㉓不思善惡
❶六祖因❷明上座 趁至❸大庾嶺 祖見明至 卽擲❹衣鉢於石上云 此衣表信 可力爭耶 任君將去 明遂擧之如山不動 踟蹰悚慄 明曰 我來求法 非爲衣也 願❺行者❻開示 祖云 不思善不思惡 正❼與麽時那箇是明上座❽本來面目 明當下大悟 遍體汗流 泣淚作禮問曰 上來密語密意外 還更有意旨否 祖曰 我今爲汝說者 卽非密也 汝若❾返照自己面目 密却在汝邊 明云 某甲雖在❿黃梅隨衆 實未省自己面目 今蒙指授入處 如人飮水冷暖自知 今行者卽是某甲師也 祖云 汝若如是 則吾與汝同師黃梅 善自護持
無門曰 六祖可謂 是事出急家 ⓫老婆心切 譬如新⓬荔支剝了殼 去了核 送在爾口裏 只要爾嚥一嚥
頌曰 描不成兮畫不就 贊不及兮休⓭生受 本來面目沒處藏 ⓮世界壞時⓯渠不朽
❶六祖; 六祖慧能 慧能(六三八~七一三) 唐代僧 又作惠能 東土禪宗第六祖 號六祖大師 大鑑禪師 祖籍范陽(河北) 俗姓盧 生於南海新興(廣東) 其父早亡 家貧 常採薪汲水以奉寡母 一日負薪至市 聞客讀誦金剛經 心卽開悟 時五祖弘忍住蘄州黃梅之東禪院 法門甚盛 師乃前往拜謁 五祖遂使入碓房舂米 歷八月 一日夜召師入室 潛授衣法 竝遣其連夜南歸 隱於四會懷集之間 儀鳳元年(六七六)至南海 遇印宗法師於法性寺 受具足戒 翌年 移住於韶陽曹溪寶林寺 弘揚頓悟法門 與神秀於北方所倡之漸悟法門相對 史稱南頓北漸 南能北秀 其弟子法海 將其敎說編成一書 名六祖法寶壇經 盛行於世 後應刺史韋據之請 於大梵寺樹立法幢 未久歸曹溪 弘布大法 道俗歸崇 神龍元年(七○五) 中宗派遣內侍薛簡召師至京師 師稱疾固辭未往 帝乃敕賜摩衲袈裟及寶鉢等物 竝敕改寶林寺爲中興寺 三年 更賜法泉寺額 師又曾捨宅爲國恩寺 先天元年(七一二) 命門人於寺內建立報恩塔 翌年七月 歸返國恩寺 八月示寂 壽七十六 師肉身不壞 迄今仍存 歸停曹溪 憲宗時諡號大鑑禪師 遺錄有六祖壇經一卷 金剛經口訣等 師之嗣法弟子四十餘人中 以荷澤神會 南陽慧忠 永嘉玄覺 靑原行思 南嶽懷讓等最著 開後世臨濟曹洞等五家七宗之禪 [六祖壇經 佛祖統紀二十九 宋高僧傳八 傳燈錄五 釋氏稽古略三 傳法正宗記六]
❷明上座; 道明上座 道明 唐代僧 鄱陽(江西)人 俗姓陳 陳宣帝之裔 國亡落於民間 以其王孫 曾受四品將軍之爵 因有將軍之號 幼年於永昌寺出家 於高宗之世 投黃梅山五祖弘忍 初無證悟 後聞大鑑慧能得五祖衣鉢 乃躡迹急追 而於大庾嶺會之 因六祖慧能之開示 言下大悟 遂獨往廬山布水臺 經三載後 始往袁州蒙山 大唱玄化 初名慧明或惠明 以避六祖上字 故名道明 弟子等盡遣過嶺南 參禮六祖 [五燈會元二 六祖壇經 祖堂集二 宋高僧傳八 傳燈錄四] ◆上座 參禪僧中的首座稱爲上座 多用作對禪僧的尊稱 ▲四分律刪繁補闕行事鈔下三之二 毘尼母云 從無夏至九夏是下座 十夏至十九夏名中座 二十夏至四十九夏名上座 五十夏已去 一切沙門國王所尊敬 是耆舊長老 ▲釋氏要覽一 五分律云 齊幾名上座 佛言上更無人名上座 毘婆沙論云 有三上座 一生年上座 卽尊長耆舊具戒名眞生故 二世俗上座 卽知法富貴大財大位大族大力大眷屬 雖年二十 皆應和合推爲上座 三法性上座 卽阿羅漢 婆沙論云 夫上座者 心安住故不爲世違順傾動 是名上座
❸大庾嶺; 爲通往嶺南的五條要道之一 位於江西大庾縣南 廣東南雄縣北 古稱塞上 漢武帝遣庾勝兄弟征伐南越 庾勝據守此嶺 遂稱大庾 又稱庾嶺 臺嶺山
❹衣鉢; 又稱衣盂 指三衣及一鉢 三衣 謂九條衣 七條衣 五條衣三種袈裟 鉢 乃修行僧之食器 衣鉢 亦爲袈裟鉢盂之總稱 [增一阿含經四十四 大毘婆沙論一三五 大智度論三 敕修百丈淸規三遷化條]
❺行者; 乃指觀行者 或泛指一般佛道之修行者 又稱行人修行人 禪林中 行者乃指未出家而住於寺內幇忙雜務者 ▲釋氏要覽上 善見律云 有善男子 欲求出家 未得衣鉢 欲依寺中住者 名畔頭波羅沙(未見譯語) 今詳 若此方行者也 經中多呼修行人爲行者
❻開示; 宣說(道法)
❼與麽; 原爲宋代之俗語 又作恁麽 伊麽 漝麽 意卽這麽 如此 指物之辭也
❽本來面目; 又作本地風光 卽身心自然脫落 而現前之人人本具之心性 與顯敎之本覺 密敎之本初 意義相同
❾返照; 意謂回收向外尋覓的眼光 觀照自身自心
❿黃梅; 此指五祖弘忍 黃梅 ㊀位於湖北省東南 黃梅縣有東西二山 此是禪宗四祖道信及五祖弘忍參禪得道處 五祖竝以之爲弘揚東山法門之根據地 其中道信住於黃梅西北十七公里之雙峰山(西山)正覺寺 弘忍則振弘敎化於黃梅東北十七公里處之馮茂山(東山)眞惠寺 六祖慧能繼承五祖弘忍之衣鉢 弘法於黃梅西南城外之東漸寺 自此以後 黃梅成爲佛敎勝地 史稱黃梅佛國 最大者爲老祖寺 四祖寺 五祖寺三大禪林 淸代聖祖曾頒賜天下第一山匾額 又黃梅西北二十三公里處有黃梅山 以山中多梅樹而得名 ㊁指五祖弘忍 弘忍是湖北黃梅人 且在黃梅東山說法 ▲六祖壇經 一僧問師云 黃梅意旨 甚麽人得 師云 會佛法人得 僧云 和尙還得否 師云 我不會佛法
⓫老婆心; 老婆者 稱慈悲之語 取親切叮嚀之義
⓬荔支; 又作荔枝 原産於中國南部 是亞熱帶果樹 常綠喬木 高約10米 果皮有鱗斑狀突起 鮮紅 紫紅 果肉産鮮時半透明凝脂狀 味香美 但不耐儲藏 [百度百科]
⓭生受; 受苦痛
⓮世界; 梵語曰路迦 世爲遷流之義 謂過現未時之遷行也 界謂具東西南北之界畔 卽有情依止之國土也 又曰世間 間爲間隔之義 故與界之義同 此二者雖通用於有情與國土 而常言者爲國土也 [楞嚴經四 名義集三] ▲禪門拈頌集第七八六則 拈頌說話曰 世者 時分 界者 區分 一塵一法 皆有世界也 ▲續古尊宿語要一 靈源淸 古往今來謂之世 八方上下謂之界
⓯渠; 此指本來面目 眞如法身 渠 ㊀他 第三人稱代詞 ▲傳燈錄十三 風穴延沼 明昧兩岐 與你一時掃却 直敎箇箇如師子兒 吒呀地哮吼一聲 壁立千仞 誰敢正眼覰著 覰著卽瞎却渠眼 ㊁指本來面目 眞如法身 ▲洞山錄 切忌從他覓 迢迢與我疏 我今獨自往 處處得逢渠 渠今正是我 我今不是渠 應須恁麽會 方得契如如
㉓불사선악(不思善惡)
❶육조(六祖)가, ❷명상좌(明上座)가 쫓아와서 ❸대유령(大庾嶺)에 이름(至)으로 인해 육조가 명(明)의 이름(至)을 보고 곧 ❹의발(衣鉢)을 돌 위에 던지고 이르되 이 옷은 표신(表信)이거늘 가히 힘으로 다투겠는가. 그대의 가져가는 대로 맡긴다. 명이 드디어 그것을 들었으나 산과 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머뭇거리며 두려워하다가 명이 가로되 내가 온 것은 법을 구함이지 옷 때문이 아닙니다. 원컨대 ❺행자(行者)는 ❻개시(開示)하십시오. 육조가 이르되 선(善)도 생각하지 말고 악(惡)도 생각하지 말아라, 바로 이러할(❼與麽) 때 어느 것이 이 명상좌의 ❽본래면목(本來面目)인가. 명이 당하(當下)에 대오(大悟)했다. 온몸에 땀을 흘리고 울면서 눈물 흘리며 작례(作禮)하고 물어 가로되 상래(上來. 方今. 以上)의 밀어밀의(密語密意) 외에 도리어 다시 의지(意旨)가 있습니까. 육조가 가로되 내가 지금 너를 위해 설한 것은 곧 비밀(秘密)이 아니다. 네가 만약 자기의 면목(面目)을 ❾반조(返照)한다면 비밀은 도리어 여변(汝邊)에 있다. 명이 이르되 모갑(某甲)이 비록 ❿황매(黃梅)에 있으면서 대중을 따랐으나 실로 자기면목(自己面目)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 입처(入處)를 가르쳐 주심을 입으니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시매 냉난(冷暖)을 스스로 앎과 같습니다. 이제 행자는 곧 이 모갑(某甲)의 스승입니다. 육조가 이르되 네가 만약 이와 같다면 곧 나와 너는 황매(黃梅)를 동사(同師)했다. 잘 스스로 호지(護持)하라.
무문(無門)이 가로되 육조는 가위(可謂) 이 일이 급가(急家)에서 나와 ⓫노파심(老婆心)이 간절하다 할 만하다. 비여(譬如. 비유로 예를 듦) 새 ⓬여지(荔支)를 껍질을 벗기고 씨(核)를 제거하고 그의 입속으로 보내어 있게 하면서 다만 그의 한 번 삼켜서 삼킴을 요하였도다.
송왈(頌曰) 묘사(描寫)도 이루지 못하고 그림도 이루지 못하고/ 찬탄도 미치지 못하고 ⓭생수(生受)도 쉬었도다/ 본래면목을 감출 곳 없나니/ ⓮세계(世界)가 무너질 때 그(⓯渠)는 썩지 않도다.
❶육조(六祖); 육조혜능(六祖慧能)임. 혜능(慧能. 638~713) 당대(唐代)의 승려며 또 혜능(惠能)으로 지음. 호(號)가 육조대사(六祖大師)ㆍ대감선사(大鑑禪師)임. 조사(祖師)의 관적(貫籍)은 범양(范陽. 河北)이며 속성(俗姓)은 노(盧)임. 남해신흥(南海新興. 廣東)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일찍 죽었음. 집이 가난하여 늘 땔나무를 채집(採集)하고 물을 길어 그 홀어머니를 봉양했음. 어느 날 땔나무를 지고 시장에 이르렀다가 나그네의 금강경(金剛經) 독송(讀誦)함을 듣고 마음이 곧 개오(開悟)했음. 당시에 오조홍인(五祖弘忍)이 기주(蘄州) 황매(黃梅. 湖北省 東南 黃梅縣)의 동선원(東禪院)에 거주하면서 법문(法門)이 매우 흥성(興盛)했음. 스님이 곧 앞으로 가서 배알(拜謁)했는데 오조가 드디어 방앗간에 들어가 쌀을 찧게 했음. 여덟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스님을 불러 입실케 하고 몰래 의법(衣法)을 전수(傳授)했음. 아울러 그를 보내면서 밤을 이어 남쪽으로 돌아가 사회(四會)와 회집(懷集)의 사이에 은거하라 했음. 의봉원년(儀鳳元年. 676) 남해(南海)에 이르러 법성사(法性寺)에서 인종법사(印宗法師)를 만나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음. 다음 해 소양(韶陽)의 조계(曹溪) 보림사(寶林寺)로 이주(移住)하여 돈오법문(頓悟法門)을 크게 선양(宣揚)했는데 신수(神秀)의, 북방에서 제창(提倡)한 바 점오법문(漸悟法門)과 상대되므로 사가(史家)가 남돈북수(南頓北漸)ㆍ남능북수(南能北秀)라 일컬음. 그의 제자 법해(法海)가 그의 교설(敎說)을 가지고 한 책을 편성(編成)하고는 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이라고 이름했으며 세상에 성행(盛行)했음. 후에 자사(刺史) 위거(韋據)의 청에 응해 대범사(大梵寺)에서 법당(法幢)을 수립(樹立)했고 오래지 않아 조계(曹溪)로 돌아가 대법(大法)을 홍포(弘布)했는데 도속(道俗. 僧俗)이 귀의하며 숭배(崇拜)했음. 신룡원년(神龍元年. 705) 중종(中宗)이 내시(內侍) 설간(薛簡)을 파견(派遣)하여 스님을 불러 경사(京師. 首都. 帝都. 師는 서울 사)에 이르게 하자 스님이 질병을 일컬으며 고사(固辭)하고 가지 않자 황제가 이에 칙명(勅命)으로 마납가사(摩衲袈裟) 및 보발(寶鉢) 등의 물건을 주었으며 아울러 칙명(勅命)으로 보림사(寶林寺)를 고쳐 중흥사(中興寺)로 만들었음. 삼년(三年. 707)에 다시 법천사(法泉寺)의 편액(扁額)을 주었음. 스님이 또 일찍이 집을 희사(喜捨)해 국은사(國恩寺)를 만들었는데 선천원년(先天元年. 712)에 문인(門人)에게 명령해 절 안에 보은탑(報恩塔)을 건립케 하고 다음 해 칠월 국은사(國恩寺)로 돌아갔다가 팔월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일흔여섯임. 스님의 육신이 무너지지 않아 지금까지 그대로 존재하며 조계로 돌아가 머묾. 헌종(憲宗) 때 대감선사(大鑑禪師)로 시호(諡號)했음. 유록(遺錄)으론 육조단경(六祖壇經) 1권, 금강경구결(金剛經口訣) 등이 있음. 스님의 사법제자(嗣法弟子) 사십여인(四十餘人) 중에 하택신회(荷澤神會)ㆍ남양혜충(南陽慧忠)ㆍ영가현각(永嘉玄覺)ㆍ청원행사(靑原行思)ㆍ남악회양(南嶽懷讓) 등이 가장 저명함. 후세의 임제(臨濟)ㆍ조동(曹洞) 등 오가칠종(五家七宗)의 선(禪)을 열었음. [六祖壇經 佛祖統紀二十九 宋高僧傳八 傳燈錄五 釋氏稽古略三 傳法正宗記六].
❷명상좌(明上座); 도명상좌(道明上座)임. 도명(道明) 당대(唐代)의 승려며 파양(鄱陽. 江西)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진(陳)임. 진(陳) 선제(宣帝)의 후예(後裔)며 나라가 망하자 민간(民間)에 떨어졌음. 그가 왕손(王孫)이기 때문에 일찍이 사품장군(四品將軍)의 작위(爵位)를 받았으며 인하여 장군의 호(號)가 있음. 어린 나이에 영창사(永昌寺)에서 출가했고 고종(高宗)의 시세(時世)에 황매산(黃梅山) 오조홍인(五祖弘忍)에게 투신(投身)했으나 처음엔 증오(證悟)가 없었음. 후에 대감혜능(大鑑慧能)이 오조(五祖)의 의발(衣鉢)을 얻었다 함을 듣고 자취를 밟아 급히 추격(追擊)하여 대유령(大庾嶺)에서 그와 만났으며 육조혜능의 개시(開示)로 인해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했음. 드디어 홀로 여산(廬山)의 포수대(布水臺)로 갔으며 세 해가 경과한 후 비로소 원주(袁州)의 몽산(蒙山)으로 가서 현화(玄化)를 대창(大唱)했음. 처음 이름은 혜명(慧明) 혹 혜명(惠明)이었으나 육조(六祖)의 상자(上字. 慧能의 慧字)를 피한 까닭에 고로 이름이 도명(道明)임. 제자 등을 모두 보내어 영남(嶺南)에 이르러 육조를 참례(參禮)케 했음. [五燈會元二 六祖壇經 祖堂集二 宋高僧傳八 傳燈錄四]. ◆상좌(上座) 참선하는 승려 중의 수좌(首座)를 상좌(上座)라고 호칭하며 다분히 선승(禪僧)에 대한 존칭으로 쓰임. ▲사분율산번보궐행사초하삼지이(四分律刪繁補闕行事鈔下三之二). 비니모(毘尼母)에 이르되 무하(無夏)로부터 내지 구하(九夏)는 이 하좌(下座)며 십하(十夏) 내지 십구하(十九夏)는 이름이 중좌(中座)며 이십하(二十夏) 내지 사십구하(四十九夏)는 이름이 상좌(上座)며 오십하(五十夏) 이후는 일체의 사문과 국왕이 존경하는 바이니 이는 기구장로(耆舊長老)이다. ▲석씨요람일(釋氏要覽一). 오분율(五分律)에 이르되 얼마나 제등(齊等)해야 이름이 상좌(上座)입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위에 다시 사람이 없음을 이름해 상좌니라. 비바사론(毘婆沙論)에 이르되 세 상좌가 있다. 일(一) 생년상좌(生年上座)니 곧 존장(尊長)과 기구(耆舊. 노인)와 구계(具戒)니 이름이 진성(眞生)인 연고다. 이(二) 세속상좌(世俗上座)니 곧 법을 알고 부귀하며 많은 재물과 큰 지위와 큰 종족과 큰 역량과 많은 권속이면 비록 나이가 스물이라도 다 응당 화합(和合)하여 추대해 상좌로 삼는다. 삼(三) 법성상좌(法性上座)니 곧 아라한(阿羅漢)이다. 바사론(婆沙論)에 이르되 무릇 상좌란 것은 마음이 안주(安住)한 고로 세상의 위순(違順)에 경동(傾動)하지 않나니 이 이름이 상좌다.
❸대유령(大庾嶺); 영남(嶺南)을 통왕(通往)하는 다섯 갈래 요도(要道)의 하나. 강서(江西) 대유현(大庾縣) 남쪽과 광동(廣東) 남웅현(南雄縣) 북쪽에 위치하며 고칭(古稱)은 새상(塞上)임. 한(漢) 무제(武帝)가 유승형제(庾勝兄弟)를 파견(派遣)하여 남월(南越)을 정벌(征伐)했는데 유승(庾勝)이 이 고개(嶺)를 거수(據守)한지라 드디어 대유(大庾)로 일컬음. 또 명칭이 유령(庾嶺)ㆍ대령산(臺嶺山)임.
❹의발(衣鉢); 또 명칭이 의우(衣盂)니 삼의(三衣)와 일발(一鉢)을 가리킴. 삼의(三衣) 이르자면 구조의(九條衣)ㆍ칠조의(七條衣)ㆍ오조의(五條衣)의 세 가지 가사(袈裟)임. 발(鉢) 곧 수행승(修行僧)의 식기(食器)임. 의발(衣鉢)은 또한 가사와 발우의 총칭(總稱)이 됨. [增一阿含經四十四 大毘婆沙論一三五 大智度論三 敕修百丈淸規三遷化條].
❺행자(行者); 곧 관행(觀行)하는 자를 가리킴. 혹은 널리 일반(一般)의 불도(佛道)의 수행자를 가리킴. 또 호칭(呼稱)이 행인(行人)ㆍ수행인(修行人)임. 선림 중에서의 행자는 곧 출가하지 않고 사내(寺內)에 거주하면서 바쁜 잡무(雜務)를 도우는 자를 가리킴. ▲석씨요람상(釋氏要覽上). 선견율(善見律. 善見律毘婆沙十一)에 이르되 어떤 선남자(善男子)가 출가를 구하려 하나 의발(衣鉢)을 얻지 못하고 사중(寺中)에 의지(依止)하며 머무려는 자를 이름해 반두바라사(畔頭波羅沙. 譯語를 보지 못했음)니 여금(如今)에 상고(詳考)하건대 이 지방의 행자와 같으며 경중(經中)에 다분히 수행인(修行人)을 일컬어 행자(行者)라 한다.
❻개시(開示); 도법(道法)을 선설(宣說)함.
❼여마(與麽); 원래(原來) 송대(宋代)의 속어(俗語)가 됨. 또 임마(恁麽)ㆍ이마(伊麽)ㆍ습마(漝麽)로 지으며 뜻은 곧 저마(這麽)ㆍ여차(如此)니 사물을 가리키는 말임.
❽본래면목(本來面目); 또 본지풍광(本地風光)으로 지음. 곧 신심(身心)이 자연히 탈락(脫落)하여 현전(現前)의 사람마다 본래 구족한 심성(心性)임. 현교(顯敎)의 본각(本覺)ㆍ밀교(密敎)의 본초(本初)와 의의(意義)가 서로 같음.
❾반조(返照); 뜻으로 이르자면 밖을 향해 심멱(尋覓)하던 안광(眼光)을 회수(回收)하여 자신(自身)과 자심(自心)을 관조(觀照)함.
❿황매(黃梅); 여기에선 오조홍인(五祖弘忍)을 가리킴. 황매(黃梅) ㊀호북성(湖北省) 동남(東南)에 위치함. 황매현(黃梅縣)에 동서(東西)의 두 산이 있는데 이것은 이 선종(禪宗) 사조도신(四祖道信)과 오조홍인(五祖弘忍)이 참선하여 득도(得道)한 곳임. 오조(五祖)는 아울러 이로써 동산법문(東山法門)을 홍양(弘揚)한 근거지(根據地)로 삼았음. 그 중에 도신(道信)은 황매(黃梅) 서북 17㎞의 쌍봉산(雙峰山. 西山) 정각사(正覺寺)에 거주했고 홍인(弘忍)은 곧 황매 동북 17㎞ 곳의 풍무산(馮茂山. 東山) 진혜사(眞惠寺)에서 교화(敎化)를 진홍(振弘)했고 육조혜능(六祖慧能)은 오조홍인(五祖弘忍)의 의발(衣鉢)을 승계하여 황매 서남 성(城) 밖의 동점사(東漸寺)에서 홍법(弘法) 했음. 이로부터 이후로는 황매가 불교의 승지(勝地)가 되었으며 사칭(史稱)이 황매불국(黃梅佛國)임. 가장 큰 것은 노조사(老祖寺)ㆍ사조사(四祖寺)ㆍ오조사(五祖寺)의 삼대선림(三大禪林)이 됨. 청대(淸代)의 성조(聖祖)가 일찍이 천하제일산(天下第一山)이란 편액(匾額)을 반사(頒賜. 下賜)했음. 또 황매 서북 23㎞ 곳에 황매산(黃梅山)이 있으며 산중에 매화나무가 많기 때문에 이름을 얻었음. ㊁오조홍인(五祖弘忍)을 가리킴. 홍인은 이 호북(湖北) 황매(黃梅) 사람이며 또 황매의 동산(東山)에 있으면서 설법했음. ▲육조단경(六祖壇經). 한 중이 스님에게 물어 이르되 황매(黃梅)의 의지(意旨)를 어떤 사람이 얻었습니까. 스님이 이르되 불법을 아는 사람이 얻었다. 중이 이르되 화상(和尙)은 도리어 얻었습니까. 스님이 이르되 나는 불법을 알지 못한다.
⓫노파심(老婆心); 노파(老婆)란 것은 자비(慈悲)를 일컫는 말이니 친절(親切)과 정녕(叮嚀)의 뜻을 취했음.
⓬여지(荔려支); 또 여지(荔枝)로 지음. 중국 남부가 원산지(原産地)며 이것은 아열대(亞熱帶)의 과수(果樹)며 상록(常綠) 교목(喬木)임. 높이는 약(約) 10m며 과피(果皮)에 인반(鱗斑. 비늘반점) 형상(形狀)의 돌기(突起)가 있으며 선홍(鮮紅)이며 자홍(紫紅)임. 과육(果肉)은 생산해 신선(新鮮)할 때는 반투명(半透明)의 응지상(凝脂狀)이며 맛은 향미(香美)롭되 다만 저장(儲藏)을 감내(堪耐)하지 못함. [百度百科].
⓭생수(生受); 고통을 받음.
⓮세계(世界); 범어로 가로되 로가(路迦)임. 세(世)는 천류(遷流)의 뜻이니 이르자면 과거ㆍ현재ㆍ미래 때의 천행(遷行)임. 계(界)는 이르자면 동서남북의 계반(界畔)을 갖추었으니 곧 유정(有情)이 의지(依止)하는 국토(國土)임. 또 가로되 세간(世間)이니 간(間)은 간격(間隔)의 뜻이 되는지라 고로 계(界)의 뜻과 같음. 이 이자(二者)는 비록 유정(有情)과 국토에 통용(通用)되지만 늘 말하는 것은 국토가 됨. [楞嚴經四 名義集三].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제786칙. 염송설화(拈頌說話)에 가로되 세(世)란 것은 시분(時分)이며 계(界)란 것은 구분(區分)이니 일진일법(一塵一法)에 다 세계가 있다. ▲속고존숙어요일(續古尊宿語要一) 영원청(靈源淸). 고왕금래(古往今來)를 일러 세(世)라 하고 팔방상하(八方上下)를 일러 계(界)라 한다.
⓯거(渠); 여기에선 본래면목(本來面目)ㆍ진여법신(眞如法身)을 가리킴. 거(渠) ㊀그(他)니 제삼인칭대사(第三人稱代詞)임. ▲전등록십삼(傳燈錄十三) 풍혈연소(風穴延沼). 명매(明昧)의 양기(兩岐)를 너에게 일시에 소각(掃却)해 주어 바로 개개(箇箇)가 사자아(師子兒)와 같게 해 타하지(吒呀地)에서 일성(一聲)을 효후(哮吼)하매 벽립천인(壁立千仞)이거늘 누가 감히 정안(正眼)으로 엿보겠는가, 엿본다면 그(渠)의 눈을 멀게 해 버릴 것이다. ㊁본래면목(本來面目)ㆍ진여법신(眞如法身)을 가리킴. ▲동산록(洞山錄). 그를 좇아 찾음을 간절히 꺼리나니/ 자꾸 멀어져 나와 소원(疏遠)하니라/ 내가 이제 홀로 스스로 가나니/ 곳곳마다 그(渠)를 얻어 만나도다/ 그(渠)는 이제 바로 이 나지만/ 나는 이제 이 그(渠)가 아니로다/ 응당 이러히 앎을 써야/ 비로소 여여(如如)에 계합(契合)함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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