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태화선학대사전 1책(ㄱ)

국역태화선학대사전(國譯泰華禪學大辭典) 1책(ㄱ) 57쪽

태화당 2019. 4. 28. 16:42

假銀城祖庭事苑七 假銀城 霍光 漢人 書傳無賣城易角之說 盖出於委巷之劇談 禪人往往資以爲口實 不亦謬乎 聯燈會要八京兆米 僧問 自古上賢 還達眞正理也無 師云 達 云 只如眞正理 作麽生達 師云 當時霍光賣假銀城 與單于契書是甚麽人做 僧云 某甲直得杜口無言 師云 平地敎人作保

가은성(假銀城) 조정사원7. 가은성(假銀城) 곽광(-68)은 한나라 사람이다. 서전(書傳)에 성을 팔아 뿔과 바꿨다는 설이 없다. 대개 위항(委巷; 꼬불꼬불한 골목길)의 극담(劇談; 연극 이야기)에서 나왔거늘 선인(禪人)이 왕왕 자료로 구실을 삼으니 또한 그릇되지 않겠는가. 연등회요8 경조미. 중이 묻되 자고로 상현(上賢)이 도리어 진정한 이치에 통달했습니까 또는 아닙니까. 스님이 이르되 통달했다. 이르되 지여(只如) 진정한 이치를 어떻게 통달합니까. 스님이 이르되 당시에 곽광이 가은성(假銀城)을 팔아서 선우(單于)에게 준 계서(契書; 계약서)는 이 어떤 사람이 만들었는가. 중이 이르되 모갑은 바로 두구무언(杜口無言)을 얻습니다. 스님이 이르되 평지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보증을 하게 하는구나.

 

賈誼(200-168) 洛陽(今河南洛陽東)人 西漢初年著名政論家 文學家 世稱賈生 賈誼少有才名 文帝時任博士 遷太中大夫 受大臣周勃灌嬰排擠 謫爲長沙王太傅 故後世亦稱賈長沙 賈太傅 三年後被召回長安 爲梁懷王太傅 梁懷王墜馬而死 賈誼深自歉疚 抑鬱而亡 時僅三十三歲 司馬遷對屈原賈誼都寄予同情 爲二人寫了一篇合傳 後世因而往往把賈誼與屈原並稱爲屈賈 [百度百科] 禪林疏語考證一 賈誼傳曰 受釐坐宣室 索隱曰 音禧 福也 五燈全書九十八遜菴玉 賈誼長沙弔屈原 偸桃定是東方朔

가의(賈誼) (200-168) 낙양(지금의 하남 낙양 동쪽) 사람. 서한 초년의 저명한 정론가며 문학가. 세칭이 가생(賈生). 가의는 어릴 적에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문제(文帝) 때 박사에 임명되었다가 대중대부로 승직(昇職; )했음. 주발과 관영의 배제(排擠)를 받아 강직(降職: )되어 장사왕의 태부(太傅)가 된지라 고로 후세에 또한 가장사(賈長沙)ㆍ가태부(賈太傅)로 칭명함. 3년 후에 부름을 입어 장안으로 돌아와 양회왕의 태부가 되었음. 양회왕이 말에서 떨어져 죽자 가의가 깊이 스스로 겸구(歉疚; 꺼림칙함. 송구함)하여 억울하여 죽었으니 때에 겨우 33세였음. 사마천이 굴원과 가의에 대해 모두 동정(同情)을 주어 두 사람을 위해 1()의 합전(合傳)을 썼으니 후세에 이로 인해 왕왕 가의와 굴원을 싸잡아 굴가(屈賈)로 병칭함 [백도백과]. 선림소어고증1. 가의전(賈誼傳)에 가로되 희()를 받아 선실(宣室)에 앉았다. 색은(索隱; 索引)에 가로되 음이 희()니 복이다. 오등전서98 손암옥. 가의장사(賈誼長沙)가 굴원을 조위하나니 복숭아를 훔침은 꼭 이 동방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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