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歸宗較些】 禪苑蒙求拾遺 歸宗較些 廣燈錄曰 廬山歸宗寺智常禪師 黃檗曰 馬大師出八十四人善知識 問著箇箇屙漉漉地 祇有歸宗較些子
귀종교사(歸宗較些) 선원몽구습유. 귀종교사(歸宗較些) 광등록에 가로되 여산 귀종사 지상선사. 황벽이 가로되 마대사가 84인의 선지식을 배출했는데 물어보매 개개가 아록록지(屙漉漉地)나 다만 귀종이 있어 교사자(較些子)하다.
) -->
【歸宗權】 五代後晉曹洞宗僧澹權 住廬山歸宗寺 詳見澹權
귀종권(歸宗權) 오대 후진 조동종승 담권이 여산 귀종사에 주(住)했으니 상세한 것은 담권(澹權)을 보라.
) -->
【歸宗拳】 五燈會元三歸宗智常 僧辭 師問 甚麼處去 曰 諸方學五味禪去 師曰 諸方有五味禪 我這裏祇有一味禪 曰 如何是一味禪 師便打 僧曰 會也會也 師曰 道道 僧擬開口 師又打 ▲五燈全書八十八桂山福慧院予璞符 擧歸宗拳 豎天龍指 桂山不會
귀종권(歸宗拳) 오등회원3 귀종지상. 중이 고별하자 스님이 묻되 어느 곳으로 가느냐. 가로되 제방으로 오미선(五味禪)을 배우러 갑니다. 스님이 가로되 제방엔 오미선이 있지만 나의 이 속은 다만 일미선(一味禪)이 있다. 가로되 무엇이 이 일미선입니까. 스님이 바로 때렸다. 중이 가로되 알았습니다, 알았습니다. 스님이 가로되 말하라, 말하라. 중이 입을 열려고 하자 스님이 또 때렸다. ▲오등전서88 계산 복혜원 여박부. 귀종권(歸宗拳)을 들고 천룡지(天龍指)를 세우지만 계산(桂山)은 알지 못한다.
) -->
【歸宗南】 宋代僧慧南 曾住歸宗寺 詳見慧南
귀종남(歸宗南) 송대승 혜남이 일찍이 귀종사에 주(住)했으니 상세한 것은 혜남(慧南)을 보라.
) -->
【歸宗磨】 見歸宗拽石 ▲五燈會元十七惟勝眞覺 歸宗磨 雪峯毬 此箇門庭接上流
귀종마(歸宗磨) 귀종예석을 보라. ▲오등회원17 유승진각. 귀종마(歸宗磨)와 설봉구(雪峯毬), 이 문정은 상류를 접인한다.
) -->
【歸宗寺】 位於江西星子縣 廬山南麓 是東晉咸康六年(340) 右將軍王羲之捨其故宅 爲三藏佛陀耶舍所建 唐元和(806-820)年中 智常再事興建 白樂天 李渤等文人 亦常來訪道 爾後成爲禪院 宋太平興國九年(984) 道詮住寺 爲第十二世 道俗雲集 門風大振 後迭經克文 正賢 曇華 慧南諸師住持 遂爲禪家大道場 今有大雄寶殿 天王殿 毘盧殿等 諸堂完備 爲廬山第一 [梁高僧傳二 宋高僧傳十七 古今圖書集成職方典八七○]
귀종사(歸宗寺) 강서 성자현 여산 남쪽 기슭에 위치함. 이는 동진 함강 6년(340) 우장군(右將軍) 왕희지(王羲之)가 그의 오래된 집을 희사하여 삼장 불타야사를 위해 건립한 것임. 당 원화(806-820)년 중에 지상(智常)이 다시 흥건(興建)에 종사했음. 백락천과 이발 등의 문인이 또한 늘 와서 방도(訪道; 도를 물음)했으며 그 후에 선원이 되었음. 송 태평흥국 9년(984) 도전(道詮)이 주사(住寺)했으며 제12세가 됨. 도속이 운집하였고 문풍을 크게 떨쳤음. 후에 갈마들며 극문ㆍ정현ㆍ담화ㆍ혜남, 여러 스님이 주지함을 겪었으며 드디어 선가의 대도량이 되었음. 여금에 대웅보전ㆍ천왕전ㆍ비로전 등의 여러 당우(堂宇)를 완비했으며 여산에서 제1이 됨 [양고승전2. 송고승전17. 고금도서집성직방전870].
자세히 보기
'국역태화선학대사전 1책(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역태화선학대사전(國譯泰華禪學大辭典) 1책(ㄱ) 972쪽 (0) | 2019.05.09 |
---|---|
국역태화선학대사전(國譯泰華禪學大辭典) 1책(ㄱ) 971쪽 (0) | 2019.05.09 |
국역태화선학대사전(國譯泰華禪學大辭典) 1책(ㄱ) 969쪽 (0) | 2019.05.09 |
국역태화선학대사전(國譯泰華禪學大辭典) 1책(ㄱ) 968쪽 (0) | 2019.05.09 |
국역태화선학대사전(國譯泰華禪學大辭典) 1책(ㄱ) 967쪽 (0) | 2019.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