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자역주 조정사원

석자역주(釋字譯註) 조정사원(祖庭事苑) 卷第四 雪竇祖英下 38 견양(牽羊)

태화당 2019. 9. 6. 08:35

牽羊

牽羊納璧 受降之儀 春秋 楚圍鄭伯 鄭伯肉袒牽羊示爲僕隸也 納璧 凡弱則降 降則啣璧而歸 璧 國也 降者親奉於君 面縛 無手以執 故用曰啣也은 마땅히 로 지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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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끌고 納付함은 항복을 받는 儀式. 春秋(宣公十二年서기전 597) 鄭伯을 포위하자 정백이 肉袒(윗도리를 벗고 육체를 나타냄)으로 을 끌었음은 僕隸가 됨을 보인 것이다. 納璧은 무릇 약한 즉 항복하고 항복한 즉 을 머금고 歸降하는 것임. 은 국보니 항복한 자가 친히 君主에게 바치는 것임. 얼굴이 묶이고 손에 잡을 게 없으므로 고로 써서 가로되 (재갈 함. 머금을 함. 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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爲道日損

老氏曰 爲學日益 爲道日損 保唐無住禪師 問道士曰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所不爲 練師等息生會此是老子語 士等皆高拱杜默而已 久之云 却請和上爲說 師云 爲學日益者 有心貪學知解 唯增生死塵勞 是世間虛妄之益也 爲道日損者 道卽衆生本性 性離一切名相知解 慕道之人不重於事 卽生死塵勞日減 故曰日損也 損之又損之 以至於無爲 無爲而無所不爲者 悟性微妙 卽妄念不生 是損之也 旣妄念不生 志無間斷 是又損之也 爲念寂滅 返本還源 是以至於無爲也 修學無爲 不以無無爲證 是無不爲也 明招謙嘗作無題十頌 有云 百歲看看二分過 靈臺一點意如何 貪生逐日迷歸路 撒手臨岐識得麽 雪竇頗類此頌


老氏(道德經 日損章第四十八)가 가로되 을 함은 날로 더하고 도를 함은 날로 던다. 保唐無住禪師(益州無相法嗣. 五祖弘忍下四世)道士에게 물어 가로되 을 함은 날로 더하고 도를 함은 날로 던다. 그것을 덜고 또 덜어 無爲에 이르러야 하나니 무위라야 하지 않는 바 없다. 練師(道士) 息生은 이것이 이 老子의 말인 줄 알리라. 도사 등이 다 높이 拱手(은 마주 잡을 공. 곧 두 손을 겹쳐 모아 행하는 절)하며 杜默(는 막을 두. 곧 침묵)할 따름이었다. 그것(杜默)을 오래하고는 이르되 도리어 청하노니 화상이 위하여 설하십시오. 스님이 이르되 을 함은 날로 더한다는 것은 有心으로 知解를 탐해 배움이니 오직 생사의 塵勞(번뇌. 세속적인 勞苦)를 더함이라 이는 세간의 허망한 이익이다. 를 함은 날로 던다는 것은 도는 곧 중생의 본성이며 본성이 일체의 名相知解를 여읨이니 도를 흠모하는 사람은 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므로 곧 생사의 塵勞가 날로 덜리므로 고로 가로되 날로 더는 것이다. 그것을 덜고 또 그것을 덜어 無爲에 이르러야 하나니 무위라야 하지 않는 바가 없다는 것은 본성의 미묘함을 깨치면 곧 妄念이 나지 않나니 이것이 그것을 더는 것이며 이미 망념이 나지 않으면 意志間斷(사이에 끊어짐)이 없으리니 이것이 또 그것을 더는 것이다. 생각이 적멸하기 때문에 返本還源(근본으로 돌이키어 근원으로 돌아감)하므로 이런 까닭으로 無爲에 이르는 것이니라. 무위를 修學하면 無無로써 증험을 삼지 않나니 이것이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明招德謙(羅山道閑法嗣. 德山宣鑑下三世)이 일찍이 無題十頌을 지었는데 이름()이 있으니 百歲看看(보고 있는 동안. 점점)二分이 지나가고/ 靈臺(緇門警訓註卷上 靈臺이다. 莊周雜篇庚桑楚가 가로되 萬惡이 가히 靈臺에 들어가지 못한다. 司馬彪가 가로되 神靈가 된다)一點은 뜻에 어떠한가/ 을 탐해 날을 쫓으면 歸路하나니/ 撒手(손을 놓음)하고 岐路했음을 識得했는가. 설두가 자못 이 송과 유사함(설두의 爲道日損偈 三分光陰에 둘은 벌써 지나가고/ 靈臺一點하지 못했네/ 을 탐해 날을 쫓아 區區히 가나니/ 불러도 머리를 돌리지 않으니 어찌하리오. 三分光陰二早過 靈臺一點不揩磨 貪生逐日區區去 喚不回頭爭奈何. 明覺禪師語錄卷第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