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자역주 조정사원

석자역주(釋字譯註) 조정사원(祖庭事苑) 卷第六 風穴衆吼集 39 예소문(翳消聞)

태화당 2019. 9. 7. 10:52

翳消聞

翳消聞後好聞 當作翳根消後好沽聞 蓋見它本廣燈錄卷第十五翳霄咨聞으로 지어졌고 傳燈錄卷第十三翳消開後好沾聞으로 지어졌음. 書에 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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翳消聞後好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은 마땅히 翳根消後好沽聞(翳根이 사라진 후 좋이 들음을 살 만하다)으로 지어야 하나니 대개 타본을 보라(타본엔 用例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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磨寸金

當作無十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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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無十金으로 지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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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嵬는 높을 외.

唐天寶中 范陽節度使安祿山大立邊功 上深寵之 祿山來朝 帝令貴妃楊大眞姉妹 結爲兄弟 祿山母事貴妃 及祿山叛露 檄數楊國忠之罪 河北盜起 玄宗欲親征 以皇太子爲天下兵馬元帥 監撫軍國事 國忠大懼 諸楊聚哭 貴妃銜土陳請 帝遂不行內禪 及潼關失守 從幸至馬嵬 禁軍大將陳玄禮 密啓太子誅國忠父子 旣而四軍不散 玄宗遣力士宣問 對曰 賊本尙在 蓋指貴妃也 力士復奏 帝不獲已 與妃決 遂縊死於佛室 時年三十八 瘞於驛左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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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天寶中742-755 范陽節度使 安祿山邊功(國境地域에서 적을 물리쳐 세운 功勞)을 크게 세워 主上이 깊이 그를 총애했다. 녹산이 來朝(지방의 신하가 朝廷에 와 임금을 찾아 뵘)하자 貴妃楊大眞(이름은 玉環 또는 太眞. 唐玄宗愛妃. 天寶四年745 황후를 돕는 正一品女官貴妃가 되었음)의 자매와 형제를 맺게 했는데 녹산이 어머니로 귀비를 섬겼다. 및 녹산의 반역이 드러나자 楊國忠(-756. 양귀비의 친척. 玄宗宰相으로 重用했음)의 죄를 檄文(특별한 경우에 軍兵을 모집하거나 널리 일반에게 알려 부추기기 위한 글)으로 책망했다(). 河北에서 도적이 일어났고 현종이 親征하려고 하면서 황태자(후의 肅宗)로써 天下兵馬元帥를 삼아 軍國의 일을 監撫(監督하여 撫摩)케 했다. 국충이 크게 두려워했고 모든 楊氏가 모여서 통곡했으며 귀비가 흙을 머금고 陳請(사정을 진술하여 간절히 청함)했다. 가 드디어 內禪(임금이 살아 있는 동안에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 주는 일)하지 않았다. 潼關失守(守備에 실패함)하자 幸御(임금의 行次)를 좇아 馬嵬에 이르렀다. 禁軍大將 陳玄禮가 태자에게 비밀히 여쭈어() 楊國忠父子誅殺했다. 이미 그랬으나 四軍(四方軍士)이 해산하지 않자 현종이 力士(高力士)를 보내 宣問(은 임금이 스스로 말할 선)하매 대답해 가로되 賊本(도적의 근본)이 오히려 있습니다 했으니 대개 귀비를 지칭함이었다. 역사가 돌아와 아뢰자 不獲已(不得已)하여 귀비를 주어 결단케 했다. 드디어 佛室(佛寺의 방)에서 목을 매어 죽였으니(은 목맬 액) 때의 나이 三十八이었으며 의 왼쪽 길에 묻었다(는 묻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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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龜曳尾

莊子釣於濮水 楚王使二大夫往召焉 曰 願以境內累矣 莊子曰 楚有神龜 死已三千歲矣 王巾笥藏之廟堂之上 此龜者 寧其死爲留骨而貴乎 寧其生曳尾於塗中乎 二大夫曰 寧生而尾於塗中 莊子曰 往矣 吾將曳尾於塗中矣 濮 音卜(끌 예)로 의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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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濮水(은 물 이름 복)에서 낚시질했는데 楚王(釋文楚威王이라 함)이 두 大夫를 시켜 가서 부르게 했다. 가로되 원컨대 境內(國政을 말함)로써 를 끼칠까 합니다(국정을 맡겨 心勞를 끼칠까 한다는 뜻). 장자가 가로되 神龜가 있어 죽은 지 이미 三千 세며 왕이 巾笥(巾箱이니 상자. 는 상자 사. 곧 상자에 넣음)하여 廟堂의 위에 그것을 감춰 두었다는데 이 거북이란 것이 차라리 그 죽어서 뼈를 남김이 소중하겠습니까. 차라리 그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겠습니까. 두 대부가 가로되 차라리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겠습니다. 장자가 가로되 가십시오. 나는 장차 진흙 속에 꼬리를 끌겠습니다(이 얘기는 莊子 外篇 秋水에 나옴). 은 음이 복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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