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역해무문관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 제46칙 간두진보(竿頭進步)

태화당 2019. 8. 12. 08:58

竿頭進步

石霜和尙云 百尺竿頭如何進步 又古德云 百尺竿頭坐底人 雖然得入未爲眞 百尺竿頭須進步 十方世界現全身

無門曰 進得步翻得身 更嫌何處不稱尊 然雖如是 且道 百尺竿頭如何進步

頌曰 瞎却頂門眼 錯認定盤星 ?身能捨命 一盲引衆盲

竿頭; 頭 後綴 又物的頂端或末梢 此指後者

石霜和尙; 未詳 唐代有石霜慶諸和尙 宋代有石霜楚圓和尙 然諸禪錄不載此話

古德; 指長沙景岑 景岑(?~八六八) 唐代僧 幼年出家 參南泉普願 嗣其法 初住長沙(湖南)鹿苑寺 其後居無定所 但隨緣接物 隨宜說法 復住湖南長沙 大宣敎化 時人稱爲長沙和尙 師機鋒峻峭 與仰山對話中 曾踏倒仰山 仰山謂如大蟲()之暴亂 故諸方稱其爲岑大蟲 諡號招賢大師 [祖堂集十七 聯燈會要六 佛祖歷代通載十七] 五燈會元四 長沙景岑 師遣僧問同參會和尙曰 和尙見南泉後如何 會默然 僧曰 和尙未見南泉已前作麽生 會曰 不可更別有也 僧回擧似師 師示偈曰 百尺竿頭不動人 雖然得入未爲眞 百尺竿頭須進步 十方世界是全身 僧便問 秖如百尺竿頭如何進步 師曰 朗州山 澧州水 曰 不會 師曰 四海五湖皇化裏

百尺竿頭須進步; 百尺竿頭更進一步 謂已造其極 更須增添功夫 向上進一步也

; 聲破 莊子庚桑楚 兒子終日 和之至也

頂門眼; 摩醯首羅天具有三眼 其中 頂門豎立一眼 超於常人兩眼 具有以智慧徹照一切事理之特殊眼力 故稱頂門眼 比喩卓越之見解 禪林用語中 頂門有眼 頂門具眼 頂門具一隻眼 皆作此意

?; 捨棄 也作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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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두진보(竿頭進步)

석상화상(石霜和尙)이 이르되 백척(百尺)의 간두(竿頭. 장대의 꼭대기)에서 어떻게 진보(進步)하느냐. 고덕(古德)이 이르되 백 척의 간두에 앉은 사람이여, 비록 그러히 득입(得入)했으나 진()이 아니로다 백 척의 간두에서 진보(進步)를 써야(百尺竿頭須進步. ) 시방세계(十方世界)에 전신을 나타내리라.

무문(無門)이 가로되 걸음을 나아가고 몸을 뒤집으면서 다시 어느 곳에 존귀(尊貴)를 일컫지 않는다고 혐의(嫌疑)하리오.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으나 그래 말하라, 백척(百尺)의 간두(竿頭)에서 어떻게 진보(進步)하느냐. ()

송왈(頌曰) 정문안(頂門眼)을 멀게 해버리고/ 정반성(定盤星)을 착인(錯認)하였나니/ 몸을 버리고(❼?) 목숨을 버림이여,/ 한 맹인이 뭇 맹인을 인도하도다.  

간두(竿頭); () 후철(後綴. 接尾辭). 또 물건의 꼭대기(頂端) 혹은 말초(末梢. ). 여기에선 후자(後者)를 가리킴.

석상화상(石霜和尙); 미상(未詳). 당대(唐代)에 석상경제화상(石霜慶諸和尙)이 있었고 송대(宋代)석상초원화상(石霜楚圓和尙)이 있었지만 그러나 모든 선록(禪錄)에 차화(此話)가 실리지 않았음.

고덕(古德); 장사경잠(長沙景岑)을 가리킴. 경잠(景岑. ?~868) 당대(唐代)의 승려며 어린 나이에 출가했으며 남천보원(南泉普願)을 참알(參謁)하여 그의 법을 이었음. 처음엔 장사(長沙. 湖南) 녹원사(鹿苑寺)에 거주했고 그 후엔 거처에 정()한 곳이 없었으며 다만 인연 따라 사람을 접화(接化)하고 마땅함을 따라 설법했음. 다시 호남(湖南)의 장사(長沙)에 머물면서 교화를 대선(大宣)했음. 당시의 사람들이 칭명(稱名)하여 장사화상(長沙和尙)이라 했음. 스님의 기봉(機鋒)이 준초(峻峭)하여 앙산(仰山)과 대화(對話)하던 중에 일찍이 앙산을 답도(踏倒)하자 앙산이 이르되 마치 대충(大蟲. )의 폭란(暴亂)과 같다 한지라 고로 제방(諸方)에서 그를 일컬어 잠대충(岑大蟲)이라 했음. 시호(諡號)는 초현대사(招賢大師). [祖堂集十七 聯燈會要六 佛祖歷代通載十七]. 오등회원사(五燈會元四) 장사경잠(長沙景岑) 스님이 중을 보내 동참(同參) 회화상(會和尙)에게 물어 가로되 화상(和尙)이 남천(南泉)을 뵌 후에 어떻습니까. ()가 묵연(默然)했다. 중이 가로되 화상이 남천을 뵙지 아니한 이전(已前)엔 어떻습니까. ()가 가로되 다시 별다른 게 있다 함음 옳지 못합니다. 중이 돌아와 스님에게 들어 보이자 스님이 게()를 보여 가로되 백 척의 간두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여,/ 비록 그러히 득입(得入)했으나 진()이 되지 않도다/ 백 척의 간두에서 진보(進步)를 써야/ 시방세계(十方世界)가 이 전신(全身)이니라(百尺竿頭不動人 雖然得入未爲眞 百尺竿頭須進步 十方世界是全身). 중이 곧 묻되 지여(秖如) 백 척의 간두에서 어떻게 진보합니까. 스님이 가로되 낭주(朗州)의 산()이며 예주(澧州)의 물()이다.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不會). 스님이 가로되 사해(四海)와 오호(五湖)가 황화(皇化. 皇帝德化)의 속이니라.

백척간두수진보(百尺竿頭須進步); 백 척의 간두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감이니 이르자면 이미 그 극()에 나아갔으나 다시 공부(功夫)를 더함(增添)을 써서 위로 향해 진일보(進一步)함임.

(); 소리가 깨어짐(聲破). 장자(莊子) 경상초(庚桑楚). 아이가 종일 울어도() 목구멍()이 깨어지지() 않는 것은 화()의 지극(至極)함이다.

정문안(頂門眼); 마혜수라천(摩醯首羅天)이 삼안(三眼)을 갖추어 있는데 그 중에 정문(頂門. 정수리)에 일안(一眼)이 수립(豎立. 세로로 섬)하여 상인(常人)의 두 눈을 초월함. 지혜로써 일체의 사리(事理)를 철조(徹照)하는 특수한 안력(眼力)을 갖추고 있으므로 고로 명칭이 정문안(頂門眼). 탁월(卓越)한 견해에 비유(比喩). 선림용어(禪林用語) 중의 정문유안(頂門有眼)ㆍ정문구안(頂門具眼)ㆍ정문구일척안(頂門具一隻眼)은 다 이 뜻을 지음.

(?); 버림(捨棄). 또 반(. 버릴 반)으로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