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태화선학대사전 1책(ㄱ)

국역태화선학대사전(國譯泰華禪學大辭典) 1책(ㄱ) 80쪽

태화당 2019. 4. 28. 18:11

覺浪盛淸代曹洞宗僧道盛號覺浪 詳見道盛

각랑성(覺浪盛) 청대 조동종승 도성의 호가 각랑이니 상세한 것은 도성(道盛)을 보라.

 

却來回來 返回 同卻來 祖堂集五雲巖 師擧高聲云 早晩卻來 對曰 待和尙有住處卽來(早晩 何時)

각래(却來) 회래. 반회. 각래(卻來)와 같음. 조당집5 운암. 스님이 고성(高聲)을 일으켜 이르되 조만(早晩)에 각래(卻來)하겠는가. 대답해 가로되 화상이 주처가 있음을 기다렸다가 곧 오겠습니다(조만은 어느 때).

 

却來首座雖大方之尊宿 若住持能以禮致之 亦可充此職 是云退位爲人 退位爲人謂之卻來首座 [象器箋六]

각래수좌(却來首座) 비록 대방의 존숙이나 혹 주지일지라도 능히 예로써 불러 이르게 하여 또한 가히 이 직에 충당함. 이를 일러 퇴위(退位)하여 사람을 위한다 함이니 퇴위하여 사람을 위함을 이를 일러 각래수좌(却來首座)라 함 [상기전6].

 

覺力(1881-1933) 福建廈門人 俗姓林 年十九禮鼓山湧泉寺萬善和尙披剃 名復願 字圓通 號覺力 嘗親近本忠律師硏習戒律 年二十九 初渡臺灣 駐錫臺北縣凌雲禪寺 後歸湧泉寺任首座 年三十三 應臺灣信衆之迎請 於苗栗大湖開創法雲禪寺 一時四方善信多聞風歸投 師依叢林體制 行持百丈淸規 又開辦佛學社 硏究院 培養弘法人才 於是法務大興 住衆二百餘人 年三十七 與善慧心源二師 於臺北合創臺灣佛敎中學林(泰北中學之前身) 師修持嚴謹 過午不食 夜不倒單 自化化他 駐臺二十年 弘宗演敎 七次傳戒 度衆無數 法嗣遍及臺灣各地 對臺灣佛敎貢獻甚大

각력(覺力) (1881-1933) 복건 하문 사람. 속성은 임이며 나이 19에 고산 용천사 만선화상에게 치례(致禮)하고 피체(披剃)했음. 이름은 복원(復願)이며 자는 원통이며 호가 각력임. 일찍이 본충율사를 친근하며 계율을 연습했음. 나이 29에 처음으로 대만에 건너가 대북현 능운선사(凌雲禪寺)에 주석했으며 후에 용천사로 돌아가 수좌를 맡았음. 나이 33에 대만 신중(信衆)의 영청(迎請)에 응해 묘률대호에 법운선사(法雲禪寺)를 개창하니 일시에 사방의 선신(善信)이 많이들 도풍을 듣고 귀투(歸投)했음. 스님이 총림의 체제에 의해 백장청규를 행지(行持)했으며 또 불학사ㆍ연구원을 개판(開辦; 건립)하여 홍법할 인재를 배양했음. 이에 법무(法務)가 대흥하여 거주하는 대중이 200여 인이었음. 나이 37에 선혜ㆍ심원 두 스님과 함께 대북에 대만불교중학림(臺灣佛敎中學林; 태북중학의 전신)을 합동으로 창건했음. 스님은 수지(修持)가 엄근(嚴謹)했으며 정오를 지나서는 먹지 않았으며 밤에는 도단하지 않았음(不倒單; 눕지 않음). 자화화타(自化化他)하며 대만에 주석하기 20년에 홍종(弘宗)하고 연교(演敎)하며 7차례 전계하였고 제도한 무리가 무수했음. 법사(法嗣)가 대만 각지에 두루 미쳤으며 대만불교에 대한 공헌이 매우 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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