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開善寺】 ①位於南京市朝陽門外之鍾山 梁天監十三年(514) 寶誌示寂 武帝詔有司葬於此地 竝於其上建塔五級 帝親臨致奠 忽於雲間見大士 乃爲之立寺 令其弟子智藏居之 是爲開善寺 南朝陳時 智遠亦曾居此 至唐代乾符(874-879)年中 奉敕改稱寶公院 宋代開寶(968-975)年中 更號開善道場 太平興國五年(980) 與鍾山諸刹 合稱太平興國寺 該寺則爲其中之一支院 而廢其寺名 [梁高僧傳十 續高僧傳五 同十六 金陵梵刹志三 傳燈錄二十七 佛祖統紀三十七] ②位於廣東潮陽 俗稱靈山寺 唐代元和年中 大顚禪師居之 名聞四方 韓愈往訪 叩問禪法 讚歎不已 留衣而別 今有留衣堂
개선사(開善寺) ①남경시 조양문 밖의 종산에 위치함. 양(梁) 천감 13년(5 14) 보지(寶誌)가 시적하자 무제가 유사(有司)에게 조칙하여 이 땅에 장사 지내고 아울러 그 위에 5급(級; 층)의 탑을 세웠음. 무제가 친림하여 전(奠)을 드렸는데 홀연히 구름 사이에 대사가 나타났으며 이에 그를 위해 절을 세우고 그의 제자 지장으로 하여금 거주케 했음. 이것이 개선사(開善寺)가 됨. 남조 진(陳)의 시대에 지원(智遠)이 또한 일찍이 여기에 거주했음. 당대 건부(874-879)년 중에 이르러 봉칙하여 보공원(寶公院)으로 개칭했음. 송대 개보(968-975)년 중에 호를 바꾸어 개선도량(開善道場)이라 했고 태평흥국 5년(980) 종산의 여러 사찰과 더불어 합칭하여 태평흥국사(太平興國寺)라 했음. 그 절은 곧 그 가운데의 1지원(支院)이라 그 절 이름이 폐기되었음 [양고승전10. 속고승전5, 동16. 금릉범찰지3. 전등록27. 불조통기37]. ②광동 조양에 위치함. 속칭이 영산사임. 당대 원화년 중에 대전선사(大顚禪師)가 거주했으며 이름이 사방에 소문났음. 한유가 가서 방문하여 선법을 고문(叩問)하고 찬탄을 말지 않았으며 옷을 남기고 이별했는데 지금도 유의당(留衣堂)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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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先寺】 位於江西星子縣西八點六公里處之廬山南麓 南唐李中主所創 廬山諸寺中最幽邃之地 宋代時 雲門之門下淸耀曾住此 同門智寂之弟子照繼之 太平興國二年(977) 詔改名爲開先華藏寺 仁宗時 善暹開法席 門人佛印了元承其席 後智珣行英等雲門諸德相繼住之 明代天順初年恢復舊名 康熙四十六年(1707) 賜秀峰寺匾額 [禪林僧寶傳二十九 古今圖書集成職方典第八六七 第八七○ 支那佛敎史蹟評解二]
개선사(開先寺) 강서 성자현 서쪽 8, 6㎞ 곳의 여산 남쪽 기슭에 위치함. 남당 이중주(李中主; 李璟)가 창건한 바임. 여산의 여러 절 가운데 가장 유수(幽邃)한 땅임. 송대의 시기에 운문의 문하인 청요(淸耀)가 일찍이 여기에 거주했으며 동문인 지적의 제자 조(照)가 이를 계승했음. 태평흥국 2년(977) 조칙으로 개명하여 개선화엄사(開先華藏寺)라 했으며 인종 때 선섬(善暹)이 법석을 열었고 문인 불인요원(佛印了元)이 그 법석을 승계했음. 후에 지순(智珣)ㆍ행영(行英) 등 운문의 여러 고덕(古德)이 서로 계승하여 여기에 거주했음. 명대 천순 초년에 옛 이름을 회복했으나 강희 46년(1707) 수봉사(秀峰寺)란 편액을 주었음 [선림승보전29. 고금도서집성직방전제867, 제870. 지나불교사적평해2].
【開先暹】 宋代雲門宗僧善暹住廬山開先 詳見善暹
개선섬(開先暹) 송대 운문종승 선섬이 여산의 개선에 거주했으니 상세한 것은 선섬(善暹)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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