㉖二僧卷簾
❶淸涼❷大法眼 因僧❸齋前上參 眼以手指簾 時有二僧 同去卷簾 眼曰 一得一失
無門曰 且道 是誰得誰失 若向者裏著得一隻眼 便知❹淸涼國師❺敗闕處 然雖如是 切忌向得失裏❻商量
頌曰 卷起明明徹❼太空 太空猶未合吾宗 爭似從空都放下 ❽綿綿密密不通風
❶淸涼; ㊀淸涼寺 位于江蘇省南京市淸凉山上 五代徐溫創建 初稱興敎寺 南唐昇元(九三七~九四二)初 改稱石城淸涼大道場 又稱淸涼報恩禪院 別稱廣慧寺 初爲休復(悟空)所居 後南唐主延請法眼宗之祖文益居此寺傳法 世稱淸涼文益 其後泰欽 文邃 亦住此寺 宋太平興國五年(九八○) 將幕府山的淸涼廣惠寺 遷移至此寺 淳祐十二年(一二五二) 在山上建翠微亭 明初詔改淸涼廣慧寺爲淸涼寺 後毁于兵火 淸末重建淸涼寺 但規模大爲縮小 抗戰期間 又遭兵火毁壞 寺周林木也砍伐一盡 [大明一統志六 金陵梵刹志十九] ㊁指淸涼文益禪師
❷大法眼; 文益諡號大法眼 文益(八八五~九五八) 五代僧 餘杭(浙江)人 俗姓魯 七歲出家 初依明州希覺攻毘尼 後投長慶慧稜學禪法 久之不契 偶遇羅漢桂琛於漳州 遂嗣其法 出世於臨川崇壽院 南唐國主李氏禮敬有加 竝迎至金陵 住報恩院 事以師禮 賜號淨慧大師 後主且從之受戒 爲建淸涼伽藍 高麗日本等國 渡海來學者 相望於途 顯德五年秋閏七月示寂 壽七十四 諡大法眼 爲法眼宗之開祖 著有宗門十規論 大法眼文益禪師語錄各一卷
❸齋; 齋者謂不過中食 正午以前所作之食事也 戒律上 於食分時非時 正午以前爲正時 以後爲非時 時者宜食 非時者不宜食 因而時中之食爲齋食
❹淸涼國師; 淸涼 指文益 文益未曾封爲國師 疑是慧開私謂
❺敗闕; 失敗缺陷之義 又受挫 挫敗
❻商量; 原指商賈買賣物品時之互相議價 於禪林中 轉指學人參禪辨道時之問答審議 ▲祖庭事苑一 商量 如商賈之量度 使不失於中平 以各得其意也
❼太空; 太虛空 謂浩浩宇宙之虛空
❽綿綿密密; 綿密的疊語 細緻周密貌
㉖이승권렴(二僧卷簾)
청량대법안(❶淸涼❷大法眼)이, 중이 ❸재전(齋前)에 올라와 참알(參謁)함으로 인해 법안이 손으로 주렴(珠簾)을 가리켰다. 때에 두 중이 있어 함께 가서 주렴을 걷었다. 법안이 가로되 하나는 얻었고 하나는 잃었다.
무문(無門)이 가로되 그래 말하라, 이 누가 얻었으며 누가 잃었는가. 만약 이 속을 향해 한 짝 눈을 붙인다면 바로 ❹청량국사(淸涼國師)의 ❺패궐처(敗闕處)를 알 것이다. 그러하여 비록 이와 같으나 득실(得失) 속을 향해 ❻상량(商量)함을 간절히 꺼리노라.
송왈(頌曰) 걷어 일으키매 밝디밝게 ❼태공(太空)에 사무치지만/ 태공도 오히려 우리의 종(宗)에 합당하지 않도다/ 어찌 태공으로부터 모두 놓아버려서/ 면면밀밀(綿綿密密)하여 바람도 통하지 않음만 같으랴.
❶청량(淸涼); ㊀청량사(淸涼寺)니 강소성(江蘇省) 남경시(南京市) 청량산(淸凉山) 위에 위치함. 오대(五代)에 서온(徐溫)이 창건(創建)했으며 처음의 명칭은 흥교사(興敎寺)였음. 남당(南唐) 승원(昇元. 937~942)초에 석성청량대도량(石城淸涼大道場)으로 개칭(改稱)했음. 또 명칭이 청량보은선원(淸涼報恩禪院)이며 별칭(別稱)이 광혜사(廣慧寺)임. 처음엔 휴복(休復. 悟空)이 거주한 곳이며 후에 남당주(南唐主)가 법안종(法眼宗)의 개조(開祖)인 문익(文益)을 연청(延請)해 이 절에 거주하며 전법(傳法)케 했으니 세칭이 청량문익(淸涼文益)임. 그 후 태흠(泰欽)과 문수(文邃)도 또한 이 절에 거주했음. 송(宋) 태평흥국오년(太平興國五年. 980) 막부산(幕府山)의 청량광혜사(淸涼廣惠寺)를 가지고 천이(遷移)하여 이 절에 이르게 했음. 순우십이년(淳祐十二年. 1252) 산 위에 취미정(翠微亭)을 건립해 두었으며 명초(明初)에 조칙(詔勅)으로 청량광혜사(淸涼廣惠寺)를 고쳐 청량사(淸涼寺)라 했으며 후에 병화(兵火)에 훼괴(毁壞)되었음. 청말(淸末)에 청량사(淸涼寺)를 중건(重建)했지만 다만 규모가 크게 축소(縮小)되었음. 항전기간(抗戰期間)에 또 병화(兵火)를 만나 훼괴(毁壞)되어 절 주위의 임목(林木)도 또한 베어져 모두 없어졌음. [大明一統志六 金陵梵刹志十九]. ㊁청량문익선사(淸涼文益禪師)를 가리킴.
❷대법안(大法眼); 문익(文益)의 시호(諡號)가 대법안(大法眼)임. 문익(文益. 885~958) 오대(五代)의 승려며 여항(餘杭. 浙江)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노(魯)며 일곱 살에 출가하였음. 처음엔 명주(明州)의 희각(希覺)에게 의지(依止)하여 비니(毘尼)를 닦았으며 뒤에 장경혜릉(長慶慧稜)에게 투신(投身)하여 선법(禪法)을 배웠는데 오래도록 계합(契合)하지 못했음. 우연히 장주(漳州)에서 라한계침(羅漢桂琛)을 만나 드디어 그의 법을 이었음. 임천(臨川) 숭수원(崇壽院)에서 출세(出世)하였으며 남당(南唐)의 국주(國主) 이씨(李氏)가 예경(禮敬)을 더함이 있었으며 아울러 영접(迎接)해 금릉(金陵)에 이르게 하고 보은원(報恩院)에 거주케 했으며 스승의 예(禮)로써 모셨으며 정혜대사(淨慧大師)란 호를 주었음. 후주(後主)도 또한 그를 좇아 수계(受戒)했으며 위하여 청량가람(淸涼伽藍)을 건립했음. 고려(高麗)ㆍ일본(日本) 등의 나라에서 도해(渡海)하여 와서 배우는 자가 길에 상망(相望)했음. 현덕오년(顯德五年) 가을 윤칠월(閏七月)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일흔넷임. 시호(諡號)는 대법안(大法眼)이니 법안종(法眼宗)의 개조(開祖)가 됨. 저서에 종문십규론(宗門十規論)ㆍ대법안문익선사어록(大法眼文益禪師語錄) 각 일 권이 있음.
❸재(齋); 재(齋)란 것은 이르자면 과중식(過中食. 中은 半이니 곧 日中. 過中食은 正午를 지나서 먹는 것)하지 않음이니 정오(正午) 이전(以前)에 짓는 바의 식사(食事)임. 계율상(戒律上) 식사를 시(時)와 비시(非時)로 나누는데 정오 이전이 정시(正時)가 되고 이후는 비시(非時)가 됨. 시(時)에는 먹음이 마땅하고 비시(非時)엔 먹음이 마땅치 않음. 인하여 시중(時中)의 식사가 재식(齋食)이 됨.
❹청량국사(淸涼國師); 청량(淸涼)은 문익(文益)을 가리킴. 문익은 일찍이 국사로 봉(封)해지지 않았으니 이는 혜개(慧開)가 사위(私謂)한 것으로 의심됨.
❺패궐(敗闕); 실패결함(失敗缺陷)의 뜻. 또 꺾임을 받음(受挫)임. 꺾여 패함(挫敗)임.
❻상량(商量); 원래(原來)는 상고(商賈. 상인)가 물품을 매매(買賣)할 때 서로 값을 의논(議論)함을 가리킴. 선림 중에선 전(轉)하여 학인이 참선하고 변도(辨道)할 때의 문답과 심의(審議)를 가리킴. ▲조정사원일(祖庭事苑一). 상량(商量) 마치 상고(商賈)가 헤아려 중평(中平)을 잃지 않게 하여 각기 그 뜻을 얻음과 같음이다.
❼태공(太空); 태허공(太虛空)임. 이르자면 넓고 큰 우주(宇宙)의 허공임.
❽면면밀밀(綿綿密密); 면밀(綿密)의 첩어(疊語)니 세치(細緻)하고 주밀(周密)한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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