葬熊耳
當云葬龍耳 蓋有其緣 西晉文帝 聞璞박郭爲人相墓地遂微服觀之 謂主人曰 此葬龍角當滅族 何爲葬此 主人曰 郭璞云 此是龍耳 三年當有天子至 帝曰 出天子耶 主人曰 非出天子 能致天子也 傳燈作呂才葬虎耳 亦非也▶璞郭은 郭璞으로 의심됨. ○呂才 唐博州淸平人也 官至太常丞 善陰陽術數 嘗撰卜宅篇 凡七章 甚祛거俗執 因附一二于下 其六曰 且人有初賤而後貴 始泰而終否비者 子文爲令尹 仕三而已 展禽三黜於士師 彼家墓已定而不改 此名位不常 何也 故知榮辱升降 事關諸人而不由葬也 世之人爲葬巫所欺 悉擗벽踊茶毒以期微幸 由是相塋영隴 希官爵 擇日時 規財利 謂辰日不哭 欣然而受吊 謂同屬不得臨壙 吉服避送其親 詭궤斁역禮俗 不可以法也 詭 過委切 詐也 斁 音亦 猒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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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葬龍耳로 지어야 함. 대개 그 인연이 있으니 西晉의 文帝(司馬昭)가, 郭璞박이 사람을 위해 墓地를 觀相(사람의 얼굴 등을 보고 성질이나 운명 따위를 판단함)했다 함을 듣고 드디어 微服(지위가 높은 사람이 무엇을 몰래 살피러 다닐 때 입는 襤람褸한 옷. 微行할 때의 服裝)으로 그것을 살폈다. 주인에게 일러 가로되 이 葬地는 龍角이라 滅族함이 마땅하거늘 왜 여기에 葬事 지냈는가. 주인이 가로되 곽박이 이르기를 이것은 이 龍耳다. 三年 만에 마땅히 天子의 이름(至)이 있을 것이다. 帝가 가로되 천자가 나온다 하던가. 주인이 가로되 천자가 나옴이 아니라 능히 천자를 이르게(致) 한다 했다. 전등록(卷第十一)에 呂才가 虎耳에 매장했다 로 지어졌으나 또한 그름. ○呂才는 唐의 博州 淸平 사람이다. 벼슬이 太常丞에 이르렀으며 陰陽術數를 잘했다. 일찍이 卜宅篇을 지었는데 무릇 七章이다. 매우 俗執(世人의 固執)을 물리쳤는데(祛는 물리칠 거) 인하여 한 둘을 아래에 부친다. 그 六에 가로되 또 사람은 처음은 賤하다가 뒤에 貴하게 되거나 처음은 통하다가(泰는 통할 태) 마침내 막히는(否는 막힐 비) 者가 있다. 子文이 令尹이 되어 세 번 벼슬할 따름이었으나 展禽(魯나라의 大夫 柳下惠)은 士師(古代에 法令과 刑罰을 맡아보던 裁判官)에서 세 번 쫓겨났다. 그 집의 墓는 이미 定해져 바뀌지 않았건만 이 名位가 恒常하지 않음은 왜이냐. 고로 알지라 榮辱과 升降은 일이 諸人에게 관련된 것이지 葬地를 말미암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葬巫(巫는 무당 무)에게 속는 바가 되어 모두 茶다도毒(荼도毒과 같음)에 擗踊(擗은 가슴 칠 벽. 踊은 뛸 용. 곧 부모의 喪事를 만난 喪制가 매우 슬퍼 울며 가슴을 두드리고 몸부림을 침)하며 微幸(작은 幸運)을 기약하나니 이로 말미암아 塋隴(塋은 무덤 영. 隴은 언덕 롱. 두둑 롱)을 觀相하며 官爵을 희망하고 일시를 간택하여 財利를 꾀한다(規는 꾀할 규). 이르기를 辰日엔 哭하지 않고 欣然히 吊問을 받아라. 이르기를 同屬(같은 붙이)은 壙(뫼 구덩이 광)에 臨함을 얻지 말아라. 吉服(三年喪을 마친 뒤 입는 보통 옷)엔 그 어버이를 전송함을 피하라. 禮俗(冠婚喪祭 따위. 예로부터 행해져 오는 儀禮)을 詭斁(詭는 속일 궤. 斁은 싫어할 역. 곧 속이고 싫어함)하므로 가히 법으로 쓰지 못한다. 詭는 過委切이니 詐임. 斁은 음이 역이니 猒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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曹山
師諱本寂 泉州蒲田黃氏子 生於會昌之世 年十九 於福州靈石山出家 咸通初 訪道于洞山 一日 請益洞山 曰 闍梨名甚 師曰 本寂 山曰 向上更道 師曰不道 山曰 爲甚不道 師曰 不名本寂 洞山深器之 密印所證 及受洞山五位詮量 特爲叢林標準 後請止撫州曹山 學者雲集 至昭宗天復辛酉季夏月夜間 問僧 今是何日月 對曰 六月十五日 師曰 曹山一生到處 只管九十日爲一夏 至明日告寂 年六十有二 諡元證大師 曹山卽洞山之嗣子 今不言洞曹 言曹洞者 亦猶慧遠卽慧持之的兄 但言持遠而不言遠持 蓋由語便而無它 叢林或指曹爲曹溪 蓋不知世裔來歷之遠近 妄自牽合 迺내絶知者之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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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휘는 本寂(840-901)이며 泉州 포전 黃氏의 아들이다. 會昌841-846의 時代(世)에 태어났다. 나이 十九에 복주 靈石山에 출가했고 咸通初860 洞山에게 訪道(問道)했다. 어느 날 동산에게 請益하자 가로되 闍사梨는 이름이 무엇인가. 스님이 가로되 本寂입니다. 山이 가로되 向上하여 다시 말하라. 스님이 가로되 말하지 못합니다. 山이 가로되 무엇 때문에 말하지 못하느냐. 스님이 가로되 이름이 本寂이 아닙니다. 동산이 깊이 그를 法器로 여겼고 密印으로 증명한 바였다. 및 洞山의 五位(正中偏 偏中正 正中來 偏中至 兼中到)의 詮量(詮은 갖출 전. 평론할 전. 곧 평론하며 헤아림)을 받았는데 특별히 총림의 표준이 되었다. 후에 請하여 撫州 曹山에 居止하자 학자가 운집했다. 昭宗 天復辛酉901 季夏月(六月) 야간에 중에게 묻되 오늘이 이 무슨 日月인가. 대답해 가로되 六月 十五日입니다. 스님이 가로되 曹山이 一生에 이르는 곳마다 단지 管帶(몸과 마음에 지니어 잊지 않음)하여 九十日로 一夏를 삼았다. 다음날에 이르러 告寂(入寂을 告함이니 곧 죽음)했다. 나이가 六十有二며 시호는 元證大師이다. 조산은 곧 동산의 嗣子이지만 지금 洞曹라고 말하지 않고 曹洞이라고 말하는 것은 또한 마치 慧遠은 곧 慧持의 的兄(的은 實임. 明임. 곧 的實한 형)이지만 단지 持遠이라고 말하고 遠持라도 말하지 않음과 같다. 대개 말의 편함을 말미암음이며 다른 게 없다. 총림에서 혹은 曹를 가리켜 曹溪라 하거니와 대개 世裔(時代의 後裔)의 來歷의 遠近을 알지 못하고서 망령되이 스스로 끌어다 합친 것이니 이에 知者의 들음(聽)을 끊음이다(曹山元證禪師語錄에 이르되 드디어 曹谿로 가서 조사의 탑에 예배하고 吉水로 돌아왔다. 대중이 스님의 이름을 嚮향한지라 이에 開法하기를 청했다. 스님의 意志가 六祖를 흠모했으므로 드디어 산 이름을 曹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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