雕檀▶雕는 새길 조. 彫刻할 조.
見池陽問優塡雕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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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양문의 우전조상(위 卷第五)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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刊▶새길 간. 깎을 간.
丘寒切 削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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丘寒切이니 깎음(削)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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奕奕▶奕은 클 혁. 아름다울 혁. 빛날 혁. 원음이 역.
音亦 太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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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이 亦이니 太(大와 통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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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與
音余 與歟同 語終之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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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이 여니 歟(어조사 여)와 같음. 말을 마치는 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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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名
尋僧史 師號遠起梁武帝 號婁約法師 次隋煬帝號智顗의禪師竝爲智者 無大師二字 唐中宗號萬回爲法雲公 加公一字 玄宗開元中 有慧日法師 中宗朝 得度師義淨遊西域回 進眞容梵夾 賜號慈敏 亦未行大師之字 穆宗朝 天平軍節度使劉總奏乞出家 賜紫衣 號大覺師 止師一字 至懿宗朝 咸通十一年 十一月 十四日 延慶節 因內談論左街雲顥호 賜三慧大師 右街僧徹 賜淨光大師 師號 懿宗朝始也 顥 音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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僧史를 尋究하니 師號는 멀리 梁武帝에서 일어났으니 婁約法師라고 호했다. 다음엔 隋煬帝(재위 605-616)가 智顗의禪師라고 호했으며 아울러 智者라 했지만 大師란 二字가 없었다. 唐中宗(재위 684-709)이 萬回를 호해 法雲公이라 했는데 公이란 一字를 더했다. 玄宗(재위 712-756) 開元中713-740에 慧日法師가 있었다. 中宗朝에 得度師 義淨(635-713)이 서역에 노닐다 돌아와서 眞容(참모습을 模寫한 그림이나 像. 이 文에선 佛眞容을 가리킴. 佛祖統紀卷第四十에 이르기를 聖歷元年698 五月 義淨三藏이 西竺으로부터 돌아왔다. 車駕가 上東門에 거둥하여 맞이해 위로하고 조칙으로 바친 바 金剛座 佛眞容 舍利 梵經을 佛授記寺道場에 안치하고 대중을 모아 翻譯케 했다)과 梵夾(夾은 東西的器具를 끼움임. 梵夾이란 것은 梵葉經이니 板으로써 그것을 끼웠으므로 이를 일러 梵夾이라 함)을 進上하자 慈敏이란 호를 주었으나 또한 大師란 글자를 행하지 않았다. 穆宗(재위 821-824)朝에 天平軍節度使 劉總이 奏乞(奏請해 乞求함)하여 출가하자 紫衣를 주고 大覺師라 호했으니 단지 師 一字였다. 懿宗(재위 859-873)朝에 이르러 咸通十一年870 十一月 十四日 延慶節에 內殿에서 담론함으로 인하여 左街의 雲顥호에게 三慧大師를 주고 右街의 僧徹에게 淨光大師를 주었다. 師號는 懿宗朝에 비롯했다(師號는 멀리 以下의 文은 大宋僧史略卷下에 나옴). 顥는 음이 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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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世
五代亂離 十國徧霸 劉陟據廣州稱漢 僭참帝號 據嶺南北四十七州 至大有十五年卒 子玢빈분立號二世 陟更名龑엄 音儼 份 音彬빈▶份은 玢분빈으로 의심됨. 宗統編年卷之十八에 玢으로 지어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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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代의 亂離(전쟁이나 분쟁 따위로 세상이 어지러워진 事態)에 十國이 徧霸(두루 覇者가 됨. 혹은 偏覇로 의심됨)했는데 劉陟척(재위 917-942)은 廣州에 雄據하며 漢이라 일컬었고 帝號를 僭稱(멋대로 분수에 넘치게 스스로 임금이라 이름. 또는 그 칭호)했음. 嶺南北 四十七州를 根據하다가 大有十五年942에 이르러 卒하고 아들 玢빈이 옹립되어 二世라 호했으며 陟을 更名해 龑엄이라 했음. 音이 엄임 玢빈분은 음이 彬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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