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태화선학대사전 1책(ㄱ)

국역태화선학대사전(國譯泰華禪學大辭典) 1책(ㄱ) 854쪽

태화당 2019. 5. 8. 08:35

瞿耶尼又作俱耶尼 西大洲名 見西瞿耶尼 緇門警訓十 以西爲方則瞿耶尼洲滄波浩渺 以南爲方則閻浮提洲象馬殊國

구야니(瞿耶尼) 또 구야니(俱耶尼)로 지음. 서대주의 이름이니 서구야니(西瞿耶尼)를 보라. 치문경훈10. 서를 방위로 삼으면 곧 구야니주(瞿耶尼洲)의 창파가 호묘(浩渺)하고 남을 방위로 삼으면 곧 염부제주의 상마(象馬)가 수승한 나라이다.


歐冶子(約前514前後) 春秋末期到戰國初期越國人 中國古代鑄劍鼻祖 龍泉與湛盧劍的創始人 [百度百科] 祖庭事苑六 干將 吳人也 與歐冶子同師闔閭 使造劍二枚 一曰干將 二曰鏌邪

구야자(歐冶子) (514 전후) 춘추 말기에서 전국 초기에 이르기까지의 월나라 사람. 중국 고대 주검(鑄劍)의 비조니 용천과 담로검의 창시인임 [백도백과]. 조정사원6. 간장 오나라 사람이다. 구야자(歐冶子)와 더불어 함께 합려를 사사(師事)했다. 2매를 주조하게 했는데 1은 가로되 간장이며 2는 가로되 막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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歐陽文忠公北宋歐陽修 諡號文忠 詳見歐陽修 五家正宗贊二浮山圓鑒 歐陽文忠公聞師奇逸

구양문충공(歐陽文忠公) 북송 구양수의 시호가 문충이니 상세한 것은 구양수를 보라. 오가정종찬2 부산원감. 구양 문충공이, 스님이 기이하고 뛰어나다 함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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歐陽修(1007-1072) 北宋文學家 史學家 吉州廬陵(江西吉安)人 字永叔 號醉翁 六一居士 諡號文忠 唐宋八大家之一 天聖八年(1030) 進士及第 歷任地方刺史 四十八歲時受召爲翰林學士 嘉祐五年(1060) 任樞密副使 次年 任參知政事 熙寧四年(1071)罷官 次年逝世 享年六十六 著有本論三篇 極力排斥佛老思想 且其編輯唐書及新五代史時 盡刪除有關佛敎紀事二百餘則 然至晩年 一反而成爲佛敎信徒 居士分燈錄下 歐陽修 字永叔 廬陵人 初不信佛 嘉祐六年(1061) 爲參知政事 兼譯經潤文(云云) 萬法歸心錄上 儒云 佛法若正與儒理同者 因甚歐陽修曰 佛爲中國大患

구양수(歐陽修) (1007-1072) 북송의 문학가며 사학가. 길주 여릉(강서 길안) 사람. 자는 영숙이며 호는 취옹ㆍ육일거사며 시호는 문충. 당송팔대가의 하나임. 천성 8(10 30) 진사로 급제하였고 지방의 자사를 역임했음. 48세 때 부름을 받아 한림학사가 되었고 가우 5(1060) 추밀부사에 임명되었고 다음해 참지정사에 임명되었음. 희녕 4(1071) 관직이 파직되었고 다음해 세상을 떠났음. 향년 66. 저서에 본론 3편이 있음. 극력으로 불로사상(佛老思想)을 배척했음. 그가 당서 및 신오대사를 편집할 때 불교에 유관한 기사 200여 칙을 모두 산제(刪除)했음. 그러나 만년에 이르러 한 번 돌이키자 불교 신도가 되었음. 거사분등록하. 구양수(歐陽修) 자는 영숙이며 여릉 사람이다. 처음엔 불교를 믿지 않았다. 가우 6(1061) 참지정사가 되었고 역경의 윤문을 겸했다 (운운). 만법귀심록상. ()가 이르되 불법이 만약 유리(儒理)와 같다면 무엇 때문에 구양수(歐陽修)가 가로되 불교는 중국의 큰 우환이라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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