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자역주 조정사원

석자역주(釋字譯註) 조정사원(祖庭事苑) 卷第四 雪竇祖英下 30 해성(解醒)

태화당 2019. 9. 6. 08:23

解醒은 술 깰 성.

當作解酲 音呈 醉而覺也 英酲同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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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解酲(은 술 깰 정)으로 지어야 하나니 음이 정이며 취했다가 깸임. 同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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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中英

茶詩云 嫩芽香且靈 吾謂草中英 夜臼和煙搗 寒爐對雪烹 籮憂碧粉散 嘗見花生 最是堪珍重 能令睡思淸 此詩非鄭谷郡官也 乃五代時鄭遨所作 遨 字雲叟 滑州白馬人 唐明宗祖廟諱遨 故世行其字 遨少好學 敏於文辭 唐昭宗時 擧進士不中 見天下已亂 有拂衣遠去之意 欲擕其妻子與俱隱 其妻不從 遨乃入少室山爲道士 其妻數以書勸遨還家 輒投之於火 後聞其妻子卒 一慟而止 遨與李振故善 振後事梁貴顯 欲以掾遨 遨不顧 後振得罪南竄 遨徒步千里往省之 由是聞者益高其行 與道士李道殷 羅隱之友善 世目以爲三高士 遨種田 隱之賣樂 道殷有釣魚術 鈎而不餌 又能化石爲金 遨嘗驗其信 然而不之求也 唐明宗以左拾遺 晉高祖以諫議大夫召之 皆不起 卽賜號爲逍遙先生 遨好飮酒弈碁 時時爲詩章落人間 人間多寫以縑素 相贈遺以爲寶 至或圖寫其形 翫于屋壁云으로 의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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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詩에 이르되 어린 싹이 향기롭고 또 신령하나니/ 내가 이르기를 草中英이라 하노라/ 夜臼(밤의 절구)에다 아지랑이와 함께 찧고/ 寒爐에다 눈()을 대면해 삶도다/. 광주리()는 푸름이 粉散할까 염려하나니/ 일찍이 綠花가 피어남을 보았도다/ 가장 이것이 珍重을 감내하나니/ 능히 수면의 생각을 깨끗하게 하도다. 이 시는 鄭谷郡官이 아니라 곧 五代 鄭遨(는 놀 오)所作. 雲叟의 백마 사람이다. 唐明宗祖廟이므로 고로 세상에서 그 로 행한다. 오는 어릴 적 好學했고 文辭에 민첩했다. 唐昭宗(재위 888-904) 進士應擧했으나 급제하지() 못했다. 천하가 이미 어지러움을 보고 옷을 떨치고 멀리 떠날 뜻이 있어 그 처자를 데리고 함께 숨고자 했으나 그 처가 따르지 않았다. 가 이에 少室山에 들어가 道士가 되었는데 그 처가 수 차례 글로써 오에게 집에 돌아오기를 권했으나 번번이 불에 그것을 던졌다. 뒤에 그 처자가 죽었다 함을 듣고 한 번 慟哭(은 서러울 통)하고 그쳤다. 李振이 예로부터 잘 지냈는데 이 뒤에 (五代後梁)을 섬겨 高貴顯著했다. 오를 (佐助 . 公府掾史官名)으로 쓰려 했으나 오가 돌아보지 않았다. 뒤에 진이 죄를 얻어 남쪽으로 귀양을 가자(은 귀양 보낼 찬) 오가 千里徒步(는 걸어다닐 도. 徒步는 곧 徒行이니 거마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감)하여 가서 그를 보았다(은 볼 성. 살필 성). 이로 말미암아 들은 자가 그 행위를 더욱 숭고히 여겼다. 道士 李道殷 羅隱之와 친우로 잘 지냈는데 세상에서 指目하여 三高士로 삼았다. 는 밭에 씨뿌리고 隱之는 음악을 팔았다. 道殷은 물고기 낚는 기술이 있었는데 낚시질은 하되 미끼가 없었다. 또 능히 돌을 변화시켜 을 만들었다. 오가 일찍이 그 信實(믿음성 있고 꾸밈이 없음)徵驗했으나 그러나 그것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後唐)明宗左拾遺로 쓰려 했고 (後晉)高祖諫議大夫로써 그를 불렀으나 다 일어나지 않았다. 곧 호를 내려 逍遙先生이라 했다. 오가 음주와 弈碁(은 바둑 혁. 기 바둑 기. 곧 바둑)를 좋아했으며 때때로 詩章을 지어 인간에 떨어졌다. 인간이 많이들 縑素(은 합사비단 겸. 生帛 . 곧 비단)에 서사하여 서로 贈遺(는 줄 유. 贈呈)하면서 보배로 삼았다. 내지 혹은 그 형상을 圖寫(그림으로 베낌)하여 가옥의 벽에서 翫味(鑑賞과 같은 뜻)했다(은 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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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 구(麻鞋).

九遇切 履屬


九遇切이니 履屬(는 신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