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州資福善禪師 古田人 姓陳氏 少有逸氣 祝髮於寶峰院 卽出嶺參侍石霜慈明禪師 當時龍象如翠巖眞公尤所屈服 故天下叢林知有善侍者名 及禮辭慈明還閩 慈明口佔偈調之曰 七折米飯 出鑪胡餠 自此一別 稱鎚落井 旣而出世里中鳳林 逮遷資福 則碌碌無聞焉 以故言句亦罕傳於世 有三玄要訣偈曰 三玄三要與三訣 四海禪人若爲別 西瞿耶土競喧鍧 北鬱單越人打鉄 馬鳴龍樹擬何云 彌勒金剛皆咬舌 文殊大笑阿呵呵 迦葉欲言言不得 言不得 釋迦老子頭鬚白 頭髮白 一二三四五六七 又示衆曰 閑拋三寸刃鋒鋩 帀地冰霜定紀綱 若是丈夫眞意氣 任君敲磕振風光 二曰 垂鈎四海浪吞侵 罕遇獰龍動角鱗 獅子嚬呻全意氣 縱橫誰是顯當人 嗚呼 善與黃龍 楊岐 翠巖爲鴈行 況蚤於諸公間 言論風旨亦優 爲之何得歸鄕 卒中慈明之調耶
●福州; 今福建省福州 南北朝時代晉安 隋代建安 唐代稱福州 附近有雪峰山
●資福善; 宋代臨濟宗僧 依潭州石霜山慈明楚圓得法 出世福州古田資福寺 [續燈錄七]
●祝髮; 祝 切斷之意 故祝髮與剃髮薙髮同 卽出家落髮之謂
●慈明; 楚圓(986-1039) 宋代臨濟宗僧 全州淸湘(廣西桂林)人 俗姓李 少爲儒生 潛心擧業 二十二歲迴心向道 於湘山隱靜寺得度 未久遊襄沔之間 與守芝谷泉結伴入洛陽 聞善昭之道望爲天下第一 遂赴汾州 依止二年 未許入室 每見必詬罵 或毁詆諸方 所訓亦皆流俗鄙事 師一夕訴之 語未竟 昭熟視而罵曰 是惡知識 敢裨販我 擧杖逐之 師欲伸解 昭掩其口 師忽大悟曰 是知臨濟道出常情 遂服役約十二年(一說七年) 盡領其旨 後至幷州 訪唐明智嵩 更與當世名士楊大年李遵勗 時聚論道 後欲歸鄕省母 過筠州(四川) 於洞山見曉聰 依止三年 又遊仰山 時楊大年寄書宜春太守黃宗且 請師住於袁州(江西)南源廣利寺 居三年 辭而省母 又謁神鼎洪諲 洪諲大加讚賞 由是聲名大揚 旣主潭州(湖南)道吾之席 次住石霜山崇勝寺 又轉南嶽福嚴寺 後遷潭州興化寺 寶元二年正月 於潭州興化寺示寂 壽五十四 諡號慈明禪師 法嗣五十人中 以黃龍慧南 楊岐方會最爲知名 各成一派 遺有石霜楚圓禪師語錄一卷(慧南重編) [續傳燈錄三 禪林僧寶傳二十一]
●龍象; (一)指象中之殊勝者 維摩經中不思議品 譬如龍象蹴踏 非驢所堪 注維摩詰經六 肇曰 能不能爲諭 象之上者 名龍象 維摩經義疏四謂 稱爲龍象 非有二物 如好馬名龍馬 故好象稱龍象 (二)指龍象各爲水上陸上之最有力者 祖庭事苑一 智度論(3)云 言其力大 龍 水行中力大 象 陸行中力大 今以鉅禪碩師比之龍象 此指(二).
●翠巖眞; 可眞(?-1064) 宋代臨濟宗僧 福州(福建)長谿人 世稱眞點胸 石霜楚圓之法嗣 曾住隆興府(江西)翠巖山 故又稱翠巖可眞 後遷潭州(湖南長沙)道吾山 治平元年示寂 遺有翠巖眞禪師語要一卷 收於續古尊宿語要 [續燈錄七 聯燈會要十四 五燈會元十二]
●胡餠; 又稱胡麻餠 祖庭事苑一 用胡麻作餠 故曰胡餠 故釋名曰 胡餠 言以胡麻著之也 前趙錄云 石季龍諱胡 改爲麻餠 胡麻 卽油麻也
●碌碌; 指平凡 無所作爲
●三玄三要; 是臨濟義玄接引學人的施設 臨濟語錄 上堂 僧問 如何是第一句 師云 三要印開朱點側(有本作窄) 未容擬議主賓分 問 如何是第二句 師云 妙解豈容無著問 漚和爭負截流機 問 如何是第三句 師云 看取棚頭弄傀儡 抽牽都來裏有人 師又云 一句語須具三玄門 一玄門須具三要 有權有用 汝等諸人 作麽生會 下座
●西瞿耶; 西瞿耶尼 佛經中所稱四大洲之一 位于須彌山西方鹹海中 ▲翻譯名義集三 西瞿耶尼 此云牛貨 亦翻取與 藏疏云 以彼多牛以牛爲貨 俱舍鈔云 劫初時 因高樹下有一寶牛 爲貨易故 西域記云 西瞿陀尼洲 舊曰瞿那尼 又云劬伽尼訛 俱舍云 西牛貨洲壽五百歲 相圓無缺 長十六肘
●北鬱單越; 又作北欝單越 欝與鬱同 又曰北鬱怛越 北俱盧洲 北拘盧洲 北洲 北單越 鬱多羅究留 嗢怛羅句嚧 四大洲之一 此云勝處 勝生 高上 諸經論有關此洲之記載極多 所載者不儘一致 然皆以此洲爲四洲之最勝處 [長阿含經十八 同二十 慧苑音義上]
●馬鳴; 禪宗第十二祖 梵語阿濕縛窶沙 或名阿濕矩沙 華言馬鳴 波羅柰國人 亦稱功勝 功德日 北天竺小月氏國王 伐於中天竺國得大寶 一佛鉢 二辯才比丘 王繫馬於衆會前 以草與之 馬垂淚聽比丘說法無念食想 以馬解其音故 天下人遂號爲馬鳴菩薩 [傳燈錄一 馬鳴菩薩傳 翻譯名義集一 西域記八]
●龍樹; 禪宗第十四祖 梵語那伽閼剌樹那 華言龍猛(舊曰龍樹) 南印度婆羅門種姓出身 自幼穎悟 學四吠陀 天文地理圖緯祕藏 及諸道術等 無不通曉 曾與契友三人修得隱身之術 遂隱身至王宮侵凌女眷 其事敗露 三友人爲王所斬 僅師一人身免 師感悟愛欲乃衆苦之本 卽入山詣佛塔 竝出家受戒 廣習三藏 然未能厭足 復至雪山 遇一老比丘授以大乘經典 惟以雖知實義 末能通利 又以曾摧破外道論師之義 故生起邪慢之心 而自立新戒 著新衣 靜處於一水晶房中 其時有大龍菩薩 見而愍之 遂引入龍宮 授以無量之大乘經典 師遂體得敎理 其時南天竺王信奉婆羅門敎 攻擊佛法 師遂前往敎化 使放棄婆羅門敎 此後大力弘法 又廣造大乘經典之注釋書 晩年住於南印度之黑峰山 [入楞伽經九 大乘玄論五 華嚴經傳記五 付法藏傳五 傳法正宗記三 佛祖統紀五] ▲龍樹菩薩傳 南天竺諸國爲其立廟敬奉如佛 其母樹下生之 因字阿周陀那 阿周陀那樹名也 以龍成其道 故以龍配字 號曰龍樹也
●彌勒; <梵> Maitreya <巴> Metteyya 科註妙法蓮華經一 彌勒者 此云慈氏 思益云 若衆生見者 卽得慈心三昧 故名以慈氏 是菩薩現居知足內院 當來出興于堪忍 補釋迦之處 號彌勒世尊 於華林園內龍華樹下 而成正覺 智論三十四云 龍華初會度九十九億聲聞 第二會度九十六億聲聞 第三會度九十三億聲聞 ▲玄應音義二十二 波羅延 謂西域邑落名也 阿氏多 彌勒字也 或作阿嗜多 此云無勝 謂無人能勝也 舊言阿逸多訛也 ▲玄應音義二十五 梅怛麗藥 此云慈 卽舊云慈氏者也 慈有二因緣 一値慈佛發心 二初得慈心三昧 因以名焉 言彌勒或云梅任梨竝訛也
●金剛; 此指金剛力士 與金剛神 執金剛 金剛夜叉 密跡金剛等皆同 執金剛杵護持佛法之天神 立於寺門兩脅之二王是也 大寶積經密跡金剛力士品記其宿世之事歷發願
●迦葉; <梵> kāśyapa 全名大迦葉 摩訶迦葉 又作迦葉波 迦攝波 此譯云飮光 十大弟子之一 禪宗第一祖 生於王舍城近郊之婆羅門家 於佛成道後第三年 爲佛弟子 八日後卽證入阿羅漢果 爲佛弟子中頭陀第一 佛入滅後 成爲敎團之統率者 於王舍城召集第一次經典結集 直至阿難爲法之繼承者 始入鷄足山入定 以待彌勒出世 方行涅槃 禪宗以三處傳心之故事(多子塔前分半座一也 靈山會上擧拈花二也 雙樹下槨示雙趺三也) 至今傳誦不絶 此外 過去七佛之第六佛 亦稱迦葉佛 又佛弟子中 優樓頻羅迦葉 伽耶迦葉等 皆有迦葉之稱 佛陀入滅後三百年之小乘飮光部之祖 亦與迦葉同名 [雜阿含經四十一 增一阿含經二十 同三十五 同四十四 佛本行集經四十五 四分律五十四 五分律三十 毘尼母經一 有部苾芻尼毘奈耶一 傳燈錄一 禪家龜鑑] ▲玄應音義二十四 梵言迦葉波 迦葉 此云光 波 此云飮
●釋迦老子; 指釋迦牟尼佛 老子 老漢 子 後綴
●紀綱; 網罟的綱繩 引申爲綱領 法度
●獰龍; 喩指迅猛峻烈的機鋒 亦指機用傑出或上等根器的禪僧 獰 凶惡
●嚬呻; 金光明經文句文句記會本八 嚬呻 嚬音頻 呻音申 嚬呻師子振威也 ▲祖庭事苑二 象王嚬呻 毛詩 傳 頻 急也 申 舒也 謂有勞倦者 以手足胸背左右上下 或急努 或舒展 自解其勞倦 今字從口 ▲祖庭事苑五 嚬呻 敵飜自在無畏
●黃龍; 慧南(1002-1069) 宋代僧 臨濟宗黃龍派之祖 信州玉山(江西上饒)人 俗姓章 少習儒業 博通經史 十一歲從定水院智鑾出家 十九歲受具足戒 遍參棲賢澄諟 雲峰文悅 石霜楚圓等諸宿 遂嗣石霜楚圓之法 師初住同安崇勝禪院開堂說法 四衆歸趨 未久移至歸宗寺 因堂宇突遭火災 全寺盡毁 遂蒙冤坐獄 吏者百端求隙 而師怡然引咎 久而後赦 乃退居黃檗 於溪上築積翠庵 四方接踵而至 受請至黃龍山崇恩院 大振宗風 遍及湖南 湖北 江西 閩粤等地 此一系統乃蔚成黃龍派 日本臨濟宗之祖榮西卽源出此一流派 師每以公案廣度四衆 室中嘗設佛手驢脚生緣三轉語 以勘驗學人 三十餘年鮮有契其旨者 世稱黃龍三關 師住黃龍時 法席鼎盛 於宋熙寧二年入寂 壽六十八 世稱黃龍慧南 徽宗大觀四年(1110) 追諡普覺禪師 與同門方會之楊岐派對峙 與臨濟 潙仰 曹洞 雲門 法眼等五家 竝稱爲五家七宗 遺有黃龍南禪師語錄 語要 書尺集等各一卷行世 門下之晦堂祖心 寶峰克文 泐潭洪英等 皆馳名禪林 [續傳燈錄七 禪宗正脈十七 釋氏稽古略四]
●楊岐; 方會(996-1049) 北宋臨濟宗楊岐派之開祖 石霜楚圓之法嗣 南嶽下十一世 臨濟下七世 袁州(江西)宜春人 俗姓冷 法名方會 初從楚圓掌監院之事 後住筠州九峰山 未久至袁州楊岐山住持普通禪院 大振禪風 宋仁宗慶曆六年(1046) 住潭州雲蓋山海會寺 皇祐元年示寂 壽五十四 一說慶曆六年或皇祐二年示寂 壽五十八 與同門慧南之黃龍派對峙 與臨濟 潙仰 曹洞 雲門 法眼等五家 竝稱爲五家七宗 [續燈錄七 佛祖歷代通載十八 五燈會元十九]
복주(福州) 자복선(資福善) 선사는 고전(古田) 사람이며 성이 진씨(陳氏)다. 소년(少年; 少)에 일기(逸氣; 뛰어난 氣像)가 있었고 보봉원(寶峰院)에서 축발(祝髮)했다. 곧 출령(出嶺)하여 석상(石霜) 자명선사(慈明禪師)를 참시(參侍; 뵙고 侍奉)했다. 당시의 용상(龍象)에 취암진공(翠巖眞公; 可眞) 같은 이가 더욱(尤) 굴복(屈服)하는 바였다. 고로 천하 총림에서 선시자(善侍者)의 이름이 있음을 알았다. 자명에게 예사(禮辭)하고 환민(還閩)함에 이르러(及) 자명이 입으로 점게(佔偈; 게를 속삭임)하여 조롱(嘲弄; 調)해 가로되 칠절미(七折米; 小米니 좁쌀) 밥이/ 화로(火爐; 鑪)에서 나오자 호병(胡餠)이다/ 이로부터 한 번 헤어지면/ 칭추(稱鎚; 저울추)가 우물에 떨어지리라. 기이(旣而; 不久) 이중(里中)의 봉림(鳳林)에서 출세(出世)했고 자복(資福)으로 옮김에 이르러(逮) 곧 녹록(碌碌)하여 소문(所聞; 聞)이 없었다. 연고로써 언구(言句) 또한 세상에 전함이 드물었다(罕). 삼현요결게(三玄要訣偈)가 있어 가로되 삼현삼요(三玄三要)와 삼결(三訣)을/ 사해(四海)의 선인(禪人)이 어떻게(若爲) 분별하는가/ 서구야토(西瞿耶土)에서 다투어 훤굉(喧鍧; 시끄러운 鐘鼓 소리)하고/ 북울단월(北鬱單越) 사람이 타철(打鉄)한다/ 마명(馬鳴)과 용수(龍樹)가 어떻게 이르려 하는가(擬何云)/ 미륵(彌勒)과 금강(金剛)이 모두 교설(咬舌; 말을 못함)한다/ 문수(文殊)가 대소(大笑)하며 아하하(阿呵呵; 呵의 원음이 하)하고/ 가섭(迦葉)이 말하려고 하나 말함을 얻지 못한다/ 말함을 얻지 못함이여/ 석가노자(釋迦老子)의 두수(頭鬚; 頭髮로 의심됨)가 희다/ 두발(頭髮)이 흼이여/ 일이삼사오육칠이다. 또 시중(示衆)해 가로되 한가롭게 삼촌인(三寸刃)의 봉망(鋒鋩)을 던지니(拋)/ 잡지(帀地)의 빙상(冰霜)이 기강(紀綱)을 정(定)한다/ 만약 이 장부(丈夫)의 참 의기(意氣)라면/ 그대의 고개(敲磕; 두드리고 부딪침)하여 풍광(風光)을 떨침(振)에 일임한다. 이왈(二曰) 갈고리를 사해(四海)에 드리워 파랑(波浪; 浪)을 탄침(吞侵)하니/ 영룡(獰龍)이 각린(角鱗)을 동(動)함을 만남이 드물다(罕)/ 사자(獅子)가 빈신(嚬呻)하며 의기(意氣)를 온전히 하여/ 종횡(縱橫)하거늘 누가 이 당인(當人)임을 나타내겠는가(顯). 오호(嗚呼)라, 선(善)이 황룡(黃龍)ㆍ양기(楊岐)ㆍ취암(翠巖)과 더불어 안행(鴈行)이 되었고 하물며 일찍(蚤) 제공(諸公) 사이에서 언론(言論)의 풍지(風旨; 風格旨趣)가 또한 우수(優秀; 優)했거늘 어찌 귀향(歸鄕)함을 얻어 마침내(卒) 자명의 조롱(調)에 적중(的中; 中)된다 하겠는가.
●福州; 지금의 복건성 복주니 남북조시대의 진안(晉安)이며 수대의 건안(建安)이니 당대에 복주로 일컬었음. 부근에 설봉산이 있음.
●資福善; 송대 임제종승. 담주 석상산 자명초원에게 의지해 득법했고 복주 고전 자복사에서 출세했음 [속등록7].
●祝髮; 축(祝)은 절단의 뜻. 고로 축발은 체발(剃髮)ㆍ치발(薙髮)과 같음. 곧 출가하여 낙발(落髮)함을 말함.
●慈明; 초원(楚圓; 986-1039)이니 송대 임제종승. 전주(全州) 청상(淸湘; 廣西 桂林)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이(李). 어릴 적에 유생(儒生)이 되어 거업(擧業; 科擧에 應試하는 일)에 마음을 담갔는데 22세에 마음을 돌려 도(道)로 향했으며 상산(湘山) 은정사(隱靜寺)에서 득도(得度)했음. 오래지 않아 양면(襄沔)의 사이를 유람하다가 수지(守芝; 善昭의 法嗣)ㆍ곡천(谷泉; 善昭의 法嗣)과 결반(結伴)하여 낙양(洛陽)에 들어갔음. 선소(善昭; 임제하 5세)의 도가 천하제일(天下第一)을 바라본다 함을 듣고 드디어 분주(汾州)에 다다라 2년을 의지(依止)했으나 입실(入室)을 허락하지 않았음. 매번 보기만 하면 반드시 꾸짖고 욕하였으며 혹은 제방(諸方)을 헐뜯고 흉보았으며 가르치는 바는 또한 다 유속(流俗; 世俗)의 비사(鄙事)였음. 스님이 어느 날 저녁 이를 하소연했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소가 찬찬히 보다가 욕하며 가로되 이 악지식(惡知識)이 감히 나를 비판(裨販; 裨는 附)하느냐, 주장자를 들어 쫓아내자 스님이 해설(解說)을 펴려고 하는데 선소가 그 입을 막았음. 스님이 홀연히 대오하고 가로되 이로 알지니 임제의 도가 상정(常情; 범상한 정)을 초출했다. 드디어 약 12년(일설엔 7년)을 복역(服役)하면서 그 지취를 다 영오(領悟)했음. 후에 병주(幷州)에 이르러 당명지숭(唐明智嵩; 首山省念의 法嗣)을 방문했고 다시 당세(當世)의 명사(名士) 양대년(楊大年)ㆍ이준욱(李遵勗)과 때때로 모여 도를 논했음. 후에 귀향하여 성모(省母; 모친을 살핌)하려고 균주(筠州; 四川)를 지나다가 동산(洞山)에서 효총(曉聰)을 뵙고 3년을 의지(依止)했음. 또 앙산(仰山)을 유람했는데 때에 양대년(楊大年)이 의춘태수(宜春太守) 황종차(黃宗且)에게 서신을 기탁해 스님을 원주(袁州; 江西) 남원(南源)의 광리사(廣利寺)에 주지(住持)하도록 청했음. 3년을 거주하다가 사퇴하고 성모(省母)했음. 또 신정홍인(神鼎洪諲; 임제하 5세)을 알현(謁見)했는데 홍인이 찬상(讚賞)을 크게 더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성명(聲名)을 크게 날렸음. 이미 담주(潭州; 湖南) 도오(道吾)의 법석을 주재(主宰)하고는 다음으로 석상산(石霜山) 숭승사(崇勝寺)에 주지(住持)했으며 또 남악 복엄사(福嚴寺)로 이전(移轉)하였고 후에 담주(潭州) 흥화사(興化寺)로 옮겼으며 보원(寶元) 2년 정월 담주 흥화사에서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54며 시호(諡號)는 자명선사(慈明禪師)임. 법사(法嗣) 50인 중에 황룡혜남(黃龍慧南)과 양기방회(楊岐方會)가 가장 이름이 알려졌으며 각기 일파(一派)를 이루었음. 유작(遺作)에 석상초원선사어록(石霜楚圓禪師語錄; 慧南 重編) 1권이 있음 [속전등록3. 선림승보전21].
●龍象; (1). 코끼리 중에 수승한 것을 가리킴. 유마경중 부사의품. 비유컨대 용상(龍象)이 차고 밟음과 같아서 나귀가 감내할 바가 아니다. 주유마힐경6(注維摩詰經六). 조(肇; 僧肇)가 가로되 능과 불능으로 비유를 삼는다. 코끼리의 상등(上等)인 것을 이름해 용상(龍象)이다. 유마경의소4에 이르되 호칭하여 용상이라 함은 두 물건이 있음이 아니다. 예컨대(如) 호마(好馬)를 이름해 용마(龍馬)라 하나니 고로 호상(好象)을 일컬어 용상(龍象)이라 한다. (2). 용상은 각기 수상과 육상의 가장 유력한 자임을 가리킴. 조정사원1. 지도론(3)에 이르되 그 힘이 셈을 말하자면 용은 수행중(水行中)에 힘이 세며 코끼리는 육행중(陸行中)에 힘이 세다 했는데 여금엔 거선석사(鉅禪碩師; 鉅는 클 거. 碩은 클 석. 곧 큰 선사와 큰 스님)를 용상(龍象)에 비유함. 여기에선 (2)을 가리킴.
●翠巖眞; 가진(可眞; ?-1064)이니 송대 임제종승. 복주(복건) 장계 사람이니 세칭이 진점흉(眞點胸)임. 석상초원(石霜楚圓)의 법사며 일찍이 융흥부(강서) 취암산에 거주한지라 고로 또 명칭이 취암가진(翠巖可眞)임. 후에 담주(호남 장사) 도오산(道吾山)으로 옮겼으며 치평 원년에 시적했음. 유작에 취암진선사어요 1권이 있어 속고존숙어요에 수록되었음 [속등록7. 연등회요14. 오등회원12].
●胡餠; 또 명칭이 호마병(胡麻餠)임. 조정사원1. 호마(胡麻; 麻는 깨)를 써서 병(餅)을 만들므로 고로 가로되 호병(胡餅)임. 고로 석명(釋名; 釋飮食)에 가로되 호병(胡餅)은 말하자면 호마(胡麻)를 그것에 붙인 것이다. 전조록(前趙錄)에 이르되 석계룡(石季龍)의 휘(諱)가 호(胡)이므로 고쳐 마병(麻餅)이라 했다(前趙는 石氏인 後趙에게 亡했음. 後趙로 의심됨). 호마(胡麻)는 곧 유마(油麻)임.
●碌碌; 평범하면서 작위(作爲; 적극적인 행위, 동작 또는 거동)하는 바가 없음을 가리킴.
●三玄三要; 이는 임제의현이 학인을 접인하는 시설. 임제어록 상당. 중이 묻되 무엇이 제1구입니까. 스님이 이르되 삼요인(三要印)을 열어 붉은 점이 측(側; 어떤 책엔 窄으로 지어졌음)하니 의의(擬議)를 용납하지 아니한 전에 주빈이 나뉜다. 묻되 무엇이 이 제2구입니까. 스님이 이르되 묘해(妙解)가 어찌 무착의 물음을 용납하리오만 구화(漚和)로는 어찌 절류기(截流機)를 저버리리오. 묻되 무엇이 이 제3구입니까. 스님이 이르되 다만 붕두(棚頭)의 괴뢰 희롱함을 보아라 잡아당김이 모두 안쪽에 사람이 있다. 스님이 또 이르되 일구어(一句語)에 반드시 삼현문(三玄門)을 갖춰야 하고 일현문(一玄門)에 반드시 3요(要)를 갖춰 권(權)도 있고 용(用)도 있어야 하나니 너희 등 제인은 어떻게 이회(理會)하는가. 하좌했다.
●西瞿耶; 서구야니(西瞿耶尼)니 불경 중에서 일컫는 바 4대주(大洲)의 하나. 수미산 서방 함해(鹹海) 중에 위치함. ▲번역명의집3. 서구야니(西瞿耶尼) 여기에선 이르되 우화(牛貨)니 또한 취여(取與)로 번역한다. 장소(藏疏)에 이르되 그곳엔 소가 많아 소를 화폐로 삼는다. 구사초(俱舍鈔)에 이르되 겁초 시 높은 나무 아래 1보우(寶牛)가 있음으로 인해 화역(貨易; 交易)한 연고다. 서역기에 이르되 서구다니주(西瞿陀尼洲; 梵 godānīya) 구역에 가로되 구나니(瞿那尼) 또 이르되 구가니(劬伽尼)는 잘못이다. 구사에 이르되 서우화주(西牛貨洲)는 수명이 5백 세며 형상이 둥글고 무결하며 신장은 16주(肘)다.
●北鬱單越; 또 북울단월(北欝單越; 梵 Uttara-kuru)로 지음. 울(欝)과 울(鬱)은 같음. 또 가로되 북울달월ㆍ북구로주(北俱盧洲)ㆍ북구로주(北拘盧洲)ㆍ북주ㆍ북단월ㆍ울다라구루ㆍ올달라구로로 지음. 4대주(大洲)의 하나. 여기에선 이르되 승처(勝處)ㆍ승생(勝生)ㆍ고상(高上)임. 여러 경론에 이 주와 유관한 기재가 극히 많음. 기재한 바의 것이 모든 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모두 이 주가 4주의 가장 수승한 곳이라 했음 [장아함경18, 동20. 혜원음의상].
●馬鳴; 선종 제12조. 범어로는 아습바구사(阿濕縛窶沙; 梵 Aśvaghoṣa)며 혹은 이름이 아습구사니 화언(華言)으론 마명임. 바라나국(波羅柰國) 사람이며 또 명칭이 공승(功勝)ㆍ공덕일(功德日). 북천축 소월지국왕(小月氏國王)이 중천축국(中天竺國)을 정벌하여 대보(大寶)를 얻었으니 1은 불발(佛鉢)이며 2는 변재비구(辯才比丘)였음. 왕이 대중이 모인 앞에 말을 묶고는 풀을 주었더니 말이 눈물을 흘리며 비구의 설법을 들을 뿐 밥을 생각함이 없었음. 말도 그의 음성을 아는 연고로써 천하인이 드디어 마명보살이라 호했음. [전등록1. 마명보살전. 번역명의집1. 서역기8].
●龍樹; 선종 제14조. 범어 나가알랄수나(那伽閼剌樹那. 梵 Nāgārjun a)는 화언(華言)으로 용맹(龍猛; 구역에 가로되 龍樹)임. 남인도 바라문종성(婆羅門種姓) 출신. 어릴 적부터 영오(穎悟)해 사폐타(四吠陀)ㆍ천문지리ㆍ도위비장(圖緯祕藏) 및 여러 도술(道術) 등을 배워 통효(通曉)하지 않은 게 없었음. 일찍이 계우(契友; 의기투합하는 친구) 세 사람과 은신(隱身)의 비술(祕術)을 수득(修得)해 드디어 은신하여 왕궁에 이르러 여권(女眷; 궁녀를 가리킴)을 침릉(侵凌)했는데 그 일이 실패해 노출된지라 세 벗은 왕에게 베이는 바가 되었고 겨우 스님 한 사람의 몸만 면(免)했음. 스님이 애욕은 곧 뭇 고(苦)의 근본임을 감오(感悟)하고 곧 입산하여 불탑(佛塔)으로 나아갔으며 아울러 출가하여 수계(受戒)했으며 삼장(三藏)을 널리 학습했음. 그러나 능히 염족(厭足; 滿足)하지 못했고 다시 설산에 이르러 한 늙은 비구(比丘)를 만났는데 대승경전(大乘經典)을 주었음. 사유(思惟)하여 비록 실의(實義)를 알았으나 능히 통리(通利)하지 못했음. 또 일찍이 외도논사(外道論師)의 뜻을 최파(摧破)한지라 고로 사만(邪慢)의 마음을 일으켜 스스로 새로운 계(戒)를 세우고 새로운 옷을 입고 한 수정방(水晶房) 속에 고요히 거처했음. 그때 대룡보살(大龍菩薩)이 있어 이를 보고 그를 불쌍히 여겨 드디어 인도(引導)해 용궁(龍宮)에 들어가 무량한 대승경전을 주었고 스님이 드디어 교리를 체득(體得)했음. 그때 남천축왕(南天竺王)이 바라문교를 신봉(信奉)하여 불법을 공격하는지라 스님이 드디어 앞으로 가서 교화해 바라문교를 방기(放棄)케 했음. 차후에 대력(大力)으로 홍법(弘法)했고 또 대승경전의 주석서를 광조(廣造)했음. 만년에 남인도의 흑봉산(黑峰山)에 거주했음 [입릉가경9. 대승현론5. 화엄경전기5. 부법장전5. 전법정종기3. 불조통기5]. ▲용수보살전(龍樹菩薩傳). 남천축의 여러 나라에서 그를 위해 묘(廟)를 세웠는데 부처와 같이 경봉(敬奉)했다. 그의 어머니가 나무 아래에서 그를 낳은지라 인하여 아주타나(阿周陀那; 梵 arjuna)로 자(字)했다. 아주타나는 나무 이름이다. 용(龍)으로써 그 도를 이룬지라 고로 용으로써 배자(配字)하여 호칭해 가로되 용수(龍樹)라 했다.
●彌勒; <범> Maitreya. <파> Metteyya. 과주묘법연화경1. 미륵이란 것은 여기에선 이르되 자씨(慈氏)이다. 사익경에 이르되 이에 중생이 보는 자는 곧 자심삼매(慈心三昧)를 얻는다. 고로 자씨로 이름했다. 이 보살은 현재 지족천(知足天; 도솔천) 내원(內院)에 거처한다. 당래에 감인(堪忍; 娑婆)에 출흥하여 석가의 처소를 보좌하며 호가 미륵세존이다.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룬다. 지론34에 이르되 용화의 초회(初會)에 99억 성문(聲聞)을 제도하고 제2회에 96억 성문을 제도하고 제3회에 93억 성문을 제도한다. ▲현응음의22. 바라연(波羅延) 이르자면 서역의 고을 취락 이름이다. 아지다(阿氏多; 梵 ajita) 미륵의 자(字)다. 혹은 아기다(阿嗜多)로 짓는다. 여기에선 이르되 무승(無勝)이니 이르자면 능히 이길 사람이 없음이다. 예전에 말한 아일다(阿逸多)는 그르다. ▲현응음의25. 매달리약(梅怛麗藥; 梵 Maitreya) 여기에선 이르되 자(慈)니 곧 예전에 이른 자씨(慈氏)란 것이다. 자(慈)에 두 인연이 있다. 1은 자불(慈佛)을 만나 발심함이며 2는 처음으로 자심삼매(慈心三昧)를 얻었음이니 인하여 이름했다. 미륵이라고 말하거나 혹은 매임리(梅任梨)라 이름(云)은 다 잘못이다.
●金剛; 여기에선 금강역사(金剛力士)를 가리킴. 금강신ㆍ집금강ㆍ금강야차ㆍ밀적금강 등과 모두 같음. 금강저를 가지고 불법을 호지하는 천신임. 절 문에 세워진 양협(兩脅)의 2왕이 이것임. 대보적경 밀적금강역사품에 그 숙세의 사력(事歷)과 발원이 기재되었음.
●迦葉; <범> kāśyapa. 전명(全名)이 대가섭ㆍ마하가섭(摩訶迦葉; 梵 Mahā-kāśyapa)이며 또 가섭파(迦葉波)ㆍ가섭파(迦攝波)로 지음. 여기에선 번역하여 이르되 음광(飮光)이니 십대제자의 하나이며 선종의 제1조. 왕사성 근교의 바라문가에서 출생했으며 불타가 성도한 후 3년에 불제자가 되었고 8일 후에 곧 아라한과에 증득해 들어갔음. 불제자 중 두타제일이 됨. 불타가 입멸한 후 교단의 통솔자가 된 자며 왕사성에서 제1차의 경전결집을 소집하였고 바로 아난이 법의 계승자가 됨에 이르자 비로소 계족산(鷄足山)에 들어가 입정하여 미륵의 출세를 기다렸다가 바야흐로 열반을 행하게 됨. 선종에서 삼처전심(三處傳心; 多子塔前에서 分半座가 1이며 靈山會上에서 擧拈花가 2며 雙樹下에서 槨示雙趺가 3임)의 고사(故事)로써 지금에 이르도록 전송(傳誦)하여 끊이지 않음. 이 밖에 과거 7불의 제6불도 또한 칭호가 가섭불이며 또 불제자 중 우루빈라가섭과 가야가섭 등도 다 가섭의 호칭이 있으며 불타가 입멸한 후 3백 년의 소승음광부의 비조도 또한 가섭과 같은 이름임 [잡아함경41. 증일아함경20, 동35, 동44. 불본행집경45. 사분율54. 오분율30. 비니모경1. 유부필추니비나야1. 전등록1. 선가귀감]. ▲현응음의24 범언(梵言)으로 가섭파니 가섭은 여기에선 이르되 광(光)이며 파는 여기에선 이르되 음(飮)이다.
●釋迦老子; 석가모니불을 가리킴. 노자(老子)는 노한(老漢)이니 자는 후철.
●紀綱; 그물의 벼릿줄이니 인신(引申; 轉義)하여 강령ㆍ법도가 됨.
●獰龍; 신맹(迅猛)하고 준열(峻烈)한 기봉을 비유로 가리킴. 또한 기용이 걸출하거나 혹 상등근기의 선승을 가리킴. 녕(獰)은 흉악(凶惡).
●嚬呻; 금광명경문구문구기회본8. 빈신(嚬呻) 빈(嚬)은 음이 빈이며 신(呻)은 음이 신이다. 빈신은 사자가 위엄을 떨침이다. ▲조정사원2. 상왕빈신(象王嚬呻) 모시(毛詩; 詩經의 異名) 전(傳; 經書의 설명 전) 빈(頻)은 급(急)이며 신(申)은 서(舒; 천천할 서)다. 이르자면 노권(勞倦)함이 있는 자가 수족과 흉배(胸背)를 좌우상하(좌우상하로 움직임)하되 혹은 급히 애쓰거나 혹은 서서히 펴서 스스로 그 노권을 푸는 것이다. 지금의 글자는 구(口)를 좇는다. ▲조정사원5. 빈신(嚬呻) 대적(對敵)해 엎치락뒤치락(飜)하며 자재해 두려움이 없음임.
●黃龍; 혜남(慧南; 1002-1069)이니 송대승. 임제종 황룡파(黃龍派)의 개조(開祖). 신주(信州) 옥산(玉山; 강서 상요)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장(章). 어릴 적에 유업(儒業)을 익혔으며 경사(經史)를 박통(博通)했음. 11세에 정수원(定水院) 지란(智鑾)을 좇아 출가했으며 19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음. 서현징식(棲賢澄諟)ㆍ운봉문열(雲峰文悅)ㆍ석상초원(石霜楚圓) 등 여러 존숙을 두루 참알(參謁)하다가 드디어 석상초원의 법을 이었음. 스님이 처음엔 동안(同安) 숭승선원(崇勝禪院)에 주(住)하며 개당설법(開堂說法)했는데 4중(衆)이 귀추(歸趨)했음. 오래지 않아 귀종사(歸宗寺)로 이지(移至)했는데 당우(堂宇)가 돌연(突然)히 화재를 만나 전사(全寺)가 모두 훼손(毁損)됨으로 인해 드디어 원통(寃痛)하게 옥사(獄事)에 연좌(連坐)됨을 입었음. 이자(吏者; 獄吏)가 백단(百端; 온갖 방법)으로 틈을 구했으나 스님이 이연(怡然)히 허물을 끌어당겼음. 오래 후에 사면(赦免)되어 이에 황벽(黃檗)으로 퇴거했으며 계곡 위에 적취암(積翠庵)을 축조(築造)했는데 사방에서 접종(接踵; 사람이 잇따르다)하여 이르렀음. 요청을 받아 황룡산(黃龍山) 숭은원(崇恩院)에 이르러 종풍을 크게 진작(振作)했으며 호남ㆍ호북ㆍ강서ㆍ민월(閩粤) 등의 땅에 두루 미쳤음. 이 일계통(一系統)이 곧 황룡파를 위성(蔚成)했으며 일본 임제종의 개조(開祖)인 영서(榮西)도 곧 이 한 유파(流派)에서 원출(源出)했음. 스님이 매번 공안으로 4(衆)을 널리 제도했는데 실중(室中)에서 늘 불수(佛手)ㆍ여각(驢脚)ㆍ생연(生緣)의 3전어(三轉語. 轉은 양사)를 시설해 학인을 감험(勘驗)했음. 30여 년에 그 지취(旨趣)에 계합하는 자가 드물게 있는지라 세칭이 황룡삼관(黃龍三關)임. 스님이 황룡에 주(住)할 때 법석이 정성(鼎盛; 융성)하였으며 송(宋) 희녕(熙寧) 2년에 입적(入寂)했으니 나이는 68. 세칭이 황룡혜남(黃龍慧南)이며 휘종(徽宗) 대관(大觀) 4년(1110) 추시(追諡)하여 보각선사(普覺禪師)라 했음. 동문인 방회(方會)의 양기파(楊岐派)와 대치(對峙)하며 임제ㆍ위앙ㆍ조동ㆍ운문ㆍ법안 등 5가(家)와 더불어 병칭(竝稱)하여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 함. 유작(遺作)에 황룡남선사어록(黃龍南禪師語錄)ㆍ어요(語要)ㆍ서척집(書尺集) 각 1권이 있어 행세(行世)함. 문하(門下)의 회당조심(晦堂祖心)ㆍ보봉극문(寶峰克文)ㆍ늑담홍영(泐潭洪英) 등은 다 선림에 치명(馳名)했음 [속전등록7. 선종정맥17. 석씨계고략4].
●楊岐; 방회(方會; 996-1049)니 북송 임제종 양기파의 개조(開祖). 석상초원(石霜楚圓)의 법사(法嗣)니 남악하 11세며 임제하 7세. 원주(강서) 의춘 사람이며 속성은 냉(冷)이며 법명은 방회(方會)임. 처음엔 초원(楚圓)을 따르며 감원(監院)의 일을 장악했고 뒤에 균주 구봉산에 거주했고 오래지 않아 원주(袁州) 양기산(楊岐山)에 이르러 보통선원(普通禪院)에 주지(住持)하며 선풍을 크게 진작했음. 송 인종 경력 6년(1046) 담주(潭州) 운개산(雲蓋山) 해회사(海會寺)에 주(住)했으며 황우 원년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54. 1설엔 경력 6년 혹은 황우 2년에 시적했다 하니 나이가 58. 동문인 혜남(慧南)의 황룡파(黃龍派)와 대치(對峙)하며 임제ㆍ위앙ㆍ조동ㆍ운문ㆍ법안 등 5가(家)와 병칭(竝稱)하기를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 함 [속등록7. 불조역대통재18. 오등회원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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