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라집(鳩摩羅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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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득라집벌구자(欲得羅什伐龜玆)
존사숭교난사의(尊師崇敎難思議)
욕득법종사궁녀(欲得法種賜宮女)
단취기화물취니(但取其華勿取泥)
자학삼천발췌팔(資學三千拔萃八)
역경론권삼백여(譯經論卷三百餘)
유십송률미산번(唯十誦律未刪繁)
의계불심설불괴(義契佛心舌不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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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집을 얻고자 구자(龜玆)를 정벌(征伐)하니
법사(法師)를 존경하고 불교를 숭상함이 사의(思議)키 어렵네
법종(法種)을 얻고자 궁녀를 주었거니와
다만 그 꽃만 취하고 진흙은 취하지 말아라 하였도다.
자학(資學)이 삼천이며 발췌(拔萃)가 여덟이며
번역한 경론의 권수(卷數)가 삼백여(三百餘)로다
오직 십송률(十誦律)만 번연(繁衍)을 산삭(刪削)치 못했고
뜻이 불심(佛心)에 계합해 혀가 파괴되지 않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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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행 태원초(太元初. 太元은 서기 376~396) 부진(苻秦)이 강성(强盛)할 때 덕성(德星)이 거듭 나타나자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마땅히 외국에 지인(智人)이 있어 입국해 보필(輔弼)할 것이라 했으며 및 진주(秦主. 苻堅)가 양양(襄陽)을 공격해 법사도안(法師道安)을 얻자 기뻐하며 감응(感應)을 삼았다. 도안(道安)이 겸양(謙讓)하며 감당(敢當)하지 못한다 했으며 인해 진주(秦主)에게 권해 구자국(龜玆國)의 법사(法師) 구마라집(鳩摩羅什)을 영입(迎入)하라 하자 부견(苻堅)이 이를 좇았다. 곧 효기장군(驍騎將軍) 여광(呂光)을 보내 철기칠만(鐵騎七萬)으로써 구자를 정벌(征伐)케 하며 일러 가로되 만약 라집을 획득하면 역말을 달려 송환해 보내라 했다. 여광의 군사가 이르자 라집이 구자왕(龜玆王) 백순(白純)에게 일러 가로되 국운(國運)이 바뀐지라 경적(勍敵)이 있어 일하(日下)를 좇아왔습니다. 마땅히 그것을 공승(供承. 받들음)하고 그 예봉(銳鋒)에 항거하지 마십시오. 백순(白純)이 받아들이지 않고 그에 대항하여 크게 여광에게 깨어지는 바가 되었다. 드디어 라집을 얻었는데 여광이 라집을 어린이며 범인(凡人)으로 보고 그를 희롱하며 구자의 왕녀(王女)로 처(妻)를 삼게 했다. 라집이 고사(苦辭)하며 옳지 않다 하자 여광이 진한 술을 마시게 하고 실중(室中)에 함께 유폐(幽閉)하였으며 드디어 핍박하는 바가 되었다. 및 여광이 귀환하매 부견(苻堅)이 이미 패한지라 인하여 고장(姑臧)에서 왕이라 참칭(僭稱)했다. 부자(父子)가 서로 이었으나 다 용재(庸才. 庸은 어리석을 용)인지라 도를 알지 못했으며 라집은 심해(深解)를 품고 그 나라에 혼거(混居)하며 선화(宣化)할 바가 없었다. 진주(秦主) 요장(姚萇)이란 자는 서융(西戎)의 오랑캐(羌)였다. 부견(苻堅)이 패하매 요장(姚萇)이 숙장(宿將)이 되어 그 부속(部屬)을 거느리고 반반(反叛)하였다. 부견이 그와 더불어 전투했으나 불리(不利)하여 드디어 요장이 불사(佛寺)에서 그를 목매어 죽이게 되었다. 요장이 그 지위를 물려받아 옹관(雍關)에 도읍(都邑)하고 장안(長安)을 고치어 상안(常安)이라 하였다. 어좌(御座)에 있은 지 팔 년에 부견이 귀병(鬼兵)을 거느리고 대낮에 입궁(入宮)하여 그(姚萇)의 음부(陰部)를 찔렀는데 한 섬가량 출혈하고 붕어(崩御)했다. 아들인 흥(興)이 즉위(卽位)하여 제호(帝號)를 내리고 천왕(天王)이라 일컬었으며 얼마되지 않아 간과(干戈)가 침식(寢息)하고 풍화(風化)가 대행(大行)하니 가상(嘉祥)이 거듭 나타났으며 및 나무가 연리(連理. 서로 다른 나무의 가지가 맞닿아 결이 통해 하나가 되는 것)하여 처음 전정(殿庭)에 나매 다 이르기를 지인(智人)이 입국할 상서(祥瑞)라 했다. 이에 요석덕(姚碩德)을 보내 양(涼)의 여륭(呂隆)을 정벌하고 라집법사를 영접해 이르니 진주(秦主. 姚興)가 깊이 예우(禮遇)를 더했으며 국사(國師)로써 우대(優待)했다 [佛祖歷代通載卷八].
2행 처음 구자(龜玆)에 있을 때 이웃 나라의 여러 왕이 회동(會同)하여 매번 라집에게 청하여 설법하매 반드시 자리 앞에 꿇어 엎드리고서 라집으로 하여금 어깨를 밟고 자리에 오르게 했다 [佛祖歷代通載卷八].
3행 어느 날 왕(秦의 姚興)이 라집에게 일러 가로되 법사의 재명(才明)이 초오(超悟)하여 해내(海內. 국내)에 무쌍(無雙)하니 법종(法種)을 잇지 않음이 옳겠습니까. 드디어 궁빈(宮嬪) 열 사람으로써 핍박하여 그것을 받게 했다. 라집도 또한 스스로 이르되 강설할 적마다 두 소아(小兒)가 나의 어깨에 오르니 욕장(欲障)이로다. 이로부터 승방(僧房)에 머무르지 않고 따로 해사(廨舍. 廨는 관청 해)를 세웠다. 여러 중이 그것을 본받으려 하는 자가 있자 라집이 바늘을 모아 발우에 채우고서 일러 가로되 만약 서로 본받으려면 능히 이것을 먹는 자라야 이에 가히 축실(畜室. 妻를 둠)하리라. 들드니 바늘을 진입하되 보통의 반찬과 같은지라 여러 중이 부끄러워하며 그만두었다 [佛祖歷代通載卷八].
4행 라집이 늘 법좌에 오르면 매번 가로되 비여(譬如) 취니(臭泥) 가운데 연화(蓮華)가 나면 다만 그 꽃만 취하고 취니(臭泥)는 취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佛祖歷代通載卷八].
5~6행 삼백여 권의 경론(經論)을 번역하였다. 자학(資學)이 삼천이었는데 발췌(拔萃)가 여덟이 있었으니 가로되 도생(道生) 승조(僧肇) 도융(道融) 승예(僧叡) 도항(道恒) 승영(僧影) 혜관(慧觀) 혜엄(慧嚴) 등이었으며 각자 저술(著述)이 있다 [佛祖歷代通載卷八]. 자학(資學)은 학문을 도우는 제자. 발췌(拔萃)는 발군(拔群)과 같은 뜻이니 여럿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
7~8행 대중을 모이게 하여 고별(告別)하며 가로되 법을 인해 상봉했으나 달리 마음을 다하지 못했나니 바야흐로 다시 후세에 측창(惻愴)을 말함이 옳을 것입니다. 스스로 암단(闇短)으로써 전역(傳譯)에 그릇되이 충당(充當)되었거니와 출간한 바 경론에 오직 십송률(十誦律)만 산번(刪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만약 뜻이 불심(佛心)에 계합(契合)한다면 몸을 태우는 날에 혀가 초괴(焦壞)되지 않을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 서거(逝去)했다. 사유(闍維. 화장)하는 날에 혀가 과연 홍련색(紅蓮色)과 같았으며 부서지지 않았다 [佛祖歷代通載卷八]. 산(刪)은 깎을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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