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계성선사(淨因繼成禪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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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오교백가설(非唯五敎百家說)
세계삼라일체물(世界森羅一切物)
개입일할시무애(皆入一喝施無碍)
위미보소유소헐(謂靡寶所猶小歇)
수운오료동일심(雖云悟了同一心)
선권위인부동설(善權爲人不同舌)
서건동진항사사(西乾東震恒沙師)
중각수다일린길(衆角雖多一麟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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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교(五敎)와 백가(百家)의 설(說)뿐만 아니라
세계삼라(世界森羅)와 일체의 사물을
다 일할(一喝)에 넣고 무애(無碍)를 베풀고는
이르되 보소(寶所)도 아니며 오히려 조금 쉼이라 했도다.
비록 깨달아 마치면 동일한 마음이라고 이르지만
선교(善巧)의 방편으로 사람을 위함엔 한가지의 혀가 아니니
서건(西乾)과 동진(東震)의 항사(恒沙)의 스님에
뭇 뿔이 비록 많지만 한 기린이 길(吉)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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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인계성선사(淨因繼成禪師)는 지해도평(智海道平)의 법사(法嗣)며 야보도천(冶父道川)의 사법사(嗣法師)니 임제하십세(臨濟下十世).
1~4행 선화엄(善華嚴. 賢首宗의 義虎로 일컬어지던 스님)이란 자가 있어 계성선사(繼成禪師)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 부처님이 교(敎)를 시설(施設)하시매 소승(小乘)으로부터 원돈(圓頓. 圓敎와 頓敎)에 이르기까지 공유(空有)를 쓸어버리고 진상(眞常)을 독증(獨證)한 연후에 만덕(萬德)을 장엄(莊嚴)해야 바야흐로 부처라고 이름하거니와 일찍이 들으니 선종(禪宗)에선 일할(一喝)로 능히 범부를 굴려 성인(聖人)을 이룬다 하니 곧 모든 경론(經論)과 더불어 서로 위배(違背)되는 것 같습니다. 이제 일 할이 만약 능히 우리의 종(宗)인 오교(五敎)에 들어온다면 이는 정설(正說)이 되려니와 만약 능히 들어오지 못한다면 이는 사설(邪說)이 될 것입니다. 스님이 선(善)을 부르자 선이 예 하며 응답했다. 스님이 가로되 법사(法師)의 이른 바 소승교(小乘敎)란 것은 곧 있다(有)는 뜻이요 대승시교(大乘始敎)란 것은 곧 없다(無)는 뜻이요 대승종교(大乘終敎)란 것은 곧 불유불공(不有不空)의 뜻이요 대승돈교(大乘頓敎)란 것은 곧 즉유즉공(卽有卽空)의 뜻이요 일승원교(一乘圓敎)란 것은 곧 있지 않으면서 있음이요(不有而有) 공(空)하지 않으면서 공했다(不空而空)는 뜻이거니와 여(如. 例를 드는 것) 나의 일 할은 능히 오교(五敎)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공교기예(工巧技藝)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능히 들어가느니라. 스님이 소리를 떨쳐 할(喝)로 일할(一喝)하고는 선(善)에게 물어 가로되 듣느냐. 이르되 듣습니다. 가로되 네가 이미 이 일 할을 들으니 이는 있음(有)이라서 능히 소승교(小乘敎)에 들어간 것이니라. 수유(須臾. 暫時後)에 또 선(善)에게 물어 가로되 듣느냐. 이르되 듣지 못합니다. 적래(適來. 아까. 조금 전)의 일 할이 이 없음(無)인지라 능히 시교(始敎)에 들어간 것이니라. 드디어 선(善)을 돌아보며 가로되 나의 처음 일 할을 네가 있음(有)이라고 말했다가 할(喝)한 지 오래되어 소리가 사라지자 네가 다시 없음(無)이라고 말했거니와 없음(無)이라고 말한 즉 원초(元初)엔 실로 있었고 있음(有)이라고 말한 즉 이금(而今)엔 실로 없으니 불유불무(不有不無)이므로 능히 종교(終敎)에 들어간 것이니라. 내가 일 할이 있을 때엔 있음이 이 있음이 아니라 없음을 인(因)한 고로 있음이요 일 할이 없을 때엔 없음이 이 없음이 아니라 있음을 인한 고로 없음인지라 즉유즉무(卽有卽無. 卽有며 卽無임)이므로 능히 돈교(頓敎)에 들어간 것이니라. 모름지기 나의 이 일 할이 일 할로만 지어 씀이 아닌 줄 알지니 유(有)와 무(無)가 미치지 못하고 정(情)과 해(解)가 다 망(亡)하느니라. 있음이라고 말할 때엔 가는 티끌도 세우지 않음이요 없음이라고 말할 때엔 허공에 횡편(橫遍)하므로 곧 이 일 할이 백천만억할(百千萬億喝)에 들어가고 백천만억 할이 이 일 할에 들어가는지라 이런 고로 능히 원교 (圓敎)에 들어간 것이니라. 선(善)이 이에 일어나 재배(再拜)했다. 스님이 다시 일러 가로되 오직 일 할만 그러함이 아니라 내지(乃至) 어묵동정(語默動靜) 일체시일체처(一切時一切處) 일체사일체물(一切事一切物)이 계리계기(契理契機)하여 주편(周遍)해 남김없이 이 일 할 중에 모두 다 구족(具足)했거니와 이는 오히려 건화문정(建化門庭. 第二義門)에서 근기(根機)를 따르는 방편이므로 이를 일러 조금 쉬는 마당이라 하며 보소(寶所)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나니 우리의 조사문하(祖師門下)에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하고 불립문자(不立文字)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천성(千聖)일지라도 전하지 못할 향상일로(向上一路)가 있는 줄을 너무 알지 못함이니라. 선(善)이 또 묻되 어떤 것이 이 일로(一路)입니까. 스님이 가로되 너는 다만 향하(向下)하여 회취(會取)하라. 선(善)이 가로되 어떤 것이 이 보소(寶所)입니까. 스님이 가로되 너의 경계(境界)가 아니니라. 선(善)이 가로되 선사(禪師)의 자비를 바라나이다. 스님이 가로되 창해(滄海)가 변하는 대로 좇아 맡길지라도 마침내 그대에게 통하게 하지는 못하느니라 (任從滄海變 終不爲君通). 선(善)이 입을 다물고 물러갔다 [禪門寶藏錄卷中 出五燈會元]. 미(靡)는 없을 미. 아닐 미.
6행 권(權)은 방편 권.
7행 서건(西乾)은 서쪽 천축국(天竺國)이니 인도. 동진(東震)은 동쪽 진단국(震旦國)이니 중국. 항사(恒沙)는 항하사(恒河沙)의 준말이니 인도의 갠지스강 모래가 밀가루처럼 가늘어 매우 많음을 형용하는 문구로서 불경에 비유어(譬喩語)로 자주 나옴.
8행 희천(希遷. 石頭니 靑原의 法嗣)이 또 가로되 조계대사(曹溪大師. 六祖慧能)께서 도리어 화상(和尙)을 아십니까. 스님(靑原行思)이 가로되 네가 지금 나를 아느냐. 가로되 알지만 또 어찌 능히 알아 얻겠습니까. 스님이 가로되 중각(衆角. 뭇 뿔이니 많은 걸출한 인물을 가리킴)이 비록 많으나 일린(一麟. 麒麟은 聖人이 세상에 출현하기 전에 나타난다는 뿔이 하나인 想像의 동물. 또는 가장 걸출한 인물)으로 만족하노라 [御選語錄卷十六 靑原行思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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