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瞿耶尼】 又作俱耶尼 西大洲名 見西瞿耶尼 ▲緇門警訓十 以西爲方則瞿耶尼洲滄波浩渺 以南爲方則閻浮提洲象馬殊國
구야니(瞿耶尼) 또 구야니(俱耶尼)로 지음. 서대주의 이름이니 서구야니(西瞿耶尼)를 보라. ▲치문경훈10. 서를 방위로 삼으면 곧 구야니주(瞿耶尼洲)의 창파가 호묘(浩渺)하고 남을 방위로 삼으면 곧 염부제주의 상마(象馬)가 수승한 나라이다.
【歐冶子】 (約前514前後) 春秋末期到戰國初期越國人 中國古代鑄劍鼻祖 龍泉與湛盧劍的創始人 [百度百科] ▲祖庭事苑六 干將 吳人也 與歐冶子同師闔閭 使造劍二枚 一曰干將 二曰鏌邪
구야자(歐冶子) (약 前 514 전후) 춘추 말기에서 전국 초기에 이르기까지의 월나라 사람. 중국 고대 주검(鑄劍)의 비조니 용천과 담로검의 창시인임 [백도백과]. ▲조정사원6. 간장 오나라 사람이다. 구야자(歐冶子)와 더불어 함께 합려를 사사(師事)했다. 검 2매를 주조하게 했는데 1은 가로되 간장이며 2는 가로되 막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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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歐陽文忠公】 北宋歐陽修 諡號文忠 詳見歐陽修 ▲五家正宗贊二浮山圓鑒 歐陽文忠公聞師奇逸
구양문충공(歐陽文忠公) 북송 구양수의 시호가 문충이니 상세한 것은 구양수를 보라. ▲오가정종찬2 부산원감. 구양 문충공이, 스님이 기이하고 뛰어나다 함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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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歐陽修】 (1007-1072) 北宋文學家 史學家 吉州廬陵(江西吉安)人 字永叔 號醉翁 六一居士 諡號文忠 唐宋八大家之一 天聖八年(1030) 進士及第 歷任地方刺史 四十八歲時受召爲翰林學士 嘉祐五年(1060) 任樞密副使 次年 任參知政事 熙寧四年(1071)罷官 次年逝世 享年六十六 著有本論三篇 極力排斥佛老思想 且其編輯唐書及新五代史時 盡刪除有關佛敎紀事二百餘則 然至晩年 一反而成爲佛敎信徒 ▲居士分燈錄下 歐陽修 字永叔 廬陵人 初不信佛 嘉祐六年(1061) 爲參知政事 兼譯經潤文(云云) ▲萬法歸心錄上 儒云 佛法若正與儒理同者 因甚歐陽修曰 佛爲中國大患
구양수(歐陽修) (1007-1072) 북송의 문학가며 사학가. 길주 여릉(강서 길안) 사람. 자는 영숙이며 호는 취옹ㆍ육일거사며 시호는 문충. 당송팔대가의 하나임. 천성 8년(10 30) 진사로 급제하였고 지방의 자사를 역임했음. 48세 때 부름을 받아 한림학사가 되었고 가우 5년(1060) 추밀부사에 임명되었고 다음해 참지정사에 임명되었음. 희녕 4년(1071) 관직이 파직되었고 다음해 세상을 떠났음. 향년 66. 저서에 본론 3편이 있음. 극력으로 불로사상(佛老思想)을 배척했음. 그가 당서 및 신오대사를 편집할 때 불교에 유관한 기사 200여 칙을 모두 산제(刪除)했음. 그러나 만년에 이르러 한 번 돌이키자 불교 신도가 되었음. ▲거사분등록하. 구양수(歐陽修) 자는 영숙이며 여릉 사람이다. 처음엔 불교를 믿지 않았다. 가우 6년(1061) 참지정사가 되었고 역경의 윤문을 겸했다 (운운). ▲만법귀심록상. 유(儒)가 이르되 불법이 만약 유리(儒理)와 같다면 무엇 때문에 구양수(歐陽修)가 가로되 불교는 중국의 큰 우환이라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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