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송구집

선림송구집(禪林頌句集) 七言二句 13획 當初將謂茆長短

태화당 2019. 8. 31. 09:45

當初將謂茆長短 燒了方知地不平 續刊古尊宿語要三

당초에 장차 이르기를 띠가 길다 짧다 했더니 태우고 나서야 비로소 땅이 평탄치 못함을 알았다.


는 띠 묘. 와 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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當初只道茅長短 燒了方知地不平 永覺元賢錄一

당초에 다만 말하기를 띠가 길다 짧다 했더니 태우고 나서야 비로소 땅이 평탄치 못함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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當初只道茅長短 斫却元來地不平 恕中無論錄一

당초에 다만 말하기를 띠가 길다 짧다 했더니 쪼개어버리니 원래 땅이 평탄치 않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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當初只謂茅長短 燒却元來地不平 楚石梵琦錄五

당초에 다만 이르기를 띠가 길다 짧다 했더니 태우고 나니 원래 땅이 평탄치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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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吾舞笏同人會 石鞏彎弓作者諳 禪苑蒙求上

도오가 을 춤춤은 同人이라야 알고 석공이 활을 당김은 작자라야 아느니라.

道吾關南道常法嗣. 鹽官齊安(마조의 法嗣)을 이었음. 은 홀 홀. 官員이 임금을 만날 때 朝服에 갖추어 손에 쥐던 물건. 길이 한 자쯤 너비 두 치쯤이며 얄팍하고 길쭉히 생겼음. 은 당길 만. 石鞏馬祖法嗣.

道吾 스님의 圓智(769-835. 藥山惟儼法嗣. 諸書宗智表記한 곳이 많음)豫章 海昏張氏의 아들이다. 鄉里에서 得度했고 藥山에게서 聞道했으며 뒤에 潭州 道吾山에 거주했다. 唐 文宗 大和之末835 장차 示滅하려 하면서 대중을 소집해 가로되 내가 마땅히 서쪽으로 가리니 이치가 동쪽으로 옮김이 없다. 卒年六十七이다. 그러나 道吾가 둘이 있으니 襄州 關南道吾和上(關南道常法嗣. 鹽官齊安을 이었음)巫者(巫俗人)樂神(을 노래함)을 들음으로 인하여 入道했다(五燈會元卷第四에 이르되 처음 시골의 농막을 지나다가 巫者樂神을 들었는데 이르되 識神이 없다. 홀연히 省悟했다. 뒤에 道常禪師參見하자 그 안 바를 印可했다). 일찍이 道歌一鉢歌를 지었는데 세상에 盛行했다. 내가 일찍이 贊寧高僧傳을 읽었는데 또 가로되 前蜀(901-925)王氏(王衍이니 재위 919-925) 僞乾德初919(正統性認定하지 않는 글자)小軍吏陳公이 있었는데 高中令駢(. 이름은 駢諸. 中令官名)의 손녀에게 장가들었다. () 사람은 不殺戒를 가진 지 二十餘年이었다. 후에 에 있으면서 아들의 婚娶(婚姻)를 위하여 禮式(예법에 따라 행하는 식)으로 屠宰(는 죽일 도. 는 잡을 재. 곧 도살)須要했다. 가 처음엔 하고 싶지 않았으나 친척이 말하되 자기가 持戒한다면 酒筵하면서 무엇을 가져 손님들을 즐겁게 하리오. 하여 위반할 즈음에 드디어 많이 庖割(는 삶을 포. 은 벨 할)했다. 갑자기 浹旬(열흘)도 안되어 질병을 얻었으며 자못 異狀했다. 입으로 단지 흐리멍덩한() 말만 했다. 이미 그러고선 三宿(三日) 만에 도리어 깨어났으며 冥府(저승) 사이의 일을 진술했다. 처음에 黑衣使者에게 追攝(追捕해 거둠)됨을 입어 岐府城隍廟에 들어갔는데 廟神은 높은 에 큰 소매였으며 金甲武士晤坐(는 대면할 오. 對坐)했다. 使者를 거느리고 을 뵈었는데 武士들의 언어가 紛紜(은 어지러울 분. 은 어지러울 운. 곧 여러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시끄럽고 떠들썩함)하더니 의 파계를 꾸짖었다(). 인하여 팔을 잡고 욕하며 가로되 나는 護戒神이다. 너 때문에 二十年 동안 먹고 자는 데에 겨를이 없었다. 어찌 홀연히 殺心을 일으켜 문득 戒檢(. 禁制할 금. 곧 계율의 禁制)을 이지러지게 할 줄을 기약했으랴. 목숨이 비록 다하지 않았으나 죄가 또한 자못 깊으므로 반드시 冥司(冥府)로 보내어 그 故意로 범한 것을 懲治(징계하여 다스림)하리라. 城隍神에게 물어 가로되 네가 다시 어떤 을 지어 따라서() 過尤(는 허물 우. 過誤)贖罪하겠는가. 가 늘 上生經(彌勒上生經이니 여러 이 있음)을 외웠는데 그 가 이미 많았지만 이때엔 懵然(은 희미할 몽. 어두울 몽)하여 도무지 기억이 없었다. 두려워하는 사이에 아뢰어 가로되 自在和上(伏牛山 自在和上이니 馬祖法嗣)三傷歌道吾和上一鉢歌(傳燈錄卷第三十에 실려 있음)誦得(助字)합니다. 드디어 합장하고 을 향해 厲聲(는 높을 려. 高聲)으로 외었다. 신이 무사와 더불어 귀를 세우고 주먹을 받들고 서서 들었다. 안색이 점점 온화해지더니 을 마침에 미쳐서는 들이 다 涕泣했다. 이에 에게 일러 가로되 다만 인간으로 돌아가서 宜當 간절히 營爲하라. 절하고 고별함을 마치지 않아서 颯然(은 홀연 삽. 곧 홀연)히 일어나 앉아서 그 일을 갖추어 진술했다(以上宋高僧傳卷第十一에 나옴). 이에 알지니 선종의 唱道하는 歌頌證悟한 바의 법문을 밝힘인지라 이를 외우는 자는 幽顯(저승과 이승)에서 복을 얻으므로 가히 疏忽히 하지 말아야 하리라. 스님이 道常禪師에게서 印記(印可하여 記別)하였고 뒤에 무릇 示衆하매 반드시 蓮花笠(은 삿갓 립)을 쓰고 襴衫(통옷. 저고리와 치마가 이어진 옷)을 입고 竹簡(대쪽)을 잡고 피리를 불고 입으로 魯三郞을 일컬었으니 이는 法名道吾란 자이다. 지금의 潭州 道吾으로 인해 이름했다 [祖庭事苑卷第七].

石鞏은 늘 활을 벌려 화살을 架設하여 學徒接待했다 [傳燈錄卷第十四 三平義忠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