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역해무문관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 제40칙 적도정병(趯倒淨瓶)

태화당 2019. 8. 12. 08:53

趯倒淨瓶

潙山和尙 始在百丈會中 充典座 百丈將選大潙主人 乃請同首座 對衆下語 出格者可往 百丈遂拈淨瓶 置地上 設問云 不得喚作淨瓶 汝喚作甚麽 首座乃云 不可喚作木?也 百丈却問於山 山乃趯倒淨瓶而去 百丈笑云 第一座輸却山子也 因命之爲開山

無門曰 潙山一期之勇 爭奈跳百丈圈圚不出 檢點將來 便重不便輕 何故聻 脫得盤頭 擔起鐵枷

頌曰 颺下笟籬幷木杓 當陽一突絕周遮 百丈重關攔不住 脚尖趯出佛如麻

淨瓶; 梵語軍遲 又作捃稚迦 此云甁 有淨觸二甁 淨甁之水 以洗淨手 觸甁之水 以洗觸手 亦稱澡甁 [釋氏要覽上 南海寄歸內法傳一]

潙山; 位於湖南長沙寧鄕縣西 爲衡山山脈之分支 潙水之發源地 又稱大潙山 山多平地 水道便利 故古來出家人 每多耕作於此 而有羅漢田之稱 唐僧靈祐居於此 世稱潙山禪師 指潙仰宗初祖潙山靈祐 靈祐(七七一~八五三) 唐代僧 爲潙仰宗始祖 福州長溪(今福建省霞浦縣南)人 俗姓趙 法名靈祐 十五歲隨建善寺法常(又稱法恆)律師出家 於杭州龍興寺受具足戒 曾先後遇寒山拾得 二十三歲至江西參謁百丈懷海 爲上首弟子 於此頓悟諸佛本懷 遂承百丈之法 憲宗元和末年 棲止潭州大潙山 山民感德 群集共營梵宇 由李景讓之奏請 敕號同慶寺 其後(一說大中初年)相國裴休亦來諮問玄旨 聲譽更隆 禪侶輻輳 海衆雲集 會昌法難之際 師隱於市井之間 至大中元年復敎之命下 衆迎返故寺 巾服說法 不復剃染 裴休聞之 親臨勸請 始歸緇流 師住山凡四十年 大揚宗風 世稱潙山靈祐 大中七年正月示寂 壽八十三 臘六十四 諡號大圓禪師 有語錄警策各一卷傳世 嗣法弟子有仰山慧寂 承其後而集大成 世稱潙仰宗 [福建高僧傳一 宋高僧傳十一 傳燈錄九 聯燈會要七]

典座; 禪林主大衆床座 及齋粥等雜事之役也

首座; 寺院參禪僧衆中居于首位者 又僧堂中居于首位的參禪僧 是禪寺職事僧之一 若僧堂分作前後兩堂 則分別設前堂首座與後堂首座 大宋僧史略中 首座之名 卽上座也 居席之端 處僧之上 故曰也 尋唐世敕辯章 撿校修寺 宣宗賞其功 署三敎首座 …… 次復經論之學 或置首座 三敎首座則辯章爲始也

木?; 或指木履 ? 榾柮也 又關閉門戶所用的立木 鎖植

第一座; 寺院參禪僧衆的首座 稱爲第一座

; 底本作輪 當作輸 負也

山子; 此指潙山 子 泛指人 又助詞

開山; 本指開山建寺而言 因古代寺院多建於山谷幽靜處 故稱開山 且取其開闢寺基之意 又稱開基 而寺院第一代住持亦以開山尊稱之 又宗派之創始者亦稱爲開山 開祖 開山祖 開山祖師 [佛祖統紀十四 象器箋靈像類]

圈圚; 套索也 又作圈繢 圈定的範圍 圈套 多指禪家接引施設 或機語作略

盤頭; 頭上的裝束用品

當陽; 此指當面 當下 當陽 對著陽光 顯露明白 圓悟語錄六 一句當陽顯赫 遍界已絶羅籠 當面 當場 當下 碧巖錄第七則 一句下便見 當陽便透 若向句下尋思 卒摸索不著

周遮; 迂回之義 又多餘累贅

 

적도정병(趯倒淨瓶. )

위산화상(潙山和尙)이 처음 백장회중(百丈會中)에 있으면서 전좌(典座)에 충당(充當)되었다. 백장(百丈)이 장차 대위산(大潙山)의 주인(主人)을 선출(選出)하려 하면서 수좌(首座)도 함께 청했으며 대중을 상대해 하어(下語. 機語를 냄)하여 격식을 벗어난 자가 감이 옳다 했다. 백장이 드디어 정병(淨瓶)을 잡아 지상(地上)에 놓고 물음을 베풀어 이르되 정병이라고 불러 지음을 얻지 못한다. 너는 무엇이라고 불러 짓겠는가. 수좌가 곧 이르되 목돌(木?)이라고 불러 지음은 옳지 못합니다. 백장이 다시 위산(潙山)에게 묻자 위산이 정병을 차서 거꾸러뜨리고 갔다. 백장이 웃으며 이르되 제일좌(第一座)산자(山子)에게 졌다(輸却). 인하여 그에게 명령해 개산(開山)하라 했다.

무문(無門)이 가로되 위산(潙山)은 일기(一期)에 용맹(勇猛)했지만 백장의 권궤(圈圚. 올가미)를 뛰어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어찌하랴. 검점(檢點)하여 가져오매 무거운 것엔 편(便)했지만 가벼운 것엔 편하지 못하다 하노라. 무슨 연고냐, 반두(盤頭)는 벗어남을 얻었으나 철가(鐵枷)를 짊어지고 일어났도다.

송왈(頌曰) 조리(笟籬)와 목작(木杓. 나무 구기)을 날려 떨어뜨리고/ 당양(當陽)하여 한 번 돌격(突擊)하니 주차(周遮)가 끊겼도다/ 백장(百丈)의 중관(重關)을 막아서 머물지 않고/ 발끝으로 삼과 같은 부처를 차 내었도다.

정병(淨瓶); 범어(梵語) 군지(軍遲)는 또 군치가(捃稚迦)로 지으며 여기에선 이르되 병(). 정촉(淨觸. 은 더러울 촉) 이병(二甁)이 있으며 정병(淨甁)의 물은 깨끗한 손을 씻고 촉병(觸甁)의 물은 촉수(觸手)를 씻음. 또 명칭이 조병(澡甁). [釋氏要覽上 南海寄歸內法傳一].

위산(潙山); 호남(湖南) 장사(長沙) 영향현(寧鄕縣) 서쪽에 위치하며 형산산맥(衡山山脈)의 분지(分支)가 됨. 위수(潙水)의 발원지(發源地). 또 호칭(呼稱)이 대위산(大潙山). 산에 평지가 많고 수도(水道)가 편리한지라 고로 고래(古來)로 출가인이 매양(每樣) 많이 여기에 경작해 라한전(羅漢田. 라한은 梵語 아라한의 약칭)이란 칭호(稱號)가 있음. 당승(唐僧) 영우(靈祐)가 여기에 거처했으며 세칭(世稱)이 위산선사(潙山禪師). 위앙종(潙仰宗)의 초조(初祖)인 위산영우(潙山靈祐)를 가리킴. 영우(靈祐. 771~853) 당대(唐代)의 승려며 위앙종(潙仰宗)의 시조(始祖). 복주장계(福州長溪. 지금의 福建省 霞浦縣의 남쪽) 사람이니 속성(俗姓)은 조()며 법명은 영우(靈祐). 열다섯 살에 건선사(建善寺) 법상(法常. 또 칭호가 法恆)율사를 따라 출가했으며 항주(杭州) 용흥사(龍興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음. 일찍이 선후(先後)한산(寒山)습득(拾得)만났으며 스물세 살에 강서(江西)에 이르러 백장회해(百丈懷海)를 참알(參謁)해 상수제자(上首弟子)가 되었음. 여기에서 제불의 본회(本懷)를 돈오(頓悟)했으며 드디어 백장의 법을 승계했음. 헌종(憲宗) 원화말년(元和末年. 820)에 담주(潭州)의 대위산(大潙山)에 서지(棲止)했는데 산민(山民)이 감덕(感德)하여 무리가 모여 범우(梵宇. . 사원)를 함께 지었음. 이경양(李景讓)의 주청(奏請)으로 말미암아 동경사(同慶寺)라 칙호(敕號)했음. 그 후(一說大中初年) 상국(相國) 배휴(裴休)가 또한 와서 현지(玄旨)를 자문(諮問)하자 성예(聲譽)가 더욱 융성(隆盛)했으며 선려(禪侶)가 복주(輻輳)하여 해중(海衆)이 운집했음. 회창(會昌. 841~846)법난(法難)의 즈음에 스님이 시정(市井)의 사이에 은거하다가 대중원년(大中元年. 847)에 복교(復敎)의 명이 떨어짐에 이르러 대중이 영접하여 옛 절로 돌아갔으나 건복(巾服. 옷갓)으로 설법하고 다시 체염(剃染)하지 않았음. 배휴가 이를 듣고 친림(親臨)하여 권청(勸請)하자 비로소 치류(緇流. 僧徒)로 돌아왔음. 스님이 산에 머문 무릇 사십 년에 종풍(宗風)을 크게 날려 세칭(世稱)이 위산영우(潙山靈祐). 대중칠년(大中七年) 정월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여든셋이며 납(. 僧臘)은 예순넷임. 시호(諡號)는 대원선사(大圓禪師)며 어록(語錄)경책(警策) 각 일 권이 있어 세상에 전해짐. 법을 이은 제자에 앙산혜적(仰山慧寂)이 있어 그 뒤를 이어 집대성(集大成)했으니 세칭(世稱)이 위앙종(潙仰宗). [福建高僧傳一 宋高僧傳十一 傳燈錄九 聯燈會要七].

전좌(典座); 선림(禪林)에서 대중의 상좌(床座)와 및 재죽(齋粥) 등의 잡사(雜事)의 일()을 주재(主宰).

수좌(首座); 사원(寺院)의 참선하는 승중(僧衆) 가운데 수위(首位)에 거처하는 자임. 또 승당(僧堂) 중에 수위(首位)에 거처하는 참선승(參禪僧). 이는 선사(禪寺)의 직사승(職事僧)의 하나임. 만약 승당(僧堂)을 전후(前後)의 양당(兩堂)으로 나누어 지으면 곧 전당수좌(前堂首座)와 후당수좌(後堂首座)를 분별해 시설(施設). 대송승사략중(大宋僧史略中). 수좌(首座)란 이름은 곧 상좌(上座). 좌석(座席)의 첫째()에 거처하면서 승중(僧衆)의 위에 거처하는지라 고로 말함이다. 찾아보니 당세(唐世)에 변장(辯章)에게 칙령(勅令)하여 사원(寺院)을 검교(撿校)하고 다스리게 했는데 선종(宣宗)이 그 공()을 상()주어 삼교수좌(三敎首座)로 임명()했다. …… 다음에 다시 경론(經論)의 학()으로 혹 수좌를 두었으니 삼교수좌(三敎首座)는 곧 변장(辯章)이 처음이 된다.

목돌(?); 혹 나막신(木履)을 가리킴. (?) 마들가리(榾柮). 또 문호(門戶)를 관폐(關閉)하는 데에 쓰이는 바인 입목(立木)ㆍ쇄식(鎖植. 잠금장치로 쓰는 나무)

제일좌(第一座); 사원(寺院)에서 참선하는 승중(僧衆)의 수좌(首座)를 제일좌(第一座)로 호칭(呼稱).

(); 저본(底本)에 륜()으로 지어졌음. 마땅히 수()로 지어야 함. ().

산자(山子); 여기에선 위산(潙山)을 가리킴. () 널리 사람()을 가리킴. 또 조사(助詞).

개산(開山); 본래는 개산(開山)하여 절을 세우는 것을 가리켜 말함임. 고대(古代)의 사원(寺院)은 많이 산곡(山谷)의 유정(幽靜)한 곳에 세웠음으로 인해 고로 개산(開山)이라 일컬음. 또 그것은 사기(寺基)를 개벽(開闢)함의 뜻을 취했으니 또 개기(開基)로 일컬으며 사원(寺院)의 제일대주지(第一代住持)를 또한 개산(開山)으로써 존칭함. 또 종파(宗派)의 창시자(創始者)를 또한 개산(開山)ㆍ개조(開祖)ㆍ개산조(開山祖)ㆍ개산조사(開山祖師)로 호칭함. [佛祖統紀十四 象器箋靈像類].

권궤(圈圚); 올가미(套索). 또 권궤(圈繢)로 지음. 권정(圈定)의 범위(範圍). 권투(圈套. 올가미ㆍ올무ㆍ덫). 다분히 선가(禪家)의 접인(接引)하는 시설(施設)이나 혹 기어(機語)의 작략(作略)을 가리킴.

반두(盤頭); 두상(頭上)의 장속용품(裝束用品).

당양(當陽); 여기에선 당면(當面)ㆍ당하(當下)를 가리킴. 당양(當陽) 햇빛을 상대해 환히 드러나서 명백함. 원오어록육(圓悟語錄六). 일구(一句)가 당양(當陽)하여 환하게 빛나니 편계(遍界)에 이미 나롱(羅籠. 束縛)이 끊겼다. 당면(當面). 당장(當場). 당하(當下). 벽암록(碧巖錄) 7칙. 일구(一句) 아래에서 곧 본다면 당양(當陽)에 곧 통투(通透)하겠지만 만약 구하(句下)를 향해 심사(尋思)한다면 마침내 모색(摸索)하지 못할 것이다.

주차(周遮); 우회(迂回)의 뜻임. 또 많이 남아서 누췌(累贅. 군더더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