆍ예(豫) 4주(州)로부터 쪼개어 설치했음. 수(隋)가 진(陳)을 멸하자 고쳐 악주라 했고 다른 1영주(郢州)는 지금의 종상(鍾祥)을 치소로 삼았음 [백도백과]. ▲호광명승지8 형주부(荊州府)에 가로되 춘추 초문왕(楚文王)이 단양으로부터 여기로 도읍을 옮기고 이를 일러 영도(郢都)라 했다.
●出世; 선사(禪師)가 자신을 수지(修持)하여 공(功)을 이룬 후에 재차(再次) 인간으로 귀환하여 중생을 교화함을 또한 출세라고 일컬음. 혹은 주지(住持)의 직(職)에 임명됨을 입거나 높은 계위(階位)의 승관(僧官)에 승진(昇進)하는 등을 다 일컬어 출세라고 함.
●緇素; 1. 또 치백(緇白)으로 일컬음. 출가한 무리는 통상 검은 옷을 입으므로 고로 치(緇)로써 대칭(代稱)함. 재가자는 흰 옷을 입으므로 고로 또 백의로 일컬음. 치소는 곧 출가와 재가의 병칭임. 뜻으로 이르자면 도속(道俗)이며 승속(僧俗)임. 2. 분변(分辨). 여기에선 1을 가리킴.
●拄杖; 또 주장(柱杖)ㆍ주장(主杖)으로 지음. ▲조정사원8 주장(拄杖) 불타가 취봉산(鷲峯山; 鷲는 독수리 취)에 계셨다. 어떤 늙은 필추(苾芻)가 등산하여 올라가서 내려오다가 발이 미끄러져 땅에 자빠졌다. 불타가 말씀하시되 응당 주장자(拄杖子; 子는 조사)를 수용(受容; 畜은 受容할 축)하라. 불타의 허락을 들은 다음 6중(衆)이 곧 바로 금은(金銀)과 잡채(雜綵; 綵는 비단 채) 등의 물건으로써 그 지팡이에 새기고 장식(裝飾)했다. 세속의 무리가 천박(淺薄)함을 혐오(嫌惡)하자 필추가 불타에게 사뢰었다. 불타가 말씀하시되 필추가 두 가지 인연이 있어 응당 주장자를 수용(畜)한다. 1은 늙고 여위어 힘이 없음이며 2는 병고(病苦)가 몸에 걸림이다(以上의 인연은 毘奈耶雜事六에 나옴). 또 제계(制戒)하여 대소(大小; 크고 작음. 크기)가 굵은 손가락을 지남을 얻지 못하게 했다. 바로 여금(如今)에 선가(禪家)가 유산(游山)하는 주장자이다. 혹은 위험을 타거나 험난을 건너면서 힘을 도우기 위한 연고이다. 지팡이 끝이 가늘고 약하여 드디어 작은 가지만큼 두고 쇠를 꿰어 길게 한 것이 이것이다. 행각하는 고사(高士; 高潔한 사람)가 많이들 굵고 무겁고 단단한 나무를 휴대(携帶)하여 가지고서 스스로 자랑하면서 단지 가로되 이것은 족히 도적을 막고 몸을 방어함에 쓰는 것이다 하매 왕왕(往往) 어리석은 속인(俗人)이 반드시 이르기를 선가류(禪家流)가 진실로 이와 같음이 마땅하다 하나니 어찌 우리 불타의 유훈(遺訓)을 경박(輕薄)히 여김이 아니겠는가.
●示衆; 선림 중에서 선사가 문제(門弟)나 대중 등을 위해 종요를 개시함을 일컬어 시중이라 함. 또 수어(垂語)ㆍ수시(垂示)로 지음. 육조단경 정혜품. 스님이 시중(示衆)해 이르되 선지식이여 나의 이 법문은 정혜를 근본으로 삼는다. 모든 경록(經錄) 중 시중 1사(詞)에 유관한 것은 본경에 실린 것으로써 최조(最早)로 삼음.
●知事; 승원(僧院)에서 사무(事務)를 맡은 승려의 총명(總名)임. 선원(禪院)의 제역(諸役)은 조관(朝官)을 본떠 양반(兩班)으로 나누었으니 도사(都寺)ㆍ감사(監寺)ㆍ부사(副寺)ㆍ유나(維那)ㆍ전좌(典座)ㆍ직세(直歲)의 제역(諸役)이 동반(東班)이 되며 이들 승려를 일컬어 지사(知事)라 함.
●頭首; 선림 중에서 서서(西序)의 주요한 직위의 반열(班列)이며 그 직권은 대중을 통리(統理)함에 있음. 동서(東序)의 지사를 상대하여 말함. 서서의 수좌ㆍ서기ㆍ장주ㆍ지객ㆍ욕주ㆍ고두를 통칭 6두수라 함. [백장청규4서서두수. 선원청규3청두수].
●行者; 곧 관행(觀行)하는 자를 가리킴. 혹은 널리 일반(一般)의 불도(佛道)의 수행자를 가리킴. 또 호칭이 행인(行人)ㆍ수행인임. 선림 중에서의 행자는 곧 출가하지 않고 사내(寺內)에 거주하면서 바쁜 잡무(雜務)를 도우는 자를 가리킴. 행자의 거소(居所)를 일컬어 행당(行堂)이라 하고 행당의 주수(主首)를 일컬어 행당주(行堂主), 혹 단칭(單稱)이 당주(堂主)임. 행자는 머리를 깎은 자도 있고 또한 머리를 깎지 않고 가권(家眷; 가족)을 휴대한 자도 있음. 종류가 번다(繁多)하나니 예여(例如) 참두행자(參頭行者)ㆍ부참행자(副參行者)ㆍ집국행자(執局行者; 方丈行者와 六局行者 등의 總稱)ㆍ고사행자(庫司行者; 都寺를 隨從함)ㆍ당사행자(堂司行者; 維那를 隨從함)ㆍ고자(庫子ㆍ副寺寮의 행자)ㆍ객두행자(客頭行者)ㆍ다두행자(茶頭行者)ㆍ할식행자(喝食行者; 飮食 시 飯食湯 등의 명칭을 唱報하는 자니 喝은 곧 唱의 뜻)ㆍ공두행자(供頭行者; 또 供過行者로 지음. 곧 飯食을 분배하는 자)ㆍ직전행자(直殿行者)ㆍ중료행자(衆寮行者)ㆍ문두행자(門頭行者) 등임. 연소(年少)한 행자는 일컬어 동행(童行)ㆍ도자(道者)ㆍ동시(童侍)ㆍ시동(僧童)이라 하고 혹 명칭이 구오사미(驅烏沙彌)ㆍ사할(沙喝; 飯食 시의 嚮導니 喝食을 充任하는 沙彌의 뜻에 상당함)ㆍ청규(聽叫)임. 행자와 종류가 같은 것은 이른 바 정인(淨人; 또 苦行으로 지음)이 있으며 머리를 깎지 않고 오로지 승중을 위해 복무하는 자를 가리킴. 대개 선림 직위의 번다함은 마치 조정의 문무양반(文武兩班)과 같아서 사원의 법명(法命)을 한가지로 유계(維繫; 유지하며 聯系)함. 그러나 이런 직위 제도는 송대(宋代) 이강(以降; 이후)으로부터 제종(諸宗)에서 융합하여 일반의 조금 큰 사원에선 모두 이 제도를 따랐지만 작은 사원은 곧 이런 세분(細分)이 없었음 [백장청규4대중장. 선원청규2, 3, 4, 8. 백장청규증의기6. 상기전직위류].
●人力; 복인(僕人)과 용공(傭工; 고용되어 남을 위해 做工하는 사람).
●傅大士; 부흡(傅翕; 497-569)이니 남조 양대(梁代) 선종의 저명한 존숙이며 동양 오상(절강 의오) 사람이니 자는 현풍(玄風)이며 호는 선혜(善慧). 또 호칭이 선혜대사(善慧大士)ㆍ어행대사(魚行大士)ㆍ부대사(傅大士)ㆍ쌍림대사(雙林大士)ㆍ동양대사(東陽大士)ㆍ오상거사(烏傷居士). 보지(寶誌)와 공칭(共稱)하여 양대(梁代)의 2대사(大士)라 함. 일찍이 마을 사람과 함께 물고기를 잡았는데 매번 물고기를 얻으면 곧 죽롱(竹籠)에 담아 깊은 물에 담가 넣고는 아울러 이르되 떠나려는 자는 떠나고 머무려고 하는 자는 머물러라. 당시의 사람들이 이를 어리석음으로 삼았음. 나이 16에 유씨(劉氏)의 딸 묘광(妙光)에게 장가들어 보건(普建)과 보성(普成) 두 아들을 낳았음. 나이 24에 기수(沂水)에서 물고기를 취하는데 마침 호승(胡僧) 숭두타(嵩頭陀; 이름이 달마)를 만났고 드디어 어구(魚具)를 버리고 오상현 송산(松山) 쌍도수(雙檮樹) 아래 들어가 암자를 엮고 스스로 호하기를 쌍림수하당래해탈선혜대사(雙林樹下當來解脫善慧大士)라 했음. 자칭하기를 도솔천궁으로부터 와서 설법한다 했음. 낮에는 늘 영작(營作)하고 밤에는 돌아와 행도(行道)하면서 고행하기 7년이었음. 스스로 이르기를 수릉엄정을 얻었다 했고 아울러 능히 유도(儒道)의 전적을 통달했음. 학도가 점차 모였고 대중이 모두 건성(虔誠)으로 정진하며 신명을 아끼지 않았음. 양 대통 6년(534) 제자 부왕을 보내어 무제에게 서신을 올려 이르게 했으며 상중하 3선(善)의 책략을 바쳤음. 윤 12월 무제가 금궐(禁闕)로 불러들여 중운전(重雲殿)에서 강경(講經)하게 했음. 대동 원년(535) 4월 송산으로 돌아갔음. 5년 다시 종산(鍾山)에 다다라 수광전(壽光殿)에서 무제와 진제(眞諦)를 논했고 게송을 지어 그에게 보였음. 6년(일설에 5년) 송산 쌍도수 사이의 불전(佛殿)과 9중(重)의 전탑(塼塔)을 영조(營造)하고 아울러 이 땅에서 경률 천여 권을 서사했으니 이것이 곧 쌍림사(雙林寺)임. 7년 스스로 선포하기를 현겁천불의 1불(佛)이라 했음. 10년 옥우(屋宇)와 전지(田地)를 희사해 대시회(大施會)를 베풀었음. 태청 2년(549) 분신하여 삼보에 공양하려 하자 제자들이 굳게 그것을 만류했으며 대사를 대신해 소신(燒身)한 자가 19인이었음. 대사가 이에 그것을 그치게 했음. 오래지 않아 난이 일어나 양(梁)이 망했음. 부흡가(傅翕家)에 거처하는 도중이 매우 많았으며 강설을 거치지 않았음. 매번 도중을 거느리며 손가락을 태우고 팔을 태워 공불(供佛)했음. 일찍이 영재(營齋)하며 법화경 21편(遍)을 전독했고 여러 차례 무차회(無遮會)를 개설했음. 아울러 회계(會稽)에 보왕상(寶王像) 10존(尊)을 주성(鑄成)했고 대장경을 전독(轉讀)하기에 편하도록 윤장(輪藏)을 건립했으며 대중으로 하여금 그것을 돌리게 하면서 가히 대이익을 얻게 했음. 고로 후세에 만든 바 윤장에는 모두 그 부자 3인의 형상을 안치했음. 이 밖에 대사는 천태의 일심삼관(一心三觀)에 그만이 독도(獨到)한 영략(領略)이 있었고 삼관사운(三觀四運)을 그 심요(心要)로 삼아 삼관일심사운추검(三觀一心四運推檢)의 설을 창도(倡導)했음. 진(陳) 태건 원년 4월 제자를 소집해 고계(告誡)를 마치자 부좌(趺坐)하고 입적했으니 나이는 73. 제자들이 쌍림의 산정에 장사 지내고 미륵하생이라고 호했음. 찬술(撰述)에 심왕명ㆍ어록 4권ㆍ환원시 등이 있음 [선혜대사록. 속고승전25. 전등록27, 동30. 신승전4].
●洞山; 여기에선 수초(守初; 910-990)를 가리킴. 송대 운문종승. 봉상(지금 섬서에 속함) 부씨(傅氏). 나이 16에 위주 공동지심에게 의지해 머리를 깎았고 경주 정원에게 나아가 수구(受具)했음. 후에 장사(長沙)에 이르러 운문문언(雲門文偃)에게 의지해 오지(悟旨)했음. 출세해 동산(洞山)에 거주하며 법도(法道)를 크게 넓혔으며 태평흥국 6년(981) 조정에서 휘호(徽號)와 자의(紫衣)를 주었음. 주산(住山)하기 40년이었고 어록이 있어 세상에 유행함 [선림승보전8. 속전등록12. 오등회원15].
●犢鼻裩; 또 독비곤(犢鼻褌)으로 지음. 곧 짧은 잠방이. 일설엔 위군(圍裙; 앞치마)이라 함. 사기 사마상여열전 배인집해에 위소(韋昭)를 인용해 가로되 독비곤(犢鼻褌)은 여금에 3척의 베로 만든다. 형상이 독비(犢鼻)와 같다. 이로 말미암아 형상이 비슷하다는 설이 있음 [백도백과].
●文殊; 삼장법수7. 문수삼명(文殊三名) [출번역명의] 1. 문수사리(文殊師利; 梵 Manjusri) 범어 문수사리는 화언(華言)으론 묘덕(妙德)이다. 이르자면 불가사의한 갖가지 미묘한 공덕을 갖춘지라 고로 이름이 묘덕이다. 2. 만수시리(滿殊尸利) 범어 만수시리는 화언으론 묘수(妙首)다. 이르자면 불가사의한 미묘한 공덕을 갖추어 모든 보살의 상(上)에 있는지라 고로 이름이 묘수다. 3. 만수실리(曼殊室利) 범어 만수실리는 화언으론 묘길상(妙吉祥)이다. 이르자면 불가사의한 미묘한 공덕을 갖추어 가장 수승(殊勝)한 길상인지라 고로 이름이 묘길상이다.
●普賢; 범명은 필수발타(邲輸跋陀; 梵 Viśvabhadra) 또 삼만다발타라(三曼多跋陀羅; 梵 samantabhadra)로 지음. 혹 번역해 가로되 보현이며 혹 편길(遍吉)로 지음. 일체제불의 이덕(理德)ㆍ정덕(定德)ㆍ행덕(行德)을 주재함. 문수의 지덕(智德)ㆍ증덕(證德)과 상대됨. 곧 이지(理智)가 한 쌍이며 행증(行證)이 한 쌍이며 삼매와 반야가 한 쌍임. 고로 석가여래의 두 협사(脅士)로 삼음. 문수는 사자를 타고 불타의 좌방(左方)에 시립하고 보현은 백상을 타고 불타의 우방에 시립함은(여금에 반대로 智右理左를 설하는 것은 理智가 융통함의 뜻을 보임임. 또 胎藏界의 차제는 右蓮左金임) 이것은 이지(理智)가 상즉(相卽)하며 행증(行證)이 상응함임. 삼매와 반야가 전체인 것은 곧 비로사나 법신불임. 화엄 1경(經)에서 밝히는 바가 이 1불 2보살의 법문으로 귀납(歸納)하는지라 고로 호칭하여 화엄삼성(華嚴三聖)이라 함 [법화의소12. 탐현기2. 대일경소1].
●較些子; 교(較)는 차(差)며 사자(些子)는 곧 사소임. 이르자면 사소한 차이가 있음. 부정과 긍정의 두 뜻을 겸대함.
●嗚呼; 조정사원5. 서한주(西漢注) 오호(嗚呼) 혹은 오희(於戲; 於는 탄식할 오)로 지으며 혹은 오허(烏虛) 혹은 오호(烏呼)로 짓는 것은 뜻이 다 같다. 대개 탄식하는 소리다. 세속에서 읽는 자가 글자를 따라 글을 구별하여 자세히 해석해 이르기를 길흉과 선악의 다름이 있다 함은 이는 그 대지(大旨)를 통달하지 못했음이다. 의례(義例)는 시(詩)와 및 상서에 구비했거니와 가히 낱낱이 그것을 두루 들지 못한다.
●鄧隱峰; 당대승. 소무(지금 복건에 속함) 등씨. 어릴 적에 슬기롭지 못한 것 같았음. 부모가 그의 출가를 허락했음. 처음은 마조를 참했고 다시 석두로 내왕했는데 두 차례 민첩하지 못했음. 후에 마대사에게서 인심(印心)했음. 원화년 간(806–820) 오대산에 오르려고 했는데 회서(淮西)에서 출발한 도중에 반군 오원제(吳元濟)와 관군이 교전함에 막힘을 받았음. 드디어 석장을 공중에 던지고 몸을 날려 지나가자 양군(兩軍)의 장병이 이를 보고 전의(戰意)가 문득 쉬어졌음. 스님이 이미 신이(神異)를 나타내고는 혹중(惑衆; 대중을 眩惑함)을 이룰까 염려하여 드디어 오대산에 들어가 금강굴 앞에서 도립하여 입적했음 [조당집15. 송고승전21. 전등록8].
●普化; (?-860) 당대승 반산보적(盤山寶積)을 이었으니 남악하 3세. 일본 선종의 지파(支派) 보화종(普化宗)의 개조(開祖). 성씨와 나이는 다 상세치 못함. 보적(寶積)이 시적한 후 스님이 곧 북지(北地)의 진주(鎭州)에서 유화(遊化)하며 임제를 좌찬(佐贊)했음. 임제가 머문 지 오래지 않아 스님이 전신(全身)으로 벗고 갔음(죽음) [송고승전20. 전등록10. 석씨계고략3].
●流亞; 동일한 무리의 사람이나 혹 사물.
나호야록 주문제본
2025년 仲秋 번역필. 합 660쪽. 本註補註 合計 1,320 目. 미출간. 원문과 출처가 분명한 한문 주석을 넣고 다시 전체를 한글 번역. 주문 요청이 있을 시 인쇄소 에 부탁해 5일 내에 복사 제본해 발송합
pyungsims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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