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崇野堂 四明人 久依天童宏智禪師 以大事不決 竟上江西見艸堂 未幾 果有所得 後住育王 乃拈香爲艸堂之嗣 雪竇持以四句戲宏智曰 收得一宗(翠巖宗白頭也) 失却一崇 面前合掌 背後搥胸 聞者莫不大咲 崇幼年多攻詩 甞題廬山三峽橋曰 蕭蕭石徑蟠蒼松 山腰忽斷來悲風 坐寒欲作暮天雪 人靜似發山林鐘 落崖千古流寒玉 眩眼百丈飛長虹 倚欄深省十年夢 坐看雲吞五老峰 後安國按部見之 大加稱賞 遂徹去諸家詩牌 唯留此一篇 自茲 雖道譽不甚四馳 唯有詩名流于世 後進當以崇爲戒 所謂齊己貫休名重地也
●崇野堂; 普崇 宋代黃龍派僧 字野堂 慶元府(浙江寧波)人 依黃龍草堂善淸受法 住鄮縣育王寺 [五燈會元十八 普燈錄十]
●雪竇持; 宋代黃龍派僧 慶元(今屬浙江)盧氏 依象田梵卿(黃龍下二世)受法 住雪竇 [普燈錄十 五燈會元十八]
●安國; 胡安國(1074-1138) 宋代黃龍派居士 崇安(福建武夷山市)人 字康侯 紹聖(1094-1098)中進士 纍官給事中 所著有春秋傳 卒諡文定 依上封祖秀(嗣死心悟新) 得言外旨 其寄上封偈曰 祝融峰似杜城天 萬古江山在目前 須信死心元不死 夜來秋月又同圓 [五燈會元十八 名公法喜志四]
●按部; 一按照部類 二巡視部屬
●齊己; 唐末五代詩僧 湖南益陽人 俗姓胡 自號衡嶽沙門 幼於潙山同慶寺出家習學律儀 性喜吟詠 不求名利 後赴潭州石霜山慶諸會下 請知僧務 龍德元年(921) 後唐莊宗請師任僧正 師作渚宮莫問詩十五首(收於白蓮集五)表己志 愛樂山水 不近王侯 師之頸有瘤 時人戱稱爲詩囊 其所作詩 氣調淸淡 與同時先輩詩僧貫休爲唐代詩僧之首 遺詩有光憲所編白蓮集十卷 按釋氏疑年錄五 師示寂於後唐長興(930-933)末年 世壽七十餘 [宋高僧傳三十 釋氏稽古略三 通志略二十二 大淸一統志三六九]
●貫休; (832-912) 唐末五代僧 以詩畫著稱於世 婺州蘭谿(浙江金華)人 俗姓姜 字德隱 一字德遠 七歲出家於金華縣和安寺圓貞座下 受具足戒後 卽入浙東五洩山 修禪十年 曾參無相禪師 後往洪州開元寺聽講法華經及大乘起信論 皆能通達奧義 師善繪佛像 尤工水墨羅漢 又擅篆隸草書 其詩亦頗爲士林所稱譽 唐乾寧初 嘗謁吳越王錢鏐 竝獻詩章 頗見禮重 昭宗天復(901-904)年間入蜀 前蜀蜀主王建 其子王衍 同優遇之 因賜紫衣 署號禪月大師 乾化二年示寂 壽八十一 著有西嶽集 弟子曇域更其名爲禪月集 [宋高僧傳三十 釋氏稽古略三 五燈會元六]
○숭야당(崇野堂; 普崇)은 사명(四明) 사람이며 오래 천동굉지(天童宏智; 正覺) 선사에게 의지했다. 대사(大事)를 불결(不決; 決斷하지 못함)했기 때문에(以) 마침내(竟) 강서에 올라 초당(艸堂; 善淸)을 참견했다. 오래지 않아(未幾) 과연 소득이 있었다. 후에 육왕(育王)에 주(住)했는데 이에 염향(拈香)해 초당(艸堂)의 사(嗣; 法嗣)가 되었다. 설두지(雪竇持)가 4구로써 굉지(宏智)를 희롱해 가로되 1종(宗; 嗣宗)(翠巖 宗白頭다)을 수득(收得)하고/ 1숭(崇; 普崇)을 실각(失却)했다/ 면전에서 합장하고/ 배후(背後)에서 추흉(搥胸)한다. 문자(聞者)가 대소(大咲)하지 않음이 없었다. 숭(崇)은 유년(幼年)에 다분히 시(詩)를 학습(學習; 攻)했다. 일찍이 여산(廬山) 삼협교(三峽橋)에 제(題)해 가로되 소소(蕭蕭)한 석경(石徑)에 창송(蒼松)이 서렸는데(蟠; 서릴 반)/ 산요(山腰)가 홀연히 끊어져 비풍(悲風)을 불러 온다(來; 招致)/ 추위(寒)를 타고(坐; 乘) 모천(暮天)의 눈(雪)을 지으려고 하는데/ 사람이 고요해 산림(山林)의 종(鐘)을 발(發)함과 흡사하다/ 낙애(落崖; 절벽에서 떨어짐)는 천고(千古)의 흐르는 한옥(寒玉)이며/ 현안(眩眼; 눈이 아찔함)은 백장(百丈)의 나는(飛) 장홍(長虹)이다/ 의란(倚欄)하여 십년몽(十年夢)을 깊이 살피는데(省)/ 문득(坐; 頓) 구름이 오로봉(五老峰)을 삼킴을 본다(看). 후에 안국(安國)이 안부(按部)하다 이(之)를 보고는 크게 칭상(稱賞)을 가했다. 드디어 제가(諸家)의 시패(詩牌)를 철거(徹去)하고 오직 이(此) 일편(一篇)만 머물러 두었다(留). 이로부터(自茲) 비록 도예(道譽; 도의 名譽)가 심히 사치(四馳; 사방으로 달림)하지 않았지만 오직 시명(詩名)이 있어 세상에 유행(流行; 流)했다. 후진(後進)은 마땅히 숭(崇)으로써 경계(警戒; 戒)로 삼아야 하리니 소위(所謂) 제기(齊己)와 관휴(貫休)의 이름이 존중되는 경지이다(名重地也).
●崇野堂; 보숭(普崇)이니 송대 황룡파승. 자는 야당(野堂)이며 경원부(절강 영파) 사람. 황룡 초당선청(草堂善淸)에게 의지해 법을 받았고 무현 육왕사에 주(住)했음 [오등회원18. 보등록10].
●雪竇持; 송대 황룡파승. 경원(慶元; 지금 절강에 속함) 노씨(盧氏). 상전범경(象田梵卿; 황룡하 2세)에게 의지해 법을 받았고 설두에 거주했음 [보등록10. 오등회원18].
●安國; 호안국(胡安國; 1074-1138)이니 송대 황룡파 거사. 숭안(崇安; 복건 武夷山市) 사람이며 자는 강후(康侯). 소성(1094-1098) 중 진사였고 거듭 승진하여(纍官) 급사중(給事中)이 되었음. 소저(所著)에 춘추전(春秋傳)이 있으며 졸시(卒諡)는 문정(文定). 상봉조수(上封祖秀; 死心悟新을 이었음)에게 의지하며 언외(言外)의 지취를 얻었음. 그가 상봉에게 올린 게에 가로되 축융봉이 두성(杜城)의 하늘과 흡사한데/ 만고강산이 목전에 있다/ 사심(死心)이 원래 죽지 않았음을 꼭 믿을지니/ 야래에 추월이 또 한가지로 원만하다 [오등회원18. 명공법희지4].
●按部; 1. 부류(部類)를 안조(按照)함. 2. 부속(部屬)을 순시(巡視)함.
●齊己; 당말 오대 시승(詩僧). 호남 익양 사람이며 속성은 호며 자호(自號)는 형악사문. 어릴 적에 위산 동경사에서 출가하여 율의(律儀)를 습학(習學)했음. 성격이 음영(吟詠)을 좋아했고 명리를 구하지 않았음. 후에 담주 석상산 경제의 회하(會下)에 다다랐고 요청하여 승무(僧務)를 지(知; 主宰)했음. 용덕 원년(9 21) 후당 장종이 스님을 초청해 승정(僧正)에 임명하자 스님이 저궁막문시(渚宮莫問詩) 15수(白蓮集五에 수록되었음)를 지어 자기의 의지(意志)를 표했음. 산수를 애요(愛樂)했고 왕후를 가까이하지 않았음. 스님의 목에 혹이 있어 시인(時人)이 희롱으로 시낭(詩囊)이라 호칭했음. 그가 지은 바 시는 기조(氣調)가 청담(淸淡)했고 같은 시대의 선배 시승 관휴(貫休)와 더불어 당대(唐代) 시승의 으뜸이었음. 유시(遺詩)에 광헌(光憲)이 편(編)한 바 백련집(白蓮集) 10권이 있음. 석씨의년록5를 안험컨대 스님은 후당 장흥(930-933) 말년에 시적했고 세수는 70여임 [송고승전30. 석씨계고략3. 통지략22. 대청일통지369].
●貫休; (832-912) 당말 오대승. 시와 그림으로 세상에 명칭이 드러났음. 무주 난계(절강 금화) 사람이며 속성은 강, 자는 덕은이며 다른 자는 덕원임. 7세에 금화현 화안사 원정의 좌하(座下)에서 출가했음. 구족계를 받은 후에 곧 절동 오설산으로 들어가 수선(修禪)하기 10년이었음. 일찍이 무상선사를 참했으며 후에 홍주 개원사로 가서 법화경 및 대승기신론을 청강했으며 다 능히 오묘한 뜻을 통달했음. 스님은 불상을 잘 그렸고 특히 수묵라한(水墨羅漢)에 공교(工巧)했음. 또 전ㆍ예ㆍ초서를 독천(獨擅)했으며 그의 시도 또한 자못 사림(士林)에서 칭예(稱譽)하는 바가 됨. 당 건녕 초에 일찍이 오월왕 전류를 알현하고 아울러 시장(詩章)을 바치자 자못 예의로 존중함을 보였음. 소종 천복(901-904)년 사이에 촉에 들어갔는데 전촉(前蜀)의 촉주 왕건과 그 아들 왕연이 한가지로 넉넉히 그를 대우했으며 인하여 자의(紫衣)를 주고 서호(署號)하여 선월대사(禪月大師)라 했음. 건화 2년 시적했음. 나이 81. 저서에 서악집이 있는데 제자 담역이 그 이름을 고쳐 선월집(禪月集)이라 했음 [송고승전30. 석씨계고략3. 오등회원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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